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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 Jan 09. 2022

관심 속에 담겨 있는 것

나는 내 삶에 별 관계없다고 판단되는 일들에 대해 무관심한 경우가 많다. 예컨대 연예계의 스캔들, 형사처벌 대상이 아닌 비도덕적 구설수, 검증되지 않아 추측에 머무르는 가십거리 등을 말한다.


물론 그렇게 부유하는 소문이 그 자체로 재미가 있거나 그 안에 나의 흥미를 자극할만한 요인이 숨어 있다면 이야기는 조금 다르지만, 어쨌거나 나는 그런 것들에 대체로 관심이 매우 적은 편이다.


그래서 실제로 연예계의 소식이나 사회 이슈들에 대해 매우 둔감하다. 아, 정치계는 좀 다르다. 그곳의 일들은 내 삶과 직간접적으로 관계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 나와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어느 정도 적용된다. 산후조리원에 있는 아내가 점심을 어떻게 해결했는지, 친하게 지내던 친구의 연락이 뜸해진 이유가 무엇인지, 얼마 전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다고 말하던 후배의 시험결과가 합격인지 불합격인지에 대해 나는 별 관심이 없다.


당연히 조리원에서 나오는 점심을 먹었을 것이고, 내가 싫어졌거나 최근 바쁜 일이 생겼거나 연락할 일이 없거나 셋 중 하나일 것이다. 또한 시험의 합격유무를 떠나 그 후배는 지금까지 그래왔듯 자신의 인생을 잘 살아갈 것이다. 내가 신경 쓴다고 별로 달라질 것도 없을 거라 생각하고, 달라지는 상황이라면 내게 직접적으로 요청해 주었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한다. 이는 무신경한 태도를 기본으로 살아가는 나의 일방적인 부탁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 내게 과도하게 관심을 갖는 것도 좋아하지는 않는다. 저녁은 잘 챙겨 먹었는지, 저번 시험은 잘 봤는지, 추운데 옷은 따뜻하게 입었는지 따위에는 과도하게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건 내가 알아서 응당 해왔고, 해 나갈 것들이다.


이런 것들을 스몰토크라고 하던가? 사실이라면 나는 스몰토크를 싫어하는 것이 분명하다. 나는 그런 관심보다 내가 흥미를 가진 것들에 대한 생각을 자유롭게 교환하고 싶다. 의식주와 같은 당연한 것들보다, 각자의 삶의 개성을 키워주고 있는 당연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변명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러한 태도의 밑바탕에는 결국 그러한 관심과 소소하게 신경 써주는 모습들이 실질적으로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경험상 저녁을 먹었냐는 질문에 먹지 않았다고 말해봐야 아직까지 저녁도 안 먹고 뭐 했냐, 얼른 밥을 먹으라는 등 들으나 마나 한 도움이 되지 않는 대답이 돌아올 확률이 높았다. 그래서 결국 그 대화 자체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물론 잠시 추가로 설명하자면, 그렇게 말하며 실제로 저녁을 챙겨 주려 애쓰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에게는 그의 질문과 대답이 무의미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진심으로 감사를 보낸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렇게까지 신경 써줄 필요는 없다고도 덧붙이고 싶다. 저녁을 먹는 건 내가 충분히 알아서 할 수 있는 일이니까.


그런데 이런 나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바꿔놓은 사람이 있다. 바로 나의 아내다. 아내는 가까운 사람이 자신에게 세세하게 관심 가져주고 신경 써주는 것을 좋아하고, 자신도 가까운 사람에게 세세하게 관심 가져주고 신경을 써준다.


나와 정반대인 아내의 태도는 때로 우리에게 갈등을 가져오기도 했고 지금도 그러한 갈등이 완전히 사라졌다고는 할 수 없다. 갈등의 봉합을 위해 나와 아내는 서로의 태도를 고수하되 서로를 이해하며 살아가기로 했었는데, 그것은 오랜 시간 다른 모습으로 살아온 우리가 정한 타협점이기도 했다. 물론 그럼에도 우리가 서로를 완전히 이해했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돌아가기로 했다고 카톡을 보낸 뒤 역에 도착해서 지하철을 기다리며 서 있었는데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확인해 보니 아내로부터 지하철을 몇 번 입구에서 타면 좋은지, 지하철에서 내린 뒤에는 몇 번 출구로 나가면 되는지, 그다음에는 어느 방향으로 걸어가면 되는지 친절한 설명이 도착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길지 않은 내용들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내용이기도 했지만, 그전에 그 안에 담긴 마음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이게 바로 아내가 늘 중요하게 여기던 태도 속에 숨어 있던 마음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아내가 내게 보여주는 모습들의 밑바탕에는 도움이 되는지의 여부가 아니라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그러나 숨기지 못했던 커다란 마음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물론 사람이 쉽게 바뀌지는 않는다. 그 뒤로도 나는 내 모습을 구태여 바꾸려고 시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이전에는 부정적으로 바라보던 관심들과 무의미하다 여겼던 질문들, 일상 속 스몰토크를 달라진 시선으로 바라볼 수는 있게 되었다.


사람은 모두 다르다. 그 모든 것에 공감할 수도, 공감할 필요도 없겠지만, 이해하려고 노력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무의미하게 여겨지는 것일지라도, 누군가에게는 큰 의미로 다가올 수도 있다는 것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 그에 대해 얕게 생각하고 쉽게 접근한다면 불필요한 갈등이 야기될 수 있고, 그렇다면 그런 태도를 좋은 태도라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인을 이해하려는 태도는 곧 사회 속에서 타인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우리들이 최소한으로 갖춰야 할 태도이자 출발점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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