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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제 전용석 Apr 27. 2024

[장자1] 소요유(1) - 물고기가 변하여 새가 되고


[1] 소요유1 - 물고기가 변하여 새가 되고



1. ‘북쪽 깊은 바다’에 물고기 한 마리가 살았는데, 그 이름을 곤(鯤)이라 하였습니다. 그 크기가 몇 천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 물고기가 변하여 새가 되었는데, 이름을 붕(鹏)이라 하였습니다. 그 등 길이가 몇 천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한번 기운을 모아 힘차게 날아오르면 날개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 같았습니다. 이 새는 바다 기운이 움직여 물결이 흉흉해지면, 남쪽 깊은 바다로 가는데, 그 바다를 예로부터 ‘하늘 못(天池)’이라 하였습니다.


2. 이상한 일을 다룬 『제해(齊諧)』라는 책에도 이 새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붕이 남쪽 깊은 바다로 갈 때, 파도가 일어 삼천 리 밖까지 퍼진다. 회오리바람을 일으켜 그것을 타고 여섯 달 동안 구 만리 장천을 날고 내려와 쉰다.”


3. [저 아래 땅 위에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티끌이 날고, 생물들이 서로 숨을 불어 주고, 하늘은 푸른데, 그것이 하늘의 본래 색깔입니까? 끝없이 멀기 때문에 푸르게 보이는 것은 아닙니까? 붕새가 높이 떠서 내려다보니까 이처럼 까마득하고 푸르게 보일 뿐입니다.


4. 괸 물이 깊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울 힘이 없습니다. 물 한 잔을 방바닥 우묵한 곳에 부으면 그 위에 검불은 띄울 수 있지만, 잔을 얹으면 바닥에 닿아 버리고 맙니다. 물이 얕은데 배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바람이 충분하지 못하면 큰 날개를 띄울 힘이 없습니다. 구만리 창공에 오른 붕새는 큰 바람을 타야 푸른 하늘을 등에 지고 거침이 없이 남쪽으로 날아갑니다.



매미와 새끼 비둘기


5. 매미와 새끼 비둘기가 그것을 보고 함께 웃으면서 말합니다. “우리는 한껏 날아 보아야 겨우 느릅나무나 다목나무에 이를 뿐이고, 어떤 때는 거기에도 못 미쳐 땅에 내려앉고 마는데, 구만 리를 날아 남쪽으로 간다니.”


가까운 숲으로 놀러 가는 사람은 세 끼 먹을 것만 가지고 가도 돌아올 때까지 배고픈 줄 모르지만, 백리 길을 가는 사람은 하룻밤 지낼 양식을 준비해야 하고, 천리 길을 가는 사람은 석 달 먹을 양식을 준비해야 합니다. 매미나 새끼 비둘기 같은 미물이 어찌 이를 알 수 있겠습니까? 조금 아는 것(小知)으로 많이 아는 것(大知)을 헤아릴 수 없고, 짧은 삶(小年)으로 긴 삶(大年)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다른 이야기 하나


6. 『상(商)나라 시조 탕왕(湯王)이 신하 하극(夏棘)에게 물음』이라는 책에도 이와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북쪽 메마른 땅에 깊은 바다가 있었는데, 이를 ‘하늘 못(天池)’이라 했습니다. 거기에 곤(鯤)이라는 물고기 한 마리가 있었는데, 그 폭이 수 천리나 되고 그 길이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붕(鵬)이라는 새도 한 마리 있었는데 그 등이 태산 같고, 날개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 같았습니다. 회오리바람을 타고 구름 위로 솟아올라 푸른 하늘을 등에 지고 구만 리를 날아 ‘남쪽 깊은 바다’로 갔습니다.


메추라기가 이를 보고 비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저 새는 저렇게 날아서 어디로 간단 말인가? 나는 한껏 뛰어올라도 몇 길을 못 올랐다가 내려앉아서 기껏해야 이 숲에서 저 덤불로 날아가는데, 도대체 저 붕새는 저렇게 날아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큼과 작음의 차이가 이렇습니다.”



자유의 네 단계


7. 그러므로 그 아는 것이 벼슬자리 하나 채울 만한 사람, 그 행위가 마을 하나를 돌볼 만한 사람, 그 덕이 임금 하나를 섬길 만한 사람, 그 재능이 한 나라를 맡을 만한 사람, 이런 사람들은 그 기량(器量)이 저 메추라기만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송영자(宋榮子)는 그런 사람들을 비웃었으며, 그는 온 세상이 자신을 칭찬해도 우쭐하지 않고, 비난해도 기죽지 않았습니다. 내실(內實)과 외식(外飾)을 분명히 구별하고, 영광과 치욕의 경계를 확실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일을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도 아직 이르지 못한 경지가 있었습니다.


열자(列子)는 바람을 타고 올라가 마음대로 노닐다가 열 닷새가 지나서 돌아왔습니다. 세상의 행복에 연연하지 않고 초연히 노닐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을 만큼 초연하지는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늘땅의 바름(正)을 타고, 여섯 가지 기(氣)의 변화를 부려, 무한한 경지에서 노닐 수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람이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그러므로 지인(至人)은 자신에 집착하지 않으며, 신인(神人)은 공적에 무관하고, 성인(聖人)은 명예를 탐내지 않습니다.


- 오강남, 장자에서 번역문 발췌




장자의 첫 대목은 저 유명한 ‘소요유’ 라는 말로 시작한다. 소요유는 ‘자유롭게 노닐다’ 는 뜻인데 이 자유가 그냥 자유가 아닌 ‘절대 자유’ 다. 자유면 자유인데 어째서 절대 자유인가 하면 이 세상의 상대성을 완전히 초월한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자는 전체 이야기의 시작에서 크기가 몇 천리 이상이나 되는 곤이라는 물고기부터 등장시키고 이 물고기는 또 붕이라는 새로 변신하여 날아간다. 그리고 다음에는 아주 작은 새인 메추라기를 등장시키는데 ‘재능이 한 나라를 맡을 만한 사람’ 조차도 기량이 메추라기 만한 사람이라고 작디 작게 표현한다. 


장자의 이야기 속에서 열자는 엄청난 도인이다.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며 마음껏 놀고 세상의 행복에 연연하지 않는 능력자다. 그러나 아무것에도 의지하지 않을 만큼은 아니다. 여기서 의지한다는 것은 곧 집착을 뜻한다. 이 이야기 속에서 문득 슈퍼맨과 몇 년 전 유행했던 도깨비라는 드라마가 떠오른다.  물질적인 차원에서 보여줄 수 있는 최대치의 능력을 보여주는 슈퍼맨도, 천 년 넘게 죽지 않고 살아오면서 세속의 법칙에 통달한 듯한 도깨비도 사랑이라는 감정에 얽힌 집착은 떨치지 못했다. 영화와 드라마는 아름다운 사랑의 결말로 미화해서 보여주려 하지만 그것이 얽매임이고 자유에 반하는 것임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보통 장자는 노자와의 연장선상에서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 이름하여 종종 ‘노장자’ 라고 부르기도 한다. 분명 노자와 장자는 같은 방향을 추구한다. 그것은 바로 동양철학의 중심에 놓여있는 도道’ 를 향하고 있다. 사실 공자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동양철학은 도를 지향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노장자를 한데 묶어 지칭할 수 있는 것은 그 나름의 구체적인 방법론에 있다. 후대에 이 방법론은 더욱 구체화되어 도교라 불리며 그야말로 디테일한 수련법으로 전개되었음을 역사적 사실로도 확인할 수 있다.


보통 유불선 삼교라는 표현을 쓴다. 동양철학을 대표하는 3대 철학이자 종교인 유교, 불교, 선교(도교)라는 뜻이다. 어떤 이들은 삼교 합일이라고 하여 이 종교적 철학(철학적 종교?)들을 하나로 통합하고자 노력하기도 한다.


필자의 의견을 미리 밝혀두자면 공자로 대표되는 유교는 이론을 바탕으로 한 학문에 가깝다. 장자에서 유교를 대표하는 인물로 등장하는 공자는 이야기를 위해 지어진 가상의 존재이기는 하지만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지는 않다) 상당 부분 ‘겸손한 쪼다’ 로 묘사된다. 오죽하면 제자인 안회보다 못한 인물로 등장하겠는가. 그래도 자신의 모자람을 알고 배우려는 그 의지만큼은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물론 이조차도 장자의 설정에 가까울 테지만 말이다). 후대로 이어지면서 유교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과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으로 나뉘는데 말이 어렵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디테일하게 들어가면 복잡하기는 할 것이다. 이론이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 결국 이치(理)와 실질적 작용인 기(氣)가 하나인가 둘인가 하는 내용으로 두 이론의 주장자들이 파로 나뉘어 서로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공자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는 말을 남겼다고 알려져 있는데 도는 머리로 백날 생각해서 이론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이후에 등장할 본문 내용 중에도 장자는 이런 관점으로 도를 알고자 하는 공자를 비판하고 있다. 


다음으로 선교 혹은 도교에 대해서 살펴보자.

필자는 도교의 선구자인 노자와 장자에 대해 높은 경지에 이른 인물로 본다. 그러니까 과거에는 노자에 대한 글을 남긴 바 있고 (노자 - 비움으로 도를 향해 나아가는 길 / https://cafe.naver.com/growingsoul/24769 혹은 블로그의 글 https://blog.naver.com/kali9/221855111623 ) 지금도 이렇게 장자에 대한 글도 쓰고 있는 중일 터다. 하지만 흔히 알려진 선/도교에 대해서는 점수를 많이 깎아내려야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선/도교는 결국 신선이 되어 불로장생함을 목표로 한다. 정확한 기록인지 모르겠지만 어떤 도사들은 육신을 가지고 300여 년을 살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이론적으로 선도교는 적절한 수양을 통해서 자신의 몸 안에 특정한 기(氣)적인 존재를 배양해서(입태) 거의 영원히 죽지 않고 존재할 수 있는 에너지적인 존재를 낳는데 (출신) 육신은 결국 소멸되겠지만 이런 기(氣)와 신(神)적인 존재는 남아서 늙지 않고 살아감을 궁극적 목표로 한다. 수염이 허연 죽지 않는 노인들이 바둑을 두며 지내는 세상에 우연히 다녀왔더니 도끼자루가 썩어있더라는 옛날 이야기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우리같은 일반인들이 보기에 실로 대단한, 상식을 뛰어넘는 초능력자로 보이기는 하지만 정말 이런 일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상상해보더라도 인고의 노력 끝에 이런 경지에 도달하면 정말 그것이 최선일까? 동양의 선/도교 외에도 인도의 초울트라 요가의 세계에도 비슷한 이야기들은 전해진다. 그들은 중국이나 북동지역처럼 늙어서 죽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가장 젊었을 때의 모습으로 죽지 않는 상태를 이어간다고까지 전해진다. 참으로 얼핏 들어보면 환상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상당히 짧은 수명을 살면서 늙고, 병들고, 결국에는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에 반해서 늙지도 죽지도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다른 삶, 다른 세상을 살아가게 되면 정말로 두고두고 행복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엄청난 궁극의 목표를 이루기는 거의 불가능할지 모르므로 열심히 수양해서 200-300년 수명을 살다가 죽으면 조금 더 수명을 늘리는 것이 무엇이 그리 좋겠는가? 결국 생노병사, 이별의 괴로움, 미운 사람을 만나야 하는 괴로움 등으로 점철된 궁극적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는 없으리라. 


어느 장군이 병사들을 이끌고 어느 봉우리로 향했다. 그 봉우리에 죽기살기로 도달하니 장군은 여기가 아니다 라고 했다. 다음으로 다른 봉우리로 향했다. 더욱 죽을 힘을 다해서 도착하니 “아까 거기로구나!” 했다는 우스갯 소리가 있다. 선도교가 지향하는 궁극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해야 할 노력은 어느 높은 산봉우리를 오를만한 노력에 비할 바가 아니다.


마지막으로는 불교에 대해서다.

필자는 부처님과 그 가르침을 믿지만 불교신자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조계종 같은 종파의 신도도 아니고 정기적으로 나가는 절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오래 전부터 바른 명상의 길을 찾다가 보니 원래부터 조금은 알고 있던 부처님의 가르침이 진짜배기였구나 하는 것을 깨닫고 공부를 하고 실천을 하고 있는 사람일 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 ‘와서 보고 직접 알고 확인해라’ 고 남기신 말씀처럼 알면 알수록 그 가르침이 보물같은 것이구나 하면서 깨달아 가고 있다. 


여러 종교를 비교하여 객관적으로 연구하고자 하는 비교종교학자들에 의하면 불교는 여타 종교들과는 그 궤를 달리하는 특이함이 두드러진다고 한다. 보통 종교라 하면 신이 존재하며 그런 신(들)이 숭배의 대상이 된다 - 숭배의 대상은 유일신이 될 수도 있고 다양한 신들이 될 수도 있다. 불교에는 다른 종교와 같은 그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 여기서 대중들이 흔히 알고 있는 대승불교는 일단 제외하도록 하자. 대승불교는 힌두교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변형되면서 숭배의 대상이 되는 온갖 신들(천수보살,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약사여래 등)이 존재한다. 굳이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다 치면 붓다는 신이 아니라 궁극적 깨달음을 얻은 인간의 표상이며 생로병사의 무한한 반복으로 경험해야 하는 괴로움을 완전히 종식시킬 방법을 찾아 대중들에게 전해준 고마운 존재이다. 


처음에 붓다는 종교 조직을 창건했다기 보다는 이 완전한 깨달음의 방법을 함께 고행하던 다섯 동료들에게 전하고자 했다. 그 시도는 성공했고 그 장소와 과정이 바라나시 인근의 사르나트에서 있었던 초전법륜이라 부른다. 2,500 여 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승단은 여러 조직으로 나뉘는 등 변화를 겪게 되는데 그 중 눈에 띄는 집단이 현재 대승불교라 불리는 조직이다. 지면과 글의 성격상 자세한 불교의 역사를 언급하기는 어렵지만 대승불교가 과연 붓다의 본래의 가르침을 담은 그릇일까? 필자는 아니라고 본다. 너무나 다행하게도 이런 저런 종교 분파를 넘어서 붓다의 행적과 직접적인 가르침을 거의 고스란히 담고 있는 빨리어를 음사한 경전이 존재하는데 이를 ‘니까야’라고 부르며 우리말로는 ‘초기경전’ 이라 부른다. 이것이 한역된 내용이 불경의 아함경이다.


감히 말하지만 붓다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려면 불교 - 대승경전 - 가 아닌 빨리어의 초기경전을 보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금강경, 반야심경 등 일부 대표적인 대승경전은 붓다의 본래의 가르침을 상당히 훼손하지 않고 담고 있는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될 수 있으면 붓다의 본래 행적과 말씀에 귀 기울여 보는 것이 시간을 절약하고 혼란을 줄이는 길이 되지 않겠는가?


유불선에서 시작된 언급이 꼬리가 길었다. 정리하자.

유교는 너무 이론에 치우쳐 있다. 그런 것은 어려운 책공부 좋아하는 학자들에 대한 유희감으로 충분하다.

선교와 도교는 ‘이렇게 하라’는 실증론을 펼치지만 결국에는 무익한 환타지로 빠진다. 물론 그런 것이 좋다면야 어쩔 수 없지만.

불교는 붓다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려주는 방향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유불선 중에서 믿을 만한 방편은 이것뿐이다. 최고이다.


노자와 장자는 붓다의 가르침에서 지향하는 바른 깨달음의 직전 상태까지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본다. 노자는 요점만 언급하는 간략한 표현을 통해서 그러하고 장자는 구구절절 하고 온갖 비유를 들어가면서 그러하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미리 강조해두고 싶다.

장자에 대한 여러 한글 번역본들이 존재하지만 이 오강남 교수의 번역본이 그 중 제일 편안하게 읽히고 이해하기 쉽다고 여겨서 이것으로 선택했다. 물론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으니 다른 번역본이 더욱 와닿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이 장자 한자 원문에 대한 이해는 어렵기에 번역본을 찾아 볼 수 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본문에 대한 해설에 너무 얽매이지는 않았으면 한다. 사실 번역자들 대부분이 철학자들이고 해설문들 대부분이 너무나 사변적임을 보고 놀랐다. 일정 분량의 글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라도 알고 있던 여러 지식의 조각들을 갖다 붙일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있을 것이다. 감히 내가 장자 본인이었다면 이런 해설본들을 본다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지 않았으려나!? (^^)

해설문을 읽으면 그에 대한 장단점이 함께 존재하리라고 보는데 그 중 단점이라면 너무 집중해서 볼 때 그 해설의 프레임에 갇히게 된다는 점이다. 이는 장자의 정신과도 상당히 위배된다고 본다. 왜냐하면 장자의 비유적인 이야기들은 '도道)를 향한 자유로운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기 때문이다.


장자의 비유 중 대표되는 존재인 나비가 잠자리보다 아름다운 이유는 그 비행의 궤적이 불규칙하기(자유롭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감히 이야기해 본다.

장자의 번역문을 읽되 해설문은 읽지 말라!

마음에 드는 번역문을 발견하면 여러 번 되씹어 읽으며 자유로운 상상의 나래를 펴라!


앞에서 장자의 시작인 소요유는 상대성을 초월한 ‘절대 자유’를 뜻한다고 했다.

이제 장자와 함께 절대 자유를 향한 여행을 시작해보자.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물고기 곤의 등을 타고 대양을 헤치고, 거대한 새 붕의 날개를 타고서 날아보자.



- 明濟 전용석



한흐름 마음비움센터 I 한흐름 기명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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