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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제 전용석 Apr 29. 2024

[장자2] 소요유(2) - 막고야산의 신인

의도 없음은 깨달음을 향한다


[1] 소요유2 - 요(堯) 임금이 나라를 허유(許由)에게



8. 요(堯) 임금이 나라를 허유(許由)에게 넘겨주겠다고 말했습니다. “해나 달이 떴는데도 켜 놓은 관솔불 빛은 헛된 것 아니겠습니까? 때가 되어 비가 오는데도 밭에다 물을 대고 있으면 그 노고도 헛된 것 아니겠습니까? 선생께서 위(位)에 오르셔야 세상 이 바르게 될 터인데, 제가 아직 임금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제 스스로 부족함을 알고 있으니, 청컨대 세상을 맡아 주십시오.” 허유가 대답했습니다. “왕께서 다스려 세상이 이미 좋아졌는데, 제가 왕이 되는 것은 오직 이름을 위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름은 실재의 껍데기일 뿐, 제가 그것으로 뭘 하겠습니까? 뱁새가 깊은 숲속에 둥지를 트는 데는 가지 하나만 있으면 되고, 두더지가 시내에서 물을 마시는 데는 그 작은 배를 채울 물만 있으면 됩니다. 임금께서는 돌아가 쉬십시오. 저는 세상을 다스릴 필요가 없습니다. 부엌의 요리사가 부엌일을 잘못해도 제사 시동(尸童)이나 신주(神主)가 술 단지와 적대(俎)를 들고 와서 그 노릇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막고야산의 신인(神人)


9. 견오(肩吾)가 연숙(連叔)에게 말했습니다. “접여(接輿)가 하는 말을 들었는데, 터무니없이 큰소리를 치면서 일사천리로 나아가기만 하고 돌아올 줄을 모릅디다. 그 하는 말이 실로 놀랍고 두렵더군요. 마치 은하수처럼 끝이 없더이다. 엉터리로 과장하고 겉돌아 사람들의 일상사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이야기들이었소.”


연숙이 물었습니다.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였기에?”


“멀리 고야산에 신인(神人)이 살았는데 그 살갗이 얼음이나 눈 같고, 처녀처럼 부드럽다고 했소. 오곡을 먹지 않고, 바람을 들이 마시고 이슬을 마시면서 살고, 구름을 타고, 나는 용을 몰아, 사해(四海) 밖을 노닌다는 것이었소. 정신을 응집하면 병해(病害)를 막고, 매년 곡식도 잘 익게 한다는 이야기였소. 도무지 미친 사람의 말 같아서 하나도 못 믿겠더구려.”



10. 연숙이 말했습니다. “그렇군. 눈먼 사람은 아름다운 장식 을 볼 수 없고, 귀먹은 사람은 종(鐘)이나 북소리를 들을 수 없지. 몸만 눈멀고 귀먹었겠소, 지각도 그랬겠지. 이것이 바로 그대의 일이구려. 신인(神人)은 그의 덕으로 온갖 것과 어울려 하나가 된 것이오. 세상이 모두 평화를 바라는데, 무엇 때문에 구태여 노심초사하며 애쓸 필요가 있겠소? 아무것도 이 신인을 해칠 수 없지. 홍수가 나서 하늘에 닿아도 빠져 죽지 않고, 가뭄이 들어 쇠붙이와 돌이 녹고 땅과 산이 불에 타도 데지 않으니까. 이 신인은 제 몸의 먼지와 때, 조의 쭉정이와 겨를 가지고도 요 임금이나 순 임금을 만들어 낼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세상일에 몰두하겠소?”


- 오강남 교수 번역의 장자 본문 내용에서 발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도를 가지고, 인위적으로 일을 한다. 과정은 이렇듯 의도적 인위적이며 결과는 얽매임과 집착이다. 활시위를 당기는데 욕심 때문이 집중이 흐트러지며 활시위를 떠난 화살은 자신의 마음과 전혀 관계 없음에도 그 결과에 전전긍긍한다.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씀의 방식일 것이다. 핵심적인 단어들을 나열해 보면 의도, 인위, 욕심, 집착, 그리고 이런 저런 결과로 스트레스가 뒤따르며 질병, 괴로움, 비탄, 탄식으로 이어진다. 물론 생이라는 과정에는 어떤 마음을 취하든 간에 즐거움이 따른다. 하지만 굳이 그 비율을 따져본다면 너무나 실낱같은 시간이 아닐까?


붓다의 가르침 중에 세 가지 느낌에 대한 언급이 있다. 그것은 괴로운 느낌, 즐거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다.


괴로움은 누구라도 인정할 수 있는 명백한 괴로움이다. 통증이 심한 질병이나 사고로 인한 고통, 아이를 낳는 산모의 고통, 절실히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고통 등 누구도 그 괴로움을 부정할 수는 없다. 또한 굳이 예를 들지 않더라도 즐거운 느낌도 여러 경험들로 인해 생겨날 수 있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왜 일체개고라 하며 모든 것이 괴로움이라고 할까? 심지어는 이 진술이 ‘진리’ 라고 한다. 얼핏 보면 참으로 염세적인 관점이 아닐 수 없다.

괴로움은 괴로움 맞으니 패쓰하고, 즐거움이 어째서 괴로움인지를 먼저 살펴보자. 불교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서 무한히 크게 보기도 하고 반대로 무한히 작게 보기도 한다. 무한히 작게 본다는 것은 매순간의 찰라찰라의 실상을 보는 것이며 무한히 크게 본다는 것은 가능한 최대한 전체적인 관점을 취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변적인 사고만을 바탕으로 하는 철학과는 다른 점이 있는데 불교는 ‘삼매’ 라는 고도의 정신능력을 바탕으로 해서 실상을 보는 능력이 있다. 즉 미세하게 작은 세상은 이럴 것이다, 큰 세상은 이럴 것이다 라고 생각만 하고 추측하는 기반으로의 관점이 아니다.


여기서는 일단 고도의 정신 능력으로 큰 세상의 무엇을 보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 그것은 반복되는 삶과 죽음인 윤회였고 그 바탕에 깔린 카르마(업보, 삶과 죽음을 초월한 인과관계)였다. 이것은 종교적 믿음과 철학을 넘어서 실증적인 경험에 의한 결론에 가깝다. 이렇게 ‘긴 시간의 지평’ 으로 삶을 바라볼 때 불평등해 보이기만 하던 단편적인 삶의 문제들이 해소된다. 왜 누군가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서 대단한 노력도 없이 호의호식하다가 일생을 마칠까? 왜 누군가는 예쁘고 잘 생긴 외모에 온갖 능력과 좋은 집안까지 타고 나서 일찍부터 잘 나가기만 할까? (사람들은 우스갯 소리로 그런 이들은 전생에 나라를 구했을 것 이라고 한다) 참으로 불평등하고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가 아닌가? 그런데 그런 누군가는 심성이 비뚤어져서 ‘선천적인 조건도 능력’ 이라고 주장하며 자기 부모의 잘못으로 인한 몰락의 이유를 세상의 정치적 이유를 탓하고 있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즐거움조차 괴로움인 이유는 즐거움이 사라지면 그에 집착하고 다시 얻기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지극한 즐거움의 경험이 있었다고 치자. 그것은 영원할 수 없다. 언젠가는, 아니 조만간에 사라질 것이다. 그러고 나면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시작되는데 이 때의 일반적인 마음은 다시 그 즐거움을 갈망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즐거움도 괴로움인 이유이다. 이런 마음 상태일 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도 결국 괴로움으로 치환된다. 


삶의 대부분의 시간들이 괴롭게 느껴지는 한 사람이 있었다.

필자에게 명상을 배우러 와서 일정 시간이 지나면서 대부분의 괴로움들이 사라졌다. 그렇게 되니까 하는 표현이 다음과 같았다.


‘사는 게 무료하고 지루하네요’


사람들이 느끼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의 대표적인 표현이다. 개구리 올챙이적 모른다는 속담처럼 괴로움이 사라졌으면 그것만으로도 즐거움 혹은 감사함이어야 할 텐데 역시 인간은 망각의 동물인 모양이다. 결국에는 이렇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 또한 약한 강도의 괴로움일 수 있다. 그리고 이 상태가 사실상 우리 삶의 전체적인 느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은 상태일 것이다. 스스로를 돌아보자. 그것은 무료함인가? 미약한 괴로움인가? 주변의 여기저기서 폭탄이 터지는 전쟁터에 있는 사람에게는 이런 무료함에 가까운 시간들조차 지극한 평화라고 여겨질 것이다. 도대체 마음이란?!


불교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12연기’ 라는 것에 대해 들어보았을 것이다.

바탕은 ‘연기’ 라는 것인데 가장 간단하게는 2연기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기본 개념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 이다. 모든 개체들이 상호적인 관계 속에서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무상의 속성을 보여준다. 또한 상대성에 대한 진술이기도 하다. 즉 삶이 있으므로 죽음이 있고, 빛이 있으므로 어둠이 있고, 큰 것이 있으므로 작은 것이... 반대로 삶이 없으면 죽음도 없고...


그런데 이를 확장해서 12연기가 됨으로써 우리는 이를 바탕으로 괴로움의 악순환이 반복되는 과정을 살펴볼 수도 반대로 괴로움을 완전히 종식시키는 과정을 이해할 수도 있게 된다. 운을 뗐으니 여기서는 지면 관계상 간단히만 언급하자면 무명(어리석음)으로 시작된 12연기의 시작은 (중간 요소들 생략) 태어남(출생)으로 이어지고 태어남은 늙고 죽음으로 연기된다(인과관계에 의해 이어진다). 그리고 이 삶과 죽음의 바퀴가 무한히 굴러서 괴로움이 무한반복 되는 것이다. 반대로 이 연쇄반응을 거슬러 가는 것을 ‘역관’ 이라고 하는데 그리하여 태어남을 멈추고 연기의 시작인 무명을 타파하면 계속 반복되던 괴로움은 완전히 종식된다. 이것이 열반이고 해탈인 것이다.


이 장자 이야기의 서론에서 장자는 붓다의 가르침에서 전하는 완전한 깨달음의 바로 전단계까지 데려다줄 수 있다고 언급했었다. 장자는 의도적이고 인위적으로 일을 도모하고자 하는 이가 아니다. 여기서 ‘의도’ 라는 부분을 아주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12연기의 시작은 무명(無明)인데 그 다음 요소는 행(行) 이라고 한다. 이는 무언가 행동한다는 의미가 아니고 ‘형성’ 혹은 ‘의도’ 의 뜻으로 보아야 한다. 본래 빨리어 단어가 한자로 음사되면서 행이라는 글자를 받았을 뿐이기에 이런 바탕의 내용을 알지 못하면 큰 오해의 소지가 존재하게 된다.


아무튼 우리가 어떤 의도를 가지면 그것은 어떤 결과로 이어질까? 그 의도에 해당되는 결과로 이어질, 즉 그런 물리적 실체 (혹은 경험) 가 ‘형성’ 될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에서 ‘탐진치 - 탐심, 화, 어리석음 - 를 완전히 뿌리 뽑으면 해탈’ 이라고 하는데 탐심과 화의 바탕에 깔린 어리석음(무명)은 일단 최상위 연기의 시작 요소이므로 그렇다 하더라도 우선은 탐과 진의 독소는 먼저 마음에서 뿌리 뽑아야 한다. 그런데 붓다께서는 또 다음과 같이 언급하셨다. 화의 마음은 그 부정적 파급력은 크되 뿌리 뽑기가 (상대적으로) 쉽고, 탐심은 그 파급력은 작되 뿌리 뽑기가 어렵다 고. 


탐심은 흔히 욕심이라고도 표현하고 탐욕이라 표현하기도 하는데 어디까지가 그 경계인지 알기가 쉽지 않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위험한 상황에서 목숨이라도 부지하고자 할 때 하는 노력도 욕심이라 해야할까? 강도가 들어 나와 가족의 생명이 위협 받는데 이를 지키고자 하는 행동도 욕심이라 해야할까? 


필자가 처음 이 괴로움으로 점철된 삶과 죽음의 반복되는 과정을 뿌리 뽑아야겠다고 마음 먹은 시점이 열다섯 사춘기에 막 들어서면서였다. 그때 ‘해탈’ 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고 그것을 꼭 이루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래! 나는 해탈 해야겠어!


알면 알수록 길을 가면 갈수록 그 때의 결심은 얼마나 무지로 점철된 호기로운 의도였는지를 두고 두고 돌아보게 된다.

‘뭔가 조금은 알게 된’ 지금도 해탈은 내 필생의 목적이기는 하지만 당시의 마음과는 좀 다르다. 바른 앎과 봄이 생길수록, ‘팔정도를 따르면 서원하든 아니든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는 붓다의 말씀처럼 나름의 여유가 생겼다고나 할까.


12연기에서 무명 다음의 요소가 ‘의도’ 임을 보자.

탐심 혹은 욕심을 가장 넓은 범위로 보았을 때 ‘의도’ 또한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붓다의 전생담에서 붓다가 아직 깨달음을 얻기 이전인 보살이었을 때 숲에서 사냥하던 왕을 만난다. 마음이 흉포한 왕은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그 보살의 팔을 자르는데 보살은 그에게 저항하지 않고 (신체를 보존하거나 생명을 부지하려는 의도를 가지지 않고) 단지 내생에서 이 어리석은 왕을 다시 만나게 되면 그에게 깨달음을 전수하리라고 서원하는데 내생에서 다시 만난 그 왕이 초전법륜에서 첫번째로 깨달음을 얻게 되는 꼰단냐 존자라고 전해진다.


조금은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야기들의 결론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탐심이 전혀 없다는 것은 의도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과 같은 상태이다.

이것은 완전한 깨달음은 아니지만 12연기에 의하면 '거의' 깨달음에 가까운 상태임을 알 수 있다. 행(의도를 가진 마음)을 타파하고 나면 그 다음으로 타파해야 할 대상은 무명만이 남게 되기 때문이다.

장자는 의도 없는 상태를 말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너무 높은 경지의 ‘無의도’ 의 경지라 여겨져 우리 일상 생활과는 거리감 있게 느껴질 듯하다.

그렇다고 ‘나와는 상관 없는 길’ 이라 여기며 미리 고개를 돌릴 필요는 없다고 본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팔정도를 따르면 결국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는 붓다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 될 테니까 말이다.


필자가 좋아하는 한자 표현 중에 ‘진인사 대천명’ 이 있다.

팔정도의 계 -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 를 바탕으로 지키고자 ‘노력’ 하며 그저 지금, 오늘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자.

그리고 일의 결과에 대해 가능한 집착을 내려놓고 내맡김으로 지켜보고자 노력하자.

할 수 있는 한 하면 그뿐이다.

꼭 된다, 안된다의 이분법적이고 디지털적인 사고로 자신을 괴롭힐 필요가 없다 - 글의 뒷 부분에서도 언급되겠지만 장자 또한 이 둘 간의 구분을 내려놓으라고 자주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세상도 마음도 아날로그적으로 수많은 단계의 가운데 어디쯤인가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오늘도 한 걸음!"

어떻게?

의도를 줄이고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으로.

당신은 이미 지금 있는 그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받아들이자.


모든 사람은 최선을 다한다

NLP


- 明濟 전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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