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은 선사와 부처님 가르침의 차이

명상 수행의 바른 길잡이에 대하여


600lotus-846059_1280.jpg


질문)


얼마 전 한 가지 의문점이 생겼습니다.

선사들은 배고플 때 먹고 졸리면 자라 했는데, 붓다께서는 좌선을 하다가도 졸리면 걸으면서 경행을 하셨으니 선가와 붓다의 가르침에는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답변)


불교 석가모니 붓다께서 입적하신 후 2,600여 년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여러 갈래로 나뉘어졌습니다.

저의 관점에서 보기에는 같은 불교의 영역 안에 있더라도 모든 종파들이(초기불교와 대승불교, 현교와 밀교의 구분 등) 모두 붓다의 가르침을 수지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붓다의 가르침을 가장 가까이 수지하고 있는 이들은 붓다의 직계 제자로 아라한이 된 분들이었겠지요. 이런 분들을 중심으로 붓다의 가르침을 훼손하지 않고 후대에 전하기 위해 아라한들을 중심으로 1차 결집을 하여 합송 하게 되었고, 후대에 2차 및 3차 결집이 일어난 것입니다. 지금 전해지고 있는 5부 니까야 초기경전들이 결집을 통해 전해지고 기록된 결과물이지요.


붓다 생존 당시 서민들의 언어인 빨리어로 합송 되어 전승되던 것이 빨리어는 문자가 없었기에 후대에 음사(말소리를 다른 언어로 기록하는 것)하여 기록되었습니다. 지금 전해지는 니까야 초기경전의 방대한 내용이 100퍼센트 왜곡이 없다고는 하기 힘들 것입니다. 다만 계정혜를 바탕으로 하여 열반에 도달한 출가승들의 정신적 능력을 추측해 본다면 일반인의 그것과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대단할 것입니다. 삼매라고도 불리는 선정의 수행은 기본적으로 '집중'을 바탕으로 하는데 일반적으로 집중력이라 표현되는 정신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고도의 상태이기 때문이죠.


아무튼 붓다의 행적과 설법을 왜곡 없이 전하고자 하는 제자들의 의지와 능력에 의해 초기경전의 형태로나마 오랜 세월을 초월해서 붓다의 설법을 접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초기경전에 대응하는 초기불교라는 용어는 본래 소승불교라는 용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소승이라는 말은 작은 탈 것이라는 뜻으로 큰 탈 것을 뜻하는 대승이라는 용어에 대비되고 폄하하는 의미로 사용되었죠. 대승불교는 모든 존재들이 다 함께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서 부처가 되어야 - 성불 - 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대승불교의 관점에서는 소승불교란 자기 혼자만 깨달음을 얻어서 괴로움을 타파하면 된다는 이기적인 관점이라고 주장합니다.


또한 소승불교는 원시불교라는 용어로도 불리는데 이는 소승불교는 오래전 과거에 시작된 불교이므로 대승에 비해 발전되지 못한, 그야말로 '원시적인 불교 사상'이며 대승불교는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발달되고 진화된 불교라는 의미를 담고 있지요.


앞에서 대승불교에서 '성불'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고 했는데 대승에서는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여깁니다만 초기불교에서는 부처는 오직 한 분 (적어도 현세에는) 석가모니 붓다뿐이라고 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붓다에게는 스승이 없습니다 - 대각을 이루는데 부분적으로 도움을 준 스승은 있지만 결정적인 깨달음은 스스로 깨우친 것이죠. 그것이 사성제와 팔정도입니다. 붓다가 대각을 이룬 후 나머지 깨달은 분들은 모두 붓다의 가르침을 통해 깨달았으므로 부처(붓다)라고 하지 않고 아라한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는 다소 불교의 역사와 초기불교에 대비되는 대승불교의 차이점을 중심으로 언급했는데요.

이를 바탕으로 정리해보도록 하죠.


첫째,

대승불교(선교, 티벳의 밀교 등)도 분명 '불교' 이기는 하지만 붓다의 본래 가르침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둘째,

대승불교는 스스로 붓다의 가르침에 비해 더욱 발전 및 진화된 가르침이라고 주장합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오시교판이라 하여 붓다의 본래 가르침을 담은 경전인 아함경(니까야의 한역본)을 낮은 수준의 가르침으로 격하하고 후대의 창작물이나 다름없는 대승경전이 더욱 높은 수준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죠.


이제 질문의 핵심인 선사들의 이야기를 봅시다.

'배고프면 먹고 잠이 오면 자라. 그것이 깨달음이다'

이 외에도 선사들에 대한 여러 에피소드들이 존재하지요.

붓다 혹은 아라한으로 깨달음을 이룬 분들과 선교 선사들의 깨달음의 끝으로 보이는 결과가 다릅니다.


물론 선교의 수행이 전혀 의미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화두를 깨치는 것은 분명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하게 해 줍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라고 여기는 것은 자만이며, 엄연히 부처님 본래의 가르침과도 차이가 있습니다.


깨달은 선사들의 마음은 걸림 없는 자유를 추구하는 듯이 보입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12 연기에 종속되어 끝없이 반복하는 윤회 재생으로부터의 괴로움을 완전히 종식시키는 것 - 해탈 - 을 근본 목적으로 합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 연기법의 기본이죠? 인과법입니다.

이것 - 태어나지 않으면 (원인) - 이 없으면 저것 - 그에 뒤따르는 괴로움도 없다 (결과) - 도 없다.

해탈의 기본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상좌불교가 부처님의 가르침과 완전히 상통한다고도 보지는 않습니다 (질문의 내용에서 상좌불교에 관한 내용은 생략했습니다). 붓다고사 스님의 청정도론 등은 초기경전을 이해하는데 도움 되는 면이 분명히 있지만 그들은 아비담마 등으로 체계화하면서 그쪽으로 너무 치우쳤습니다.


현대는 분명 말법의 시대로 불법의 맥이 끊어졌기에 본맥을 잇기에 어려움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결국은 그나마도 남아있는 니까야의 말씀들을 바탕으로 탐진치를 제거해야 하는 분명한 원칙을 바탕으로 스스로 실참하며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지요. 어쩌면 그렇기에 더더욱 분명한 법이 남아있는 계청정과 사띠를 통한 초선 성취 등이 더욱 값진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한 생에 재가 수행자의 조건으로 아라한의 경지를 성취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계청정을 바탕으로 수다원의 경지를 바라볼 수는 있지 않을까요?

수다원은 2-7생 이내에 해탈이 예정되었으며 더 이상 악처로는 환생하지 않는다고 하셨으니까요.


나름 오랜 세월 명상하고 수행하면서 급히 가고자 하는 욕심과 내가 무엇이라는 자만을 내려놓게 되었기에 이 정도만 해도 크나큰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오늘, 지금 이 순간, 할 수 있는 한걸음 옮기면서 마음 내려놓으며 정진하고자 합니다.


- 明濟 전용석


한흐름 마음비움센터 I 한흐름 기명상원

"마음을 비우면 평화 - 어떻게 비울 것인가?" 효과적인 비움의 방편들을 제공합니다

#바른명상 #바른길 #기명상 #마음챙김 #정화 #명상 #수행 #초기불교 #붓다의가르침 #에너지장 #좋은글



keyword
작가의 이전글악마의 실체를 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