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명제 전용석 Jun 08. 2024

[장자10]제물론(7) 성인(聖人)의 경지

짜장이 좋아 짬뽕이 좋아(?)


[장자10] 제물론(7) 성인(聖人)의 경지 / 짜장이 좋아 짬뽕이 좋아(?)


사람과 미꾸라지


23. 자네에게 묻겠네. 사람이 습지에서 자면, 허리가 아프고 반신불수가 되겠지. 미꾸라지도 그럴까? 사람이 나무 위에서 산다면 겁이 나서 떨 수밖에 없을 것일세. 원숭이도 그럴까? 이 셋 중에서 어느 쪽이 거처(居處)에 대해 바르게 안 것일까?


사람은 고기를 먹고, 사슴은 풀을 먹고, 지네는 뱀을 달게 먹고, 올빼미는 쥐를 좋다고 먹지. 이 넷 중에서 어느 쪽이 맛을 바르게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원숭이는 비슷한 원숭이와 짝을 맺고, 순록은 사슴과 사귀고, 미꾸라지는 물고기와 놀지 않는가. 모장(毛嬙)이나 여희(麗姬)는 남자들이 모두 아름답다고 하지만, 물고기는 보자마자 물 속 깊이 들어가 숨고, 새는 보자마자 높이 날아가 버리고, 사슴은 보자마자 급히 도망가 버린다. 이 넷 중에서 어느 쪽이 아름다움을 바르게 안다고 하겠는가?’


내가 보기에, 인의(仁義)의 시작이나 시비(是非)의 길 따위의 것은 [결국 이처럼 주관적 판단 기준에 따라 걷잡을 수 없이] 번잡하고 혼란한데 내 어찌 이런 것이나 따지고 앉아 있겠는가?



이해 득실에 무관


24. 설결이 말했다. ‘스승께서는 이로움과 해로움에 무관하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지인(至人)은 이로움이니 해로움이니 하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습니까?’


왕예가 대답했다. ‘지인(至人)은 신령스럽다. 큰 늪지가 타올라도 뜨거운 줄을 모르고, 황하와 한수가 얼어붙어도 추운 줄을 모르고, 사나운 벼락이 산을 쪼개고 바람이 불어 바다를 뒤흔들어도 놀라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구름을 타고 해와 달에 올라 사해(四海) 밖에 노닐지. 그에게는 삶과 죽음마저 상관이 없는데, 하물며 이로움이니 해로움이니 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성인(聖人)의 경지


25. 구작자(瞿鵲子, 겁 많은 까치 선생)가 장오자(長梧子, 키다리 오동나무 선생)에게 물었다. ‘내가 큰 스승 [공자님]께 들었네만, 성인은 세상일에 종사하지 않고, 이익을 추구하거나 손해를 피하지 않고, 사람들이 희구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고, 도(道)를 일부러 따르려고 하지 않고, 말없이 말을 하고, 말을 하면서 말하지 않고, 티끌 세상 밖에서 노닌다는군. 내 큰 스승께서는 이것을 맹랑한 소리라고 하시지만 나는 이것이 신비스런 도를 따르는 사람이 걸어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하는데,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장오자가 대답했다. ‘이런 일은 황제(黃帝)가 들어도 어리둥절할 문제니, 어찌 공자 같은 사람이 알겠는가? 자네도 이런 일에 대해 너무 성급하게 어림짐작을 하는 것 같군. 달걀을 보고 새벽 을 알리는 닭 울음을 들으려 하고, 화살을 보고 비둘기구이를 생각는 일과 같으이. 내가 자네에게 몇 마디 황당한 소리를 할 터이니, 자네도 그저 황당한 듯 가볍게 들어 주게.


해와 달과 어깨동무,

우주를 끼어 차고,

모두와 하나 된다.

모든 것 혼잡한 대로 그냥 두고,

낮은 자리 높은 자리 무관하다.

사람들 빠릇빠릇,

성인은 어리숙.

만년 세월 온갖 일.

오로지 완벽의 순박함 그대로.

모든 것들이 모두 그러함 그대로.

그리하여 서로가 감싸안는다.


- 장자, 오강남 교수 번역본




어떤 사람을 파악하거나 커플들이 서로를 맞춰보려고 할 때 자주 하는 질문 중에 산이 좋아 바다가 좋아? 라는 질문이 있는 것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아, 짜장이 좋아 짬뽕이 좋아 같은 유치한 것도 있고. 누가 시작했는지 짬짜면을 만들어서 기가 막힌 해법을 내놓았지만. 사실 이런 질문보다 좀 더 사람을 구분하기 좋은 질문이 다음과 같은 것이 아닐까 한다.


장자가 좋아 공자가 좋아?

(노자와 장자는 한통속이라 노장자라 해야 맞을지도 모르지만 여기서는 장자에 대한 글을 이어가고 있으므로 장자라 하자)


개인적으로는 사람을 가려내기에 요즘 유행하는 MBTI 이상으로 참 좋은 질문인 듯한데 웬만해서는 써먹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노자 장자 공자의 사상이 어떤지 어찌 알겠는가. 그런데 누가 더 좋냐는 질문이라니? 하지만 적어도 이 시리즈의 글들을 주의 깊게 읽는 독자라면 이런 뜬금 없는 질문이 있더라도 제대로 대답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필자는 공자에 대해서 잘 모른다. 정확하게는 알고싶지가 않다. 가끔 몇몇 좋아하는 문구들에 대해서 인용하는 경우는 있다. 그 말 자체만으로는 괜찮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특히 장자의 비유에 의해서 어렴풋이 윤곽을 잡게 된 공자의 이미지는 다음과 같았다.


공자는 쪼다가 아닐까?


미안하지만 농담이다. 공자는 상당히 겸손하며 자신의 행동을 돌아볼 줄 알고 가슴이 열려있는 사람인 듯하다. 항상 배우려는 자세로 살아간다. 이런 모습은 장자가 말하는 공자의 모습에도 잘 나타나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자가 말하는 공자는 도를 모르고 도에 대해서 어리숙하다. 그래서 공자는 조문도 석가사의( 朝聞道 夕死可矣) - 아침에 도를 깨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을까. 사실 그보다 더 문제는 공자의 가르침이 지극히 ‘인위적’ 이라는데 있다. 이번 본문 텍스트인 제물론 23편에서 장자는 다음과 같이 일갈을 토한다.


내가 보기에, 인의(仁義)의 시작이나 시비(是非)의 길 따위의 것은 [결국 이처럼 주관적 판단 기준에 따라 걷잡을 수 없이] 번잡하고 혼란한데 내 어찌 이런 것이나 따지고 앉아 있겠는가?


‘인의의 시작이나 시비의 길’ 은 공자의 가르침을 뜻한다. 25편에서는 등장인물의 이름을 구작자(작명도 위트 있게 겁 많은 까치선생이라니!) 이라 지어놓고 그의 큰 스승으로 공자를 세워서 비난하고 있다. 공자의 가르침인 논어에서 공자의 가르침의 대표성을 잘 드러내는 다음의 인용문을 한 번 읽어보도록 하자.


안연이 공자에게 인을 물었다.


공자가 답하였다.

"사사로운 욕심을 버리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이다. 하루만이라도 사욕을 버리고 예로 돌아간다면 천하가 모두 인으로 돌아가게 된다. 인의 실천은 자기에게 달려 있는 것이지, 남에게 달려 있는 것이겠느냐?"


안연이 물었다. "상세하게 알려 주십시오."


공자가 답하였다. "예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고, 움직이지도 말아라."


안연이 말했다. "제가 비록 불민하오나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 논어 12편 중에서


공자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잘 알려진 대로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강조한 것으로 알 수 있다. 그 가르침 하나 하나를 음미하다 보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마음에 새기고 처세에 도움이 될만한 내용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필자가 지금 공자가 잘못 되었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님을 이해했으면 한다. 짜장과 짬뽕 중 뭐가 옳고 뭐가 그르지 않은 듯이 말이다. 다만 노자를 비롯한 장자와 공자는 완전히 그 관점이 다르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야기 하는 김에 다음의 공자식(?) 가르침의 예를 하나만 더 보고 가자.


“예는 사치하기보다는 차라리 검소한 것이 옳고, 

상례는 형식적으로 잘 치르기보다는 차라리 슬퍼하는 것이 옳다.”


전혀 잘못된 이야기가 아니다. 너무나 상식적인 이야기이다. 하지만 장자와는 다르다.


아직 다루지 않은 이야기이지만 장자의 좀 더 뒷쪽의 대종사 28-30편에 나오는 이야기를 들어보겠다. 세 친구가 있었다.그 중 하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공자는 제자를 보내 일을 도우라 명한다. 제자가 장지에 가보니 나머지 두 친구가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도저히 예법에 맞지 않는다 생각한 공자의 제자는 너무 놀라 공자에게 돌아가 이야기를 전한다. 공자는 그들의 뜻을 그제서야 이해하고 자신의 생각이 좁았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세상 밖에서 노니는 이들' 인 그들과 '세상 안에서 노니는 이' 인 자신에 대해서.


누군가는 장자를 보고 '역발상' 의 천재라고 한다. 하지만 역발상이라는 표현조차도 너무나 '세상 안에 갇힌 관점' 아닐까?


도는 세상에 갇히지 않는다.

세상이 도에 갇힐지 몰라도.

그러므로 세상 밖에 노니는 장자에 대해 '세상에 갇힌 언어' 로 뭐라 칭하겠는가!


필자의 이전 글에서는 노자와 장자의 차이를 언급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이번 글에서는 장자와 공자의 차이를 주로 논하는 자리가 된 듯하다. 이렇게 지면을 할애함으로써 독자 여러분들이 ‘장자의 분위기’에 대해 더 큰 인상을 남기는 계기가 되지 않았으려나 하는 바람이다. 책이나 글을 한 두 번 읽는다고 해서 구절구절 모두 기억나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다만 전체적인 인상은 어렴풋이 남을 수 있을 것이다. 오래 전 본 영화의 디테일은 기억나지 않아도 감성적인 영역에 흔적을 남겨 그 사람의 마음에 작은 조각의 일부가 되었듯이.


공자는 장자와 대척점에 있다. '세상 밖' 과 '세상 안' 의 차이라는 거창한 표현은 차치하더라도 좀 더 친근하게 해보면? 산과 바다 혹은 짜장과 짬뽕처럼 말이다. 그래서 필자는 독자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묻고싶다. 장자가 더 좋아 공자가 더 좋아? 물론 대답은 자유다. 취향은 어디까지나 각자의 몫일 테니까. 그래도 MBTI처럼 분석이란 것을 한 번 해보자면 장자가 더 좋은 사람은 명상적, 영적, 우뇌적인 성향이 아닐까? 공자가 더 좋은 사람은 현실적이고 인간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밝은 성향이 아닐런지. 굳이 나누어 보자면 그럴 수도 있지 않나 하는 정도로 생각해주시면 좋겠다. 


그래도 공자보다는 장자가 좋지 않으심? 

(필자는 유치한 질문과 함께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P.S.

여러분은 세상 밖에 노닐고 싶은가, 세상 안에서 탐진치와 씨름하며 고군분투하고 싶은가?

"짬짜면은 없다."



- 明濟 전용석


"마음을 비우면 평화 - 어떻게 비울 것인가?" 효과적인 비움의 방편들을 제공합니다

한흐름 마음비움 센터 / 기명상원

http://cafe.naver.com/growingsoul


#바른명상 #바른길 #기명상 #마음챙김 #정화 #명상 #수행 #초기불교 #붓다의가르침 #에너지장 #좋은글


작가의 이전글 욕심과 무심(無心)의 구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