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노자(老子)가 죽었을 때 진실(秦失)이 문상하러 갔는데, 곡을 세 번만 하고는 나와 버렸습니다.
제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그분의 친구 분이 아니십니까?”
“친구지.”
“그런데 지금처럼 그런 식으로 문상하셔도 되는 것입니까?”
“되지. 처음엔 나도 여기 모인 사람들이 노자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렇지 않으이. 아까 문상하러 들어가 보니, 늙은이들은 마치 자식을 잃은 것처럼 곡을 하고, 젊은이들은 마치 어머니를 잃은 것처럼 흐느끼고 있더군. 이처럼 모인 사람들이 떠들고 우는 것은 노자가 원하는 바가 아닐 걸세. 이렇게 하면 하늘을 피하는 것이요, 사물의 본성을 배반함이요, 받은 바를 잊어버리는 것일세. 옛날 사람들은 이를 일러 ‘하늘을 피하려는데 대한 벌’이라고 했지. 어쩌다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도 때를 만났기 때문이요, 어쩌다가 세상을 떠난 것도 순리이기 때문일세. 편안한 마음으로 때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리를 따른다면, 슬픔이니 기쁨이니 하는 것이 끼어들 틈이 없지. 옛날 사람들은 이를 일러 ‘하느님의 매닮에서 풀려나는 것(縣解)’이라 했네.”
- 오강남 교수의 장자 번역본 중에서 발췌
앞의 다른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글에서 장자는 공자의 가르침으로 대표되는 인과 의, 그리고 예와 같은 인위적인, 순리에서 어긋남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편안한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리를 따른다면,
슬픔이니 기쁨이니 하는 것이 끼어들 틈이 없지.’
장자는 (노자와 더불어) 직설적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저 도의 흐름을 따르라고 한다.
오컴의 면도날 이론이라는 것에 대해 들어보았는지 모르겠다. 어떤 사실이나 현상에 관한 여러 가지 설명들이 있다면 그 중 가장 단순한 것이 진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법칙이다. 한편으로 보면 장자의 행동 법칙이랄까 처세의 원칙이랄까, 이것은 아주 단순하다. 도의 흐름에 따르라는 것이다. 이것이 니 마음대로 해라, 방종해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자기자신이라는 아상과 고집을 내려놓고, 높은 도의 흐름에 열려있어야 한다. 이렇게 해야지 (도의 흐름과 하나가 되어야지) 하는 의지로 한순간에 되지는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도와 하나됨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목적인 것은 사실이다. 장자가 이렇게 단순한 반면 공자는 어떤가? 공자의 가르침은 아주 디테일하다. 이럴 때는 이렇게 해라, 저럴 때는 저렇게 해라, 인간 세상 속에서 아주 디테일한 처세들을 강조한다. 노자와 장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복잡하기 그지 없다. 물론 세상살이는 자유이고 사람들의 생각과 성향은 다양하기에 어떤 지침에 따를지는 자신의 선택에 달려있겠지만.
사람들은 슬픔을 밀어내고 기쁨만을 누리려고 한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서 뭐라고 코멘트를 달기조차 어색할 정도다. 인간만이 그렇겠는가? 모든 존재들은 기쁨과 행복을 추구한다. 지렁이와 같은 작은 미물도 괴로움을 느끼고 이에 회피하는 반응을 보인다. 괴로움에 대해 반응한다는 것은 그에 상반되는 기쁨과 행복 또한 느낀다는 반증일 것이다. 어떤 연구에 따르면 식물 또한 다르지 않다고 한다. 잎과 줄기가 잘리게 되면 그 순간 특정한 분자를 뿜어내고 인근의 식물들이 그것을 인지함으로써 특정 반응을 일으키는데 그것은 동물의 공포 반응과 유사하다고 한다. 움직임이 없는 식물이라고 해서 괴로움과 행복 또한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인간뿐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에게 괴로움과 행복은 기본적인 반응임에도 불구하고 장자는 슬픔도 기쁨도, 그러므로 괴로움도 행복도 내려놓는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장자는 상대성을 넘어선 절대성인 도道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장자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리를 따른다면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서로 상대적인 모든 것을 통합하여 중도인 도를 지향하는 장자이니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대중적으로 명상은 굉장히 넓고 다양한 방법과 의미로 쓰이는데 이 중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명상은 붓다께서 직접 가르침을 주신 팔정도 중의 여덟번째 항목인 바른 선정(삼매) 라고 이전 글에서 설명한 적이 있음을 기억할 것이다. 바른 선정은 초선(선정의 첫번째 단계)에서 시작해서 2선, 3선, 4선으로 높은 단계로 구성되며 나머지 5에서 8단계까지는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 라는 각각에 대한 이름이 존재한다. 일설에서는 8선인 비상비비상처를 완전히 닦고 그보다 상위인 상수멸정에 들면 완전한 해탈(양면 해탈) 이라는 주장이 있고 4선까지만 닦아도 해탈하기에는 충분하다는 설이 있다. 또한 모든 선정의 단계를 다 닦지 않더라도 그 중간의 어느 단계에서든 닦아온 선정을 기반으로 탐진치를 완전히 소멸하면 해탈하게 되는데 이를 혜해탈 혹은 마른 해탈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사실 초선만 해도 일반인의 웬만한 수행으로는 완성하기 힘든 단계이므로 선정 삼매가 이렇게 나뉜다는 정도로만 일단은 이해하고 넘어가도 좋으리라는 생각이다.
그런데 여기서 필자가 짚고 넘어가고자 하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초기 경전에는 초선부터 4선까지에 대한 정형구라는 것이 존재하는데 이는 각각의 선정에 대해 반복해서 설명하는 문구를 뜻한다.
초선
감각적 욕망을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관찰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초선(初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2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관찰이 가라앉았기 때문에, 자기 내면의 것이고, 확신이 있으며, 마음이 단일한 상태이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관찰은 아니고,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제2선(二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3선
희열이 빛바랬기 때문에 평정하게 머물고 싸띠(마음챙김)가 확립되어지고 반야로 보여지면서(sampajāna) 몸으로 행복을 경험한다. 이를 두고 성자들이 '평정하게 싸띠가 확립되어지고 행복하게 머문다.'라고 묘사하는 제3선(三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4선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을 버렸기 때문에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버려서 평정하고 싸띠가 청정한 제4선(四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장자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음미해 보자.
‘편안한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리를 따른다면,
슬픔이니 기쁨이니 하는 것이 끼어들 틈이 없지.’
장자에게는 슬픔도 기쁨도 없다.
깊은 선정 삼매인 4선의 특성에는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린 것이다.
이 어찌 서로 다른 경지라 할 수 있을 것인가?
행복과 기쁨이 있기에 괴로움과 슬픔이 존재한다. 큰 것이 있기에 작은 것이 있고, 높은 것이 있기에 낮은 것이 있다. 모든 형성된(제행諸行) 구체적인 세상의 것들은 서로 상대적이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어느 때인가 생성(형성)되었으며 변화하다가 소멸되기 마련이다. 사물이 그렇고 사건이 그렇고 인간세의 모든 관계들, 인연들이 그러하다. 그렇기에 항상 그대로이지 않으므로 이를 무상(無常)이라고 한다 - 제행무상(諸行無常).
그래서 기쁨과 행복만을 추구하면 슬픔과 괴로움을 떨쳐낼 수 없다. 이들은 서로 빛과 그림자처럼 상대적이면서도 상호의존적인 관계이기 때문이다. 2연기에서 설법되는 것처럼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 기쁨이 있으므로 슬픔이 있고 행복이 있으므로 괴로움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어리석은 우리 중생들은 이 작은 기쁨과 찰라의 행복을 쫓아 커다란 슬픔과 영원한(영원에 가까운) 괴로움을 무한반복하고 있으니 이 어찌 어리석음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얼마 전 필자의 생일을 맞았다. 다른 누구보다 가족들이 진심어린 축하를 해주고 함께 수행하는 분들께서도 축하를 주신다. 특히 아내는 전생에 곁에서 큰 스님 수발하던 스님이 환생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가끔 그렇고 그 반대인 경우도 많다 ^^;;; ). 해마다 반복되는 일이고 나이가 들수록 쏜살같은 세월이 지나 한 살 한 살 늙어감도 아쉬울 나이가 되었지만 갈수록 그보다 더 큰 부담을 느낀다. 이번 생에도 다시 존재로 남았다는 것은 그만큼 공부가 부족했다는 증거일 테니까 말이다. 인도에서 근대의 성자처럼 여겨지는 라마나 마하리쉬도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고 들은 적이 있다. 삶에, 존재에, 감각적 즐거움에 작은 미련도 없었다면 태어남도 없고 태어남으로 인한 괴로움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미 태어난 이상 살아가야 한다. 재가자의 삶을 선택한 이상 나름의 주어진 책임도 다해야 한다.
4선의 정형구처럼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기에는 내 수행력이 부족함을 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이런 세속적인 재미가 없는 글을 여기까지 놓치지 않고 읽어온 독자라면 더구나) 스스로 알든 모르든 이 지난한 여정의 어딘가에서 걷고 있을 터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일들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