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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제 전용석 Jul 14. 2024

[장자18]인간세(1) 마음을 비워야 초능력도 가능..

심재(心齋) / 마음을 비워야 초능력도 가능한 이유


[장자18] 인간세(1) 심재(心齋) / 마음을 비워야 초능력도 가능한 이유


독재에 항거하기


1. 안회(顔回)가 공자에게 여행을 허락해 달라고 했습니다.

“어디로 가려는가?”

“위(衛) 나라로 가려 합니다.”

“무엇 하려 가려는가?”

“제가 들으니 위 나라 임금이 젊은 혈기에 제멋대로 권력을 남용하면서도, 제 허물을 모른답니다. 백성들의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마치 늪지에 쓰러져 시든 풀과 같아, 백성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합니다.

“저는 선생님께서 ‘잘 다스리는 나라를 떠나 어지러운 나라로 가라, 의원 집 문 앞에는 병자가 많은 법’이라 하신 말씀에 따라, 위나라의 병을 고칠 길을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섣불리 덤빌 수 없다


2. “아! 아서라. 네가 거기 가면 결국 처벌이나 받을 것이다. 무릇 도를 뒤섞어서는 안 된다. 뒤섞으면 갈래가 많아져서 헷갈리고, 헷갈리면 근심 걱정이 생긴다. 근심 걱정이 있으면 남을 도울 수가 없다. 옛 지인(至人, 참사람)들은 먼저 스스로 도를 굳힌 뒤에 남을 도왔다. 자기 하나 확실히 갖추지 못하고서 어떻게 포악한 자의 행위에 간여할 수 있겠느니?


3. 더구나, 너는 덕이 어떻게 녹아 없어지고, 못된 앎이 어디서 생기는지 아느니? 덕은 이름을 내려는 데서 녹아 없어지고, 못된 앎은 서로 겨룸에서 생긴다. 이름을 내려는 것은 서로 삐걱거리는 것이고, 못된 앎은 겨루기 위한 무기이다. 둘 다 흉한 무기라 완전한 삶을 위해서는 써서 안 될 것들이다.


4. 그리고 덕이 두텁고 믿음직스럽기 그지없는 사람도 아직 다른 사람의 기질을 알아보지 못할 수 있고, 이름을 위해 겨루지 않는 사람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아보지 못할 수 있다. 그런데도 억지로 인의(仁義)니 법도니 하는 것을 포악한 사람 앞에서 늘어놓는 것은 남의 못됨을 이용하여 자기 잘남을 드러내려 하는 것. 이를 일러 ‘남을 해치는 것’이라 한다. 남을 해치면 자신도 반드시 해침을 받는 법. 남들이 너를 해칠까 걱정이구나.


5. 또 그가 정말 훌륭한 사람을 좋아하고 못난 사람을 싫어한다면, 어찌 굳이 너를 써서 달리 일을 꾸미게 하겠느냐? 네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면, 왕은 자기의 권세를 등에 업고 그럴듯한 말로 너를 압도하려 할 것이다.


눈은 어리둥절

네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네 입은 핑계로 어물어물

네 태도는 쭈빗쭈빗

네 마음은 지당지당.


이것은 불로 불을 끄고, 물로 물을 막으려는 것. 이를 일러 ‘군더더기’라 하지. 일단 그에게 복종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는 것. 네가 너를 믿어 주지도 않는 사람에게 솔직한 말만 하다가는 반드시 그 포악한 사람의 손에 죽을 것이다.



6. 옛날 걸(桀)왕이 관룡봉(關龍逢)을 죽이고, 주(紂)왕은 왕자 비간(比干)을 죽였다. 이렇게 죽은 두 사람은 인격을 잘 닦은 사람들이었지만, 신하의 신분으로 백성의 편을 들어 그들을 동정하다가 임금의 눈에 거슬리게 되었다. 그 사람들의 훌륭한 인격이 오히려 임금에게 그들을 제거시키도록 하는 빌미를 준 셈이 되고 말았다. 이 둘은 모두 이름 내기를 좋아하던 사람들이었다.


옛날에 요 임금이 총지(叢枝)와 서오(胥敖)를 공격하고, 우왕이 유호(有扈)를 쳤는데, 이 나라들은 황무지가 되고, 임금들은 모두 형벌을 받아 죽었다. 끝없이 군대를 동원하고, 실리를 탐내다가 그렇게 된 것이다. 모두 명예와 실리를 좇았다. 너도 이런 이야기를 들었겠지만, 명예와 실리의 추구는 성인도 물리칠 수 없는데 네가 어찌 물리치겠느냐. 그러나 너에게도 [가겠다는] 까닭이 있을 터이니 어디 한번 말해 보아라.”



정치적 준비 태세


7. 안회가 말했습니다. “단정하고 겸허하며, 근면하고 오로지 하나에 전념하면 되겠습니까?”


“안 되지. 그런다고 어찌될 것 같으니? 위나라 임금은 본래 기운이 넘치고 잘난 체를 하며, 한결같지 못한 사람이다. 아무도 그 비위를 맞출 수 없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감정 같은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마음내키는 대로 행동한다. 이른바 ‘나날이 덕을 닦는 일’도 못하는데, 하물며 한꺼번에 큰 덕을 이야기한들 무엇하겠느냐? 고집이 세어 꺽을 수가 없다. 겉으로는 네 말을 듣는 척할지 모르지만, 속으로는 거들떠볼 가치조차 없다고 여길 텐데 무슨 일이 되겠느냐?”


8. “그러면 제가 속으로는 곧은 마음을 지니고 겉으로는 굽실거리고, 또 제 의견을 말하더라도 반드시 옛사람에 빗대어 하겠습니다. 속으로 곧은 사람들은 하늘과 함께한 사람들. 하늘과 함께한 사람들은 천자(天子)나 자기들이나 다 같이 하늘이 낸 자식이라 알고 있는데, 자기 말을 사람들이 인정하든 말든 상관하겠습니까? 사람들은 이런 사람을 천진스런 아이 같다고 합니다. 이것이 제가 말씀드리는 ‘하늘과 함께함’의 뜻입니다.


9. 굽실거리는 사람은 인간들과 함께하는 사람들. 손을 높이 들고, 무릎을 꿇고, 허리를 굽혀 절하는 것이 남의 신하된 자의 예절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하는데, 저라고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남이 하는 대로 하면 사람들이 헐뜯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말씀드리는 ‘인간들과 함께함’의 뜻입니다.


제 의견을 말하되 옛사람에 빗대어 말하는 것은 옛사람들과 함께하는 일. 제가 그 말로 가르치고 꾸짖더라도 그것은 제가 하는 말이 아니라 옛사람이 하는 말이 됩니다. 이렇게 하면 아무리 직언을 하더라도 큰일 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말씀 드리는 ‘옛사람들과 함께함’의 뜻입니다. 이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10.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안 되지. 그렇게 해서 될 것 같으냐? 꾸밈이 너무 많아 좋지 않다. 고리타분하기는 하지만 벌은 면하겠구나. 그러나 그저 그뿐이지, 그것으로 어떻게 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겠느냐? 아직도 너는 너의 그 [변하지 않은 보통의] 마음을 스승처럼 떠받들고 있구나.”



참된 준비 - 마음 굶김(心齋)


11. 안회가 말했습니다.

“저로서는 이제 더 생각해 낼 도리가 없습니다. 부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공자가 말했습니다.

“재(齋)하라. 너에게 말한다만, [마음을 그냥] 가지면서 한다면, 쉽게 될 수 있겠느냐? 쉽게 된다고 하는 자는 저 맑은 하늘이 마땅하다 여기지 않을 것이다.”


“저는 가난하여 여러 달 동안 술도 못 마시고 양념한 음식도 못 먹었습니다. 이 경우 재(齋)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것은 ‘제사 때의 재(祭祀之齋)’지, ‘마음의 재(心齋)’가 아니다.”


12. 안회가 말했습니다. “부디 ‘마음의 재’가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먼저 마음을 하나로 모으라.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어라. 다음엔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氣)로 들어라. 귀는 고작 소리를 들을 뿐이고, 마음은 고작 사물을 인식할 뿐이지만 기(氣)는 텅 비어서 무엇이든 받아들이려 기다린다. 도(道)는 오로지 빈(虛) 곳에만 있는 것. 이렇게 비움이 곧 ‘마음의 재(心齋)’니라.”



심재(心齋)할 때


13. 안회가 말했습니다. “제가 심재(心齋)를 실천하기 전에는 안회라는 제 자신이 실재처럼 존재하지만, 심재를 실천하여 제 자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 이것을 ‘비움(虛)’이라 하는 것입니까?”


“바로 그렇다. 내가 너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네가 위나라에 들어가 그 새장에서 노닐 때, 이름 같은 데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받아 주거든 소리 내고, 받아 주지 않거든 잠잠하라. 문도 없고 나갈 구멍도 없거든 ‘하나’로 집을 삼고, 부득이한 일에만 거하라. 그러면 그런 대로 성공할 것이다.


14. 걷지 않고 자취를 안 남기기는 쉽지만, 걸으면서 자취를 안 남기기는 어려운 일. 사람을 위해 일할 때는 속이기 쉬우나, 하늘을 위해 일할 때는 속이기 어려운 일. 날개로 난다는 말은 들었겠지만, 날개 없이 난다는 말은 못 들었을 것이다. 앎이 있어 안다는 말은 들었겠지만, 앎이 없이 안다는 말은 못 들었을 것이다.


저 빈 것을 보라.

텅 빈 방이 뿜어내는 흰 빛.

행복은 고요함에 머무르는 것.

머무르지 못하면

이를 일러 ‘앉아서 달림(坐馳)’이라 하느니.


15. 귀와 눈을 안으로 통하게 하고, 마음이나 앎을 밖으로 하라. 그러면 비상한 힘도 들어와 머물 것이니, 사람들이 [모여든다는 것이]야 말할 나위도 없지. 이것이 만물의 변화라는 것이니, 우 임금 · 순 임금도 여기에 의거했고, 복희(伏戱) · 궤거(几蘧)도 이를 평생 실천궁행(實踐躬行)했다. 하물며 그만 못한 우리 보통 사람들이랴.”


- 오강남 교수의 장자 번역본 중에서 발췌




이전 장까지 소요유, 제물론을 지나 양생주에 대한 내용이 이어지다가 장자의 4편인 [인간세] 가 시작되었다.

지금까지 장자는 원리와 근본적인 바탕, 도와 근원, 순리의 흐름에 대해 설명해왔다. 이 장의 제목인 인간세는 현실세계로 돌아와서 도를 바탕으로 하여 어떻게 처세하며 지내야 할 것인가 하는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이번 편의 글에서 장자 본문의 내용이 몹시 길다. 최대한 짧게 요약하자면 공자의 제자인 안회가 위나라 임금의 독재로부터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위나라로 가겠다고 스승인 공자에게 허락해 달라는 내용이다. 그런 대화 중에 초반부터 중반까지 세상에서 거론되는 일반적인 처세법 - 그러나 현실적인 이유로 공자가 안회의 출타를 허락하지 않음 - 이 언급되다가 후반부에 이르러 공자는 심재(心齋)를 이야기한다.


“먼저 마음을 하나로 모으라.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어라. 다음엔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氣)로 들어라. 귀는 고작 소리를 들을 뿐이고, 마음은 고작 사물을 인식할 뿐이지만 기(氣)는 텅 비어서 무엇이든 받아들이려 기다린다. 도(道)는 오로지 빈(虛) 곳에만 있는 것. 이렇게 비움이 곧 ‘마음의 재(心齋)’니라.”


공자는 안회에게 무엇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일까? 일반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아리송하게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공자는 명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장자 전체를 통틀어 명상(冥想) 이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는다. 어디 장자뿐이겠는가, 명상이라 불리는 동네의 원조격인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그 어떤 경전에도 명상이라는 단어는 없다.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불교사전을 보니 명상이라는 단어가 아예 나오지 않고, 끝으로 세계적으로 가장 방대하고 자세하다고 정평이 나 있는 모치스키(望月) 불교대사전(佛敎大辭典) 역시 ‘명상(冥想·瞑想)’이라는 단어는 없었습니다. 즉 명상은 한자로 된 어휘 자체가 불교에는 원래 없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입니다.

- 혜담 스님, 고따마 붓다의 정관명상 중에서


대체 언제부터 명상이라는 단어가 ‘그것’(?)을 뜻하는 대중적인 용어가 되었을까? 열다섯 이른 나이부터 일찌감치 그것에 관심을 두고 시작해서 오십 중반에 이른 지금이지만 필자가 돌아보기에도 애매하기 그지 없다. 분명 처음 그것을 접했을 당시에는 명상이라는 용어를 쓰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작은 단전호흡이라는 것의 붐에서 시작되었고 그런 쪽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나의 부모님의 책장에는 그나마 요가와 관련된 책 한 권은 꽂혀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무튼 그것을 뭐라 통칭하든 간에 그것은 아마도 인류가 살아온 초기에서부터 어떤 형태로든 존재했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원시인들은 그저 무식하고 짐승같다는 식으로 주입된 지식에 의해) 원시인들이 우가우가 하며 맘모스를 사냥해서 구워먹던 까마득한 그 시절에도 누군가는 밤하늘 별을 보며 경외감을 느끼다 문득 마음이 텅 비어버리는 생경한 경험 속에서 깊은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2천년 이상의 까마득한 세월을 살아남은 이 텍스트들을 통해서 장자는 공자라는 캐릭터를 내세워 명상과 같은 맥락의 심재(心齋)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먼저 마음을 하나로 모으라.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어라. 다음엔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氣)로 들어라. 귀는 고작 소리를 들을 뿐이고, 마음은 고작 사물을 인식할 뿐이지만 기(氣)는 텅 비어서 무엇이든 받아들이려 기다린다. 도(道)는 오로지 빈(虛) 곳에만 있는 것. 이렇게 비움이 곧 ‘마음의 재(心齋)’니라.”


어째서 심재는 명상과 같은 맥락인가?

첫번째 문장에서 ‘마음을 하나로 모으라’ 고 하였다. 거의 대부분의 명상은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데서 출발한다. 보통은 호흡을 느끼게 하는 신체의 어느 한 부위에 집중하도록 하는 편이지만 처음 시작에 있어서는 들리는 소리, 보이는 대상 등 어떤 감각적 대상에 대해서도 큰 상관은 없다. 명상의 원조인 불교 명상에 있어서도 여덟 단계의 선정(삼매) 중에서 초선부터 4선까지 네 단계는 일심(一心) 삼매라 불리기도 한다. 마음을 하나로 모은다는 뜻이다.


심재의 다음 단계는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어라’ 이다.

단언컨대 이것은 그저 관념적이거나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이전 편의 어느 글에선가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깊은 명상 상태에 들게 되면 감각 기관들의 의식이 스위치를 내리게 된다. 즉 눈을 뜨고 있어도 눈 앞의 사물이 보이지 않는다. 귀는 열려 있지만 소리의 정보가 들어오지 않는다. 촉각이나 그외 감각의 정보들 또한 마찬가지다. 이럴 때 그 사람은 깊은 의식으로 침잠하게 되며 역설적으로 그는 자신 외 다른 세계와 초월적으로 연결된다.


심재의 표현처럼 ‘마음으로 들어라’ 가 가능해지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자기자신 외의 외부 세계와 연결되면 어느 곳에서 발생하는 소리든 원한다면 다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를 천이통(天耳通) 이라 하고 마찬가지로 시각이 그렇게 되면 이를 천안통(天眼通) 이라 한다. 흔히 초능력이라 불리는 능력인 셈인데 그 바탕에는 이런 원리가 깔려있다.


참고로 불교에서 말하는 여섯 신통(神通)에는 위에서 언급한 천이통과 천안통 외에 다음의 네 가지가 더 존재하는데 - 신족통(神足通), 타심통(他心通), 숙명통(宿命通), 누진통(漏盡通) -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번뇌를 완전히 소멸하고 다시 태어남이 없는 해탈의 경지를 성취한 누진통이다. 초기불교에서 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이라 불리는 4가지 성자 계급 중 아라한에 속하는 최고의 성자이며 대승불교에서 ‘성불하세요’ 라고 표현하는 부처를 이룬 마지막 단계인 것이다.


다음으로 공자는 ‘텅 비어서 무엇이든 받아들이려 기다리는 기(氣)’ 로 들으라고 하고 오로지 빈 곳에만 있는 도(道) 라고 표현한다. 보통 공자를 바탕으로 하여 유교 라고 통칭되는 체계하에서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과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 이라는 두 주장이 반목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여기서 이(理) 라는 것은 결국 근본 이치를 뜻하며 만물의 근원인 도(道)와 같은 의미로 보아도 큰 무리가 없는 것으로 안다. 그리고 기(氣)는 세상의 물질적 만물의 변화의 뒷편에서 작용하는 실재하는 에너지와 같은 것으로 결국에는 이것(기氣) 또한 근원(도道)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를 두고 본체(몸통)인 이(理)와 수족(팔다리, 손발)과 같은 기(氣)가 하나이네(이기일원론), 둘이네(이기이원론) 하면서 다투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고 본다. 즉 열손가락을 두고 엄지와 검지가 서로 하나이니 둘이니 하고 다투는 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아무튼 하나이든 둘이든 간에 언어도단인 그것은 텅 빈 것이다. 보통의 마음은 온갖 생각과 감정, 과거와 미래에 대한 회한과 걱정으로 혼란하기 그지 없다. 그런 보통의 마음을 넘어서 하나로 모으고, 마음으로 듣고, 바른 기의 흐름과 하나되어 (기로 들어서) 텅 빈 근원, 바른 도(道)로 들어가는 것이다. 스승인 공자의 심재에 대한 설명을 듣고 안회가 묻는다.


“제가 심재(心齋)를 실천하기 전에는 안회라는 제 자신이 실재처럼 존재하지만, 심재를 실천하여 제 자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 이것을 ‘비움(虛)’이라 하는 것입니까?”


저 빈 것을 보라.

텅 빈 방이 뿜어내는 흰 빛.

행복은 고요함에 머무르는 것.

머무르지 못하면

이를 일러 ‘앉아서 달림(坐馳)’이라 하느니.


비어 있으되 빈 것이 아니다.

이 텅 빈 공간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무한을 내포하고 있으며 가득 찬 에너지가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한 엄청난 빛을 뿜어내고 있다. 여기에 머물면 그것이 바로 참된 고요이다. 그러지 못한다면 제 아무리 돌부처처럼 앉아있더라도 마음과 정신은 치성(熾盛)할 뿐이다. 이를 일러 ‘앉아서 달림(좌치坐馳)’이라 하느니 - 겉모습은 앉아서 평화로운 척해도 마음은 번잡하기 그지 없는 것이다.


15. 귀와 눈을 안으로 통하게 하고, 마음이나 앎을 밖으로 하라. 그러면 비상한 힘도 들어와 머물 것이니, 사람들이 [모여든다는 것이]야 말할 나위도 없지. 이것이 만물의 변화라는 것이니...


장자의 공자를 통한 이 장에서의 마지막 조언은 인간세 라는 제목에 적절하게 세상에 대처하는 명상가의 마음에 대해 조언하며 끝을 맺고 있다.


귀와 눈을 안으로 통하게 하고

- 명상을 위해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그렇게 한 경지에 오른 연후에야 비로소


마음이나 앎을 밖으로 하라

- 준비된 마음이면 세상을 향해도 된다.


그러면 비상한 힘도 들어와 머물 것이니, 사람들이 모여든다는 것이야 말할 나위도 없지.

- 마음이 준비된 자에게 뜻하지 않은 놀라운 결과도 있을 수 있으니......


마음에서 진정 깊은 수행을 닦고 비워서 공(空)과 허(虛)를 깨달은 후라면 굳이 세상 현실의 변화를 위해 나설 이유가 있을까?

세상이 마음 밖에 있는 듯해도 사실은 세상이 마음 안에 있는 것일진대.


당장은 알 수 없더라도 (마음이 세상을 향하더라도)

우선은 일정 시간을 내어 마음을 안으로 모아 하나되도록 노력해보자.

한순간 모든 것을 바꿀 수도 바꾸려 애쓸 필요도 없다.

당장은 할 수 있는 만큼 진인사 하고 결과는 집착 없이 받아들이고 수용하며 대천명 하면 그뿐.


오늘도 한 걸음!


- 明濟 전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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