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38] 대종사(11) 사생존망이 일체
[장자38] 대종사(11) 사생존망이 일체 / 호불호를 내려놓는 한 걸음부터
22. 자사(子祀, 제사 선생), 자여(子輿, 가마 선생), 자려(子犁, 쟁기선생), 자래(子來, 오심 선생), 네 사람이 모여 이야기를 했습니다.
“누가 없음으로 머리를 삼고, 삶으로 척추를 삼고, 죽음으로 꽁무니를 삼을 수 있을까? 누가 죽음과 삶, 있음과 없음이 모두 한 몸(一體)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까? 나는 이런 사람과 벗하고 싶네.”
네 사람은 서로 쳐다보고 웃었습니다. 마음에 막히는 것이 없어 결국 모두 벗이 되었습니다.
23. 자여(子輿)에게 갑자기 병이 나서, 자사(子祀)가 문병을 했습니다. 자여가 말했습니다. “위대하구나. 저 조물자. 나를 이처럼 오그라들게 하다니.”
그의 등은 곱추처럼 굽고, 등뼈는 불쑥 튀어나오고, 오장이 위로 올라가고, 턱은 배꼽에 묻히고, 어깨가 정수리보다 높고, 목덜미 뼈는 하늘을 향하고, 음양의 기(氣)가 어지러워졌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아무 일 없는 듯 평온했습니다. 비틀거리며 우물에 가서 자기 모습을 비추어 보았습니다.
“아, 정말 조물자가 나를 이렇게 오그라뜨렸구나.”
24. 자사가 물어 보았습니다. “자네는 그게 싫은가?”
“천만에. 싫어할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내 왼팔이 점점 변하여 닭이 된다면, 나는 그것으로 새벽을 깨우겠네. 내 오른팔이 차츰 변해 활이 되면, 나는 그것으로 새를 잡아 구워 먹겠네. 내 뒤가 점점 변하여 수레바퀴가 되고 내 정신이 변하여 말(馬)이 되면, 나는 그것을 탈 터이니 다시 무슨 탈것이 필요하겠나. 무릇 우리가 삶을 얻은 것도 때를 만났기 때문이요, 우리가 삶을 잃는 것도 순리일세. 편안한 마음으로 때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리에 따르면 슬픔이니 기쁨이니 하는 것이 끼어들 틈이 없지. 이것이 옛날부터 말하는 '매달림에서 풀려나는 것(縣解)’이라 하는 걸세. 그런데도 이렇게 스스로 놓여나지 못하는 것은 사물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지. 세상의 모든 사물은 하늘의 오램을 이기지 못하는 법. 내 어찌 이를 싫어하겠는가?”
- 오강남 교수의 장자 번역본에서 발췌
이 대목에서 등장하는 네 사람 - 자사, 자여, 자려, 자래는 모든 상대성을 뛰어넘어 절대성을 향하는, 즉 도(道)를 향하는 정신을 추구하기에 서로 친구가 되었다. 그야말로 함께 도를 닦는 친구인 도반(道伴)인 셈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평생 시봉한 아난다 존자는 부처님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좋은 벗(도반) 과 사귀는 것은 청정범행의 절반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말로 아난다를 훈계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말하지 말라. 좋은 벗과의 사귐은 청정범행의 전부다”
유명한 소설 제목에 있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는 말을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있다. 이것은 숫타니파타라는 초기경전에 등장하는 말인데 앞뒤를 다 잘라먹고 이 한 구절만으로는 본 뜻을 오해하기 딱 좋게 생겼다. 즉 무소의 뿔 앞 뒤 구절에 있어서 바로 앞에서 인용한 “좋은 벗과의 사귐은 청정범행의 전부” 라는 부처님 말씀에서 다음의 이야기가 빠져있기 때문이다.
좋은 벗과의 사귐은 청정범행의 전부다.
그러나 만약 좋은 벗이 없다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도를 향해 바르게 나아가기 위해서는 좋은 벗을 찾는 것이 급선무다.
만약 찾아도 찾아도 없을 경우에야 혼자서 갈 수 밖에 없는 궁여지책인 것이다.
이를 모르고 혼자서만 가겠다고 고집을 피운다면 한참을 돌아갈 수 밖에 없게 될 것이다.
‘무릇 우리가 삶을 얻은 것도 때를 만났기 때문이요, 우리가 삶을 잃는 것도 순리일세. 편안한 마음으로 때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리에 따르면 슬픔이니 기쁨이니 하는 것이 끼어들 틈이 없지. 이것이 옛날부터 말하는 '매달림에서 풀려나는 것(縣解)’이라 하는 걸세. 그런데도 이렇게 스스로 놓여나지 못하는 것은 사물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지. ‘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수용하며”
필자가 좋아하며 자주 인용하는 문구다.
물론 나 또한 항상 이렇게 되지는 않지만 될 수 있으면 매사 최대한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려 한다.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은 종종 주역으로 점괘를 보았다고 한다.
웬만해서는 희망조차 가지기 힘든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그 유명한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 라는 명언을 남기고 모든 전투를 승리로 이끈 그의 정신에서 나는 ‘진인사 대천명’ 의 문구를 떠올린다. 나라의 운명과 수많은 아군의 생명을 어깨에 짊어지고 승리를 위한 현상황에 최대한의 정보를 보태어 ‘있는 그대로’ 의 흐름을 보기 위해 그는 주역을 보았을 것이다 - 주역은 지형지물과 적군의 움직임 등 모든 정보들 뒤에 깔려있는, 물리적으로는 알기 힘든 흐름의 정보를 알아보게 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렇게 주어진 전투에 최선을 다할 수 밖에 없다. 결과는 대천명으로 - 집착 없이 내맡긴다.
이것을 장자는 매달림, 즉 집착에서 풀려나는 것이라 표현했다.
이 연재글의 초기에 던졌던 메시지를 다시 반복해서 언급해본다 - 의도 없음이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많은 이들이 신통과 같은 초능력을, 전지(全知)한 앎을 의도한다. 작게는 큰 병이 낫기를 의도할 수도 생활고에서 헤어나기를 원할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 장자 이야기의 네 친구들 중의 한 사람인 자여는 진짜 이상한 병에 걸렸다.
‘등은 곱추처럼 굽고, 등뼈는 불쑥 튀어나오고, 오장이 위로 올라가고, 턱은 배꼽에 묻히고, 어깨가 정수리보다 높고, 목덜미 뼈는 하늘을 향하고, 음양의 기(氣)가 어지러워졌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아무 일 없는 듯 평온했다지 않는가? 어째서? 병이 낫기를 의도하지 않고 완전히 내려놓았기 때문이다. 집착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 정말 조물자가 나를 이렇게 오그라뜨렸구나.”
자여의 이 말은 예수의 드라마틱한 삶의 절정에서의 한 마디를 떠올리게 한다.
“이제 다 이루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미리 알았고 피할 수도 있었지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십자가를 짊어진 모든 괴로움을 받아들였다. 교인이 아니라도 기독교의 유명한 기도문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을 들어본 일이 있을 것이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작은 에고인 자기자신, 참나라 할만한 실체가 없는, 오온이 나라는, 그저 착각일 수 있는 자신의 의도를 내려놓게 만드는 강력한 문구가 아닐 수 없다.
부처가 되기 전의 전생에 내생에 싯달타 왕자로 태어나기로 예정된 그는 숲속에서 만난 왕에게 자신의 팔다리를 내어주었다. 그런 육신의 최악의 괴로움을 겪으면서도 피하려는 의도를 세우지 않고 내생에서는 어리석은 왕에게 깨달음을 전하겠다는 서원을 세운다. 그리고 다음생에 붓다가 된 그는 전생에 왕이었던 꼰단냐에게 초전법륜에서 깨달음을 전하게 되었다.
직업을 가지고 사회생활을 하며 재가자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의도를 내려놓거나 큰 서원을 세우는 일은 그야말로 꿈만 같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래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천지차이이다. 우선은 궁극적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 그렇다는 것을 알고 당장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행하면 된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 자신에게는 무엇이 좋고 무엇이 싫을까?
각자가 다 다를 수도 큰 틀에서는 비슷비슷할 수도 있겠지만 우선은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마음을 잘 알아차리고 그에 대한 호불호를 줄여나가는 정도면 되리라고 본다.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라 하였듯이
그렇게 오늘의 한 걸음을 걸어나가면 된다.
- 明濟 명제 전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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