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女偊)가 가르치는 득도(得道)의 단계
[장자37] 대종사(10) 여우가 가르치는 득도의 단계 / 우주와 하나가 되는 길
여우(女偊)가 가르치는 득도(得道)의 단계
18. 남백자규(南伯子葵)가 여우(女偊, 등 굽은 여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나이가 많은데, 아직도 얼굴은 갓난아기와 같으니, 무슨 까닭입니까?”
“도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도를 배울 수 있겠습니까?”
“안 됩니다. 어찌 될 성이나 싶은 일입니까? 당신은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못 되기 때문입니다. 복량의(卜梁倚)라는 사람은 성인의 재질은 있으나 성인의 도가 없었고, 나는 성인의 도는 있으나 성인의 재질이 없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을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그가 과연 성인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19. 아무튼, 성인의 도란 성인의 재질이 있는 사람에게 가르치는 것이 역시 더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나는 신중하게 그를 지켜보았습니다. 사흘이 지나자 그는 세상을 잊었습니다. 세상을 잊었기에 다시 잘 지켜보았더니 이레가 지나자 사물을 잊습디다. 사물을 잊었기에 다시 잘 지켜보았더니 아흐레가 지나자 삶을 잊게 되었습니다. 삶을 잊게 되자 그는 ‘아침 햇살 같은 밝음(朝徹)’을 얻었습니다. 아침 햇살 같은 밝음을 얻자 그는 ‘하나’를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를 보게 되자 과거와 현재가 없어졌습니다. 과거와 현재가 없어지자 죽음도 없고 삶도 없는 경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20. 삶을 죽이는 사람은 죽지 않습니다. 삶을 살리는 사람은 살지 못합니다. 사물을 대할 때, 보내지 않는 것이 없고, 맞아들이지 않는 것이 없으며, 허물어뜨리지 않는 것이 없고, 이루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이를 일러 어지러움 속의 평온이라 합니다. 어지러움 속에 평온이란 어지러움이 지난 다음에는 온전한 이룸이 있다는 뜻입니다.”
21. 남백자규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디서 이런 것을 들었습니까?”
여우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부묵(副墨, 버금 먹)의 아들에게 들었고, 부묵의 아들은 낙송(洛誦, 읊는 이)의 손자에게 들었고, 낙송의 손자는 첨명(瞻明, 잘 보는 이)에게 들었고, 첨명은 섭허(聶許, 잘 듣는 이)에게 들었고, 섭허는 수역(需役, 일 잘하는 이)에게 들었고, 수역은 오구(於謳, 노래 잘하는 이)에게 들었고, 오구는 현명(玄冥, 그윽한 이)에게 들었고, 현명은 삼료(參廖, 빈 이)에게 들었고, 삼료는 의시(疑始, 처음 같은 이)에게 들었습니다.
- 오강남 교수의 장자 번역본 중에서 발췌
성인의 재질이 있는 사람에게 도를 가르쳤더니 세상을 잊고, 사물을 잊고, 삶을 잊고 나서 ‘밝음’을 얻고 ‘하나’를 볼 수 있게 되었고, 과거와 현재가 없어지고, 죽음도 없고 삶도 없는 경지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상당히 의미 깊은 구절이다. 이것은 불교에서 삼매 - 선정, 명상 - 를 닦는 과정과 상당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불교 명상에서 삼매를 닦으면서 일어나는 바른 길의 증거가 되는 다양한 현상들이 존재한다. 삼매의 첫걸음은 마음을 수행주제에 하나로 모으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xx삼매경 이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대표적으로 독서삼매경이라는 말이 자주 쓰인다. 독서에 심하게 집중하느라 다른 일들, 적어도 그 순간에는 세상사를 잊게 된다. 언어로 구성된 책의 내용에 집중하는 것에도 삼매라는 표현을 쓸 정도인데 본격적인 명상을 제대로 하게 되면 어떻겠는가? 인간의 집중력에는 흔히 생각하는 것 이상의 잠재력이 있다. 고도화된 명상으로 집중하면 집중의 대상만이 남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니 세상과 사물 따위는 잊혀질 수 밖에 없다. 또한 세상, 사물, 삶을 잊었다는 구절을 반대로 해석하면 우리는 세상, 사물, 삶에 대해 너무 깊이 연결되어 있고 그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에 도(道)의 근처에 가지 못하고 있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마음을 하나로 모으다 보면 여러 특이한 현상들이 나타날 수 있는데 그중의 으뜸이 세상 만물에서 ‘밝음’ 혹은 ‘빛’을 보는 것이다. 이것은 근원의 큰 속성 중 하나인 빛과 밝음으로 연결된 깊은 무의식과 의식이 소통됨으로써 나타나게 되는 결과다.
‘하나’를 보고서 과거와 현재가 없어졌다는 것은 그만큼 깊은 명상의 상태애 들어있음을 의미한다. 즉 하나는 세상에 대한 분리의 인식이 없음을 뜻하며 이는 곧 도(道)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러니 과거와 현재의 구분이 사라질 수 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죽음도 없고 삶도 없는 경지’ 란 붓다께서 ‘불사의 경지’ 라고 자주 표현하신 바로 그것이다. 즉 삶과 죽음의 무한한 반복을 끊고 모든 괴로움이 없는 상태 - 사성제의 멸성제 - 인 해탈의 상태이다.
‘삶을 죽이는 사람은 죽지 않습니다. 삶을 살리는 사람은 살지 못합니다. 사물을 대할 때, 보내지 않는 것이 없고, 맞아들이지 않는 것이 없으며, 허물어뜨리지 않는 것이 없고, 이루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이를 일러 어지러움 속의 평온이라 합니다. 어지러움 속에 평온이란 어지러움이 지난 다음에는 온전한 이룸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야말로 역설 그 자체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도를 따르는 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한다. 겉보기에는 노력하는 듯하지만 마음으로는 힘써 애쓰지 않는다. 아니, 도를 따른다는 표현조차 어불성설일 수 있겠다.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도와 하나이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관점에서 이와 부분적으로 유사한 상태가 미하이칙센트 교수가 표현한 몰입(flow)의 상태를 떠올릴 수 있다. 깊이 몰입될수록 함(행위)은 있지만 의도적으로 하는 이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베스트셀러 작가인 스티븐 킹은 한 때 약물에 취해서 글을 쓴 적이 있다고 한다. 한마디로 ‘제정신이 아닌 상태’ 에서 나오는 대로 술술 글을 써내려갔고 정신이 맑아진 후에는 자신이 쓴 글을 기억하지도 못했다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그의 그 글은 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마약 등 약물에 취했을 때 일종의 트랜스 상태에 들어갈 수 있고 이는 명상에서 얻어지는 효과와 유사하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다만 약물의 부작용으로 자력으로 그런 상태에 들어갈 수 없고 신체적인 건강 상태가 나빠지며 중독성이 있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오래전 고등학교 때 윤리시간에 노자와 장자를 훑고 지나갔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 도교의 핵심사상이라며 무위(無爲)와 자연(自然), 이 두 키워드를 머릿속에 막 집어넣었었다. 제대로 된 뜻은 알고 했는지, 선생님은 알고 계셨는지 모르겠다.
바로 앞단락에서 설명한 내용들이 직접적으로는 무위와 자연에 속한다. 단 도(道)와 하나가 된 상태, 깊은 무의식과 합일된 상태, ‘작은 나’ 인 에고가 상당히 숨 죽여진 상태에서 큰 흐름을 타고 하게 되는 행위들 - 무위無爲, 스스로 알아서 일어나는 일들 - 자연自然 인 것이다. 이 때 일어나는 일들은 ‘나 자신’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여러 사람과 주위 환경이 모두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도(道)는 만물에 편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논리로 우주를 재단하려 해서는 안된다.
논리는 눈에 보이는 차원에서는 옳지만 더 넓은 우주로 나아가면 옳지 않은 것이 된다.
그래서 장자는 ‘삶을 죽이는 사람은 주지 않는다......’ 는 역설을 말하고 있다.
무엇도 뚫지 못하는 방패와 모든 것을 뚫을 수 있는 창이라는 모순은 논리로 설명할 수 없지만 가슴으로 끌어안으면, 깊은 무의식과 하나가 되어 도(道)와 가까워지면 이해할 수 있는 <하나>가 된다.
바로 이것이 자비의 마음이 궁극의 경지인 열반과 해탈로 나아갈 수 있는 방편이 되는 이유이다.
자비희사의 마음으로 온우주를 가득 채우면 해탈이다.
- 붓다
- 明濟 명제 전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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