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로드시커 외전] 가영의 전생의 선택

"그럴 리 없어", 그녀가 부정했던 가장 최근 전생의 이야기


봄기운이 완연한 어느 날, 윤미는 가영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지난 가을 이후, 자신의 타로 점괘로 인해 그녀가 겪은 괴로움들, 그건 가영의 전생과 그런 과거 일들에 대한 과다한 집착과 믿음, 그리고 자기 자신의 선택에 대한 용서하지 못한 죄책감 같은 것들이 함께 어우러져 일어난 일들이었다고 했다. 그런 선택으로 인해 현빈과 헤어질 뻔했다는 일도, 또 한 달 후에 그와 결혼할 예정이라고 웃으며 청첩장을 내밀었다. 이 모든 해결의 바탕에는 아버지 우향과의 해묵은 화해와 지혜로운 조언이 바탕에 있었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가영은 지난 가을, 헤어진 약혼자 영훈을 만나 강한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며 쓰러졌다고 했다. 그 당시에는 그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해 스스로를 괴롭혔다. 하지만 과거는 그저 과거일 뿐. 마음의 깊은 차원에서 용서하지 못할 일은 없다는 것, 그리고 자신과의 화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자 모든 마음의 괴로움들이 녹아내렸다.


윤미는 가영의 일들을 들으며 타로 카드를 비롯한 점사의 흐름에 대한 자신의 믿음에 대해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었다. 우리 삶의 선택에 있어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보이지 않는 흐름을 읽어내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하지만 미래를 바꾸는 진정한 힘은 우리 마음 깊은 곳에 내재된 것은 아닐까……


윤미는 가영의 이야기를 다시 떠올렸다. 19세기 영국, 가영이 전해준 전생에 대한 그들의 이야기는 무척 흥미로웠다. 아래에 그들의 이야기를 가영의 입장에서 이야기한 내용으로 전해본다. 그들의 이름은 달랐지만 글에서 ‘나’는 가영, 현빈의 전생은 H, 영훈은 Y로 표기함을 전한다.





런던의 겨울은 안개가 사람의 목을 부드럽게 감싸는 방식으로 찾아왔어요. 석탄 냄새와 젖은 말발굽 소리가 뒤엉킨 채, 가스등이 번지는 저녁이면 도시는 마치 노랗게 빛나는 유리 속에 잠긴 것 같았죠. 나는 블룸즈버리의 작은 하숙집에 살면서 어느 중견 작가를 도우며 원고 정리를 했고, 저녁에는 미세스 휘트모어가 여는 살롱에 들렀어요. 새 책과 음악, 혁신적인 사상가를 초대하는 모임이었는데, 그곳에서 H를 처음 만났습니다.


H는 말수는 적었지만 단정했고, 무엇보다도 꿈과 계획이 있었죠. 공업 학교를 나와 교량 설계를 배우고, 기계와 강철을 사랑하는 사람. 언젠가 템스강을 가로지르는 더 아름답고 안전한 교량을 만들고 싶다고 말할 때면 그의 눈동자는 가스등보다 밝았어요. 문학에도 소질이 있던 그는 종종 나의 일을 돕기도 했어요. 우리는 함께 앉아서 쓸모없다고 생각되는 문장들을 함께 지웠죠. 그의 신중한 침묵은 언제나 나를 진정시켰습니다. 우리가 결혼을 약속했을 때, 나는 작은 정원을 볼 수 있는 집과 서가에 꽂힌 책의 냄새를 떠올렸죠.


Y는 한 계절 뒤에 나타났습니다. 가을과 겨울이 스치는 회색의 사이에 나타난 그는 동방의 무역으로 자본을 쥔 젊은 사업가라고 했죠. 미세스 휘트모어의 집에서 열린 작은 연주회, 글라스의 표면에 샴페인 거품이 맴돌던 밤이었습니다. 그는 처음 보는 나에게 “당신은 읽는 사람인가요, 쓰는 사람인가요?” 하고 물었고, 나는 대답 대신 “둘 다요.” 하고 웃었습니다. 그가 웃을 때마다 벽난로의 온기가 더 가까이 오는 것 같았고, 그의 말은 어딘가 즉흥적인 음악처럼 들렸습니다.


H와 Y의 차이를 쉽게 설명할 수 있었어요. H는 항상 단단하고 한결같았고, Y는 리드미컬한 진동 같았죠. 이전까지 나는 늘 견고한 것을 선택해 왔습니다.


어느 저녁, H는 스리피시스 골목의 실험 공장에서 밤샘을 해야 한다는 연락을 보내왔어요. 실험을 미루면 계약이 미뤄지고, 그러면 우리의 결혼도 기약 없이 늦춰질지 모른다고요. 편지의 문장 하나하나는 논리적이었고 잘못된 부분은 없었지만, 그날 나는 이유 없이 텅 빈 테이블 위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어요. 나의 생활은 H와 어울리게 견고했지만, 공허함이 늘 함께였던 것 같아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못한, 새로운 자극을 그리는 마음이었을지도요.


그 주의 토요일, Y가 초대장을 보냈죠. 소호의 한 화가의 비밀스러운 전시회라고 했어요. 그곳은 가늘고 긴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다락이었고, 방 안에는 붉은 코트의 사냥꾼과 비에 젖은 흙냄새를 닮은 그림들이 걸려 있었어요. Y는 그림들 사이를 걸으며 내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에게 진정한 기쁨은 무엇입니까?”


나는 잠시 H의 손을 떠올렸어요. 차가운 강철을 만지는 사람의, 거칠지만 신뢰할 수 있는 손. 그러나 내 입에서 나온 대답은 다른 것이었죠.


“마음의 욕구를 따르는 것이요.”


Y는 고개를 끄덕였고, 창가로 나를 이끌었습니다. 템스강의 물결이 멀리서 반짝였고, 가스등의 빛이 유리에 부서져 들어왔어요. 그는 내 손끝을 가볍게 들어 올렸습니다. 손과 손이 맞닿은 열기. 그는 서두르지 않았지만, 기다리지도 않았어요. 그런 그의 공백은 완전한 나의 선택만을 기다리고 있었죠.


나는 그 침묵을, 그 열기를, 그런 마음의 욕구를 따랐습니다. 그때의 나는, 분명히 그렇게 스스로 원했다고, 인정합니다.


“나와 함께 떠날까요? 오늘 밤이 아니어도 좋아요. 하지만 오늘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그의 말은 제안이 아니라 내 마음의 확인이었어요. 나는 내 심장 소리를 세었습니다. 하나, 둘, 셋. 어떤 삶에선 정원을 가진 집과 안전한 다리를 건너는 행운이 내 몫이겠지만, 이 삶의 내가 느끼는 것은 흔들림이었습니다. 흔들림이 무서웠지만, 동시에 나를 살아 있게 했죠.


“H는 좋은 사람입니다.”

내가 말했습니다.


“좋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사랑하는 것은 반드시 같은가요?”

Y가 물었죠.


그 질문이 내 안에서 오래 울렸어요. 시계탑의 종소리처럼. 그리고 나는 깨달았습니다. 이 선택이 나를 구원하지는 않을 거라는 것을. 다만 내 마음의 무게를 잠시 다른 방식으로 옮겨놓을 뿐이라는 것을. 그럼에도 나는, 내 발을 앞으로 내디뎠습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나 스스로 걸어 들어갔어요.


우리는 소호의 붉은 벽돌 사이를 지나 말이 기다리는 마차 쪽으로 향했습니다. 가스등이 길게 드리운 그림자 위로 내 치맛자락이 스쳤고, 누군가의 바이올린이 골목 저편에서 어렴풋이 울렸습니다. 마차의 문을 열자 따뜻한 공기와 포도주의 향이 흘러나왔죠. Y가 먼저 올라탄 뒤, 손을 내밀었어요. 그 손을 나는 단단히 붙잡았습니다.


마차가 움직이기 직전, 나는 창문 너머의 밤을 보았습니다. 템스강의 검은 물, 강 위로 늘어진 다리의 아치, 저 멀리 작업등을 켜놓고 오롯이 서있을 H의 그림자. 내가 알고 있던 견고함의 상징이 그곳에 있었어요. 나는 눈을 감고 길게 숨을 내쉬었습니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으로 창틀을 만지며, 내 안에서 아주 얇은 종이 같은 무언가가 찢어지는 느낌을 들었습니다. 불편하지만 명확한 자각이었습니다. 나는 지금, 유혹이 아닌 스스로의 선택임을 너무나 분명히 느끼며…


마차는 코벤트 가든의 소음을 뒤로하고 더 어두운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바퀴가 자갈을 밟는 소리에 맞춰 심장이 박동했어요. Y는 내게 말을 걸지 않았고, 나는 그 침묵이 고마웠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서 무엇을 찾고 있는지 알고 있었고, 그 자각은 잔인했지만 더없이 솔직했어요.


어떤 문 앞에 마차가 멈췄을 때, 나는 손을 떼려다 다시 그의 손을 꽉 쥐었습니다. 그것은 도움을 청하는 손이 아니라, 승인을 내리는 손이었어요. 그가 문을 열고 나를 이끌었고, 나는 족쇄를 찬 사람처럼 한 발 한 발 실내로 들어섰습니다. 난로의 불이 타오르는 소리가 들렸고, 벽난로 위에는 장미가 가득한 작은 화병이 놓여 있었죠. 장미의 향이 낯설게 달콤했습니다.


그 밤의 기억은 장면들의 연속으로 남아 있어요. 드레스의 단추가 하나씩 풀릴 때마다 정적으로 가득 차오르던 방의 온도, 가까이에서 보이는 그의 눈동자에 비친 내 얼굴. 모든 것이 명백한 동의였고, 나는 그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 사실이야말로 내가 지금껏 외면해 온 나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이었으니까요.


새벽녘, 창문 틈으로 회색의 빛이 스며들 때, 나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습니다. Y는 잠들어 있었고, 나는 그의 호흡을 한 번 세어 본 뒤, 내 손등을 오래 바라보았어요. 그 위에는 내가 내린 결정이 잔잔히 남아 있었죠. 내가 원해서 붙잡았던 손, 내가 원해서 내디딘 문턱.


그때 창밖에서 마차가 지나가며 차바퀴가 바위를 긁는 소리를 냈어요. 그 소리에 나는 문득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어쩌면 이 선택이 다른 삶에서 누군가의, 어떤 관계의 끝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 하지만 나는 그 두려움마저도 내 선택의 결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이 밤은 누구의 책임으로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옷을 가다듬고 깃을 올렸습니다. 거울 앞에 섰을 때, 낯선 여자가 서 있었어요. 그러나 그 여자는 나였고, 나의 눈은 이상하리만큼 또렷했죠. 나는 나에게 아주 작게 속삭였습니다.


“나는 끌려온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말이 나를 서늘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나는 오래 잊지 못했습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오래도록 한 문을 떠올립니다. 내가 스스로 열고 들어갔던 그 문. 그 문턱을 다시 돌아 나오려면 얼마나 많은 겨울을 거슬러야 할까. 아마도, 몇 생을 더. 그러나 그 밤, 마차의 바퀴가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내 선택을 단 한 번도 멈칫거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메피스토와 관음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