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구구절절 고군분투 세번째 책 출판기 (2)
2006년 즈음에 두번째 책 원고를 마치고 다음 책의 원고를 구상했다. 아, 2006년은 나에게 아주 특별한 해였는데 다름 아닌, 아들이 태어난 해였기 때문이다(어느새 지금은 고등학생이 되었다).
당시 나는 자기계발과 명상을 접목한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해서 교육하는 강사이고, 개인적인 심리상담을 많이 하던 때였다. 또 인터넷 카페를 운영하면서 게시판을 이용한 상담을 많이 하다 보니 우리가 삶에서 마주치게 되는 문제라는 것들이 결국 7가지 카테고리로 정리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런 점을 바탕으로 스토리텔링과 접목하여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삶의 교훈을 주는 편지의 형식으로 원고를 썼다. 당시에 태어난지 얼마되지 않은 나의 아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담아서.
원고를 마쳤으니 다음 과정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탈고를 해야지.
수 십 번 탈고를 마쳤으니 다음 과정은?
이 때까지만 해도 나는 원고에 욕심이 있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책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도 유명한 작가가 되었으면 좋겠다... 한편으로는 당연한 일일 수 있지만, 지금의 관점에서 본다면 헛된 욕망이기도 하다. 일이란 반드시 욕심 내고 집착한다고 크게 될 일은 아니다.
아무튼 이 때도 역시 서른 곳 정도 되는 출판사에 일일이 투고를 했다. 원고가 좀 더 대형 출판사를 통해 출간되기를 바랬기에 그런 곳들에도 빠짐 없이 투고를 했다는 것이 이전 원고들과는 다른 점이었다.
투고를 하고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았지만 어느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한경BP라고 한국경제신문사 그룹인 대형출판사였다. 담당자는 다급한 목소리로 내게 신신당부를 했다.
"선생님, 그 원고 다른 곳과 계약하신 것 아니죠? 저희와 꼭 계약하셔야 해요."
한국경제신문 계열이라 충정로에 있는 신문사 건물에 출판부 사무실이 있었는데 당시 내가 살던 집 바로 뒷 건물이었다.
당시 결혼한지 3년차, IT쪽 직장을 그만두고 창업한 후 수입이 얼마 되지 않던 때였다. 창업 후 처음 2-3년은 정말로 제로에 가까운 수입으로 전에 벌어놨던 얼마 안되는 돈 마저 까먹으며 살았다.
경제적으로 그다지 형편이 좋지 않았던 나는 아내의 직장이 있는 서울의 충정로로 전세를 얻어 이사를 했는데 '중앙맨숀' 이라는 이름의 아주 오래되어 낡고 허름한 한 동짜리 아파트였다. 이 건물이 처음 지어졌을 1972년 (내 생일과 같아서 아직도 기억한다. 30년 넘은 나이의 건물에 전세로 입주했다) 당시에는 서울 시내 한복판의, 지금의 타워팰리스급 건물이 아니었을까? 5층 정도 되는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지하의 대형 보일러로 기름을 태워 중앙난방을 했는데 바닥 난방이 안되고 라디에이터 난방으로 열효율이 낮아서인지 겨울이면 난방비가 그야말로 '더럽게' 많이 나왔다. 창문 샷시도 옛날식인데다 라디에이터 돌아갈 때만 잠시 따뜻하고 멈춰있을 때는 금방 식어서 춥기는 또 얼마나 추웠는지.
이런 집에 왜 입주를 했냐고? 집은 허름했지만 아내의 회사와 가까운데다 전세금이 저렴했기 때문이었다. 2006년 당시 전세금이 7.x 천만원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2008년 재계약하면서 9천만원 정도였던 듯하다. 당시 바로 인근의 래미안 아파트의 24평 전세가 3억이었던가? 당시의 나로서는 꿈도 못꿀 금액이었고.
서울 시내는 휘황찬란한만큼 그 이면에는 허름한 골목이 많았다. IT쪽 일을 할 시절 종로의 SK 본사 건물 고층에서 내려다보면 더 낮은 상가건물들 옥상들이 보이는데 그런 곳만 보면 여기가 서울이 맞나 싶을 정도로 허름하다.
우리 부부가 살던 중앙맨숀(참 촌스럽다. 옛날엔 이런 어법이 신식이었겠지만)에서 서재로 쓰던 방 창을 열면 1960년대쯤의 찢어지게 가난한 한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나 나올만한, 진짜 허름한 골목이 내려다보였다. 시장 골목이었는데 가난한 서민들은 그곳에서 열심히 생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 동네 바로 옆 블럭에는 사람 한명만 지나다닐 수 있을 법한 거미줄처럼 얽힌 옛날스러운 골목길도 있었다.
아무튼 서재방 창을 열고 아래를 보면 그렇게 타임머신을 과거로 돌린 듯한 비좁은 시장 골목이었지만 고개를 들고 몇 십 미터 뒤를 바라보면 몇 십 층 높은 은빛 타워가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듯 서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한국경제신문사 건물이었다.
원고를 이메일로 투고할 때만 해도 한경bp가 우리집 바로 뒷건물이라는 생각도 못했다. 참으로 신기했다. 이 무슨 칼융의 창문에 붙어 푸드덕거리는 황금풍뎅이 같은 동시성이란 말인가!
담당자와 통화를 한 다음날 나는 바로 동네 산책 가듯이 슬리퍼 질질 끌고 가서 - 는 아니고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담당자의 말투가 워낙 간곡했기에 (^^) -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그리고 그날 밤 꿈을 꾸었다.
큰 홍수가 나서 온 세상이 흙탕물에 잠겼다. 나는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몇 명의 사람들이 그런 흙탕물에서 자맥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꿈에서 나는 왜 저렇게 더러운 흙탕물에서 저러고들 있는 거지? 라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날 뉴스에 사건 하나가 크게 보도되었다. 한경에서 출간된 <마시멜로 이야기> 라는 100만부 이상 팔린 책이 있었는데 아나운서 정모씨가 번역자로 되어있어서 더욱 유명세를 더했다. 하지만 실제 번역자는 별도로 있었고 정모씨는 이름만 거는 식이라는 보도로 큰 파장이 일었다. 다음은 나무위키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2005년, 정지영 아나운서가 도서 《마시멜로 이야기》[1]를 번역했다는 점이 소문을 타 《마시멜로 이야기》가 발간 직후 9개월만에 100만부 이상 팔려 종합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으나, 출판계에서 대리 번역 논란이 불거졌다. 이에 대해 책을 출판한 한국경제신문 측은 2005년 7월 정지영이 단독 번역하기로 계약을 맺었으나, 오역할 수 있는 우려가 있어서 출판사 측에서 8월 초 전문번역가 김경환 씨와 이중 계약을 맺었다고 해명하였다. 이에 2007년 정지영은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정지영은 자신이 맡고 있던 SBS 라디오 프로그램 《스위트뮤직박스》와 TV 프로그램 《결정 맛대맛》 등에서 하차해야 했으며, 책 수익금 8천100만원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전액 기부하였다. 당시 네티즌들의 반응은 '정지영 아나운서에 대한 마녀사냥이다'며 안타까움을 표하거나, '원본 공개하고 진실을 밝혀라'라며 엇갈린 의견을 보이기도 했다.관련 기사 무혐의 처분 이후, 2007년 11월에 《스위트뮤직박스》 DJ로 복귀하여 방송 활동을 재개했다.
- 출처 : 나무위키
https://namu.wiki/w/%EC%A0%95%EC%A7%80%EC%98%81%28%EB%B0%A9%EC%86%A1%EC%9D%B8%29
뭐, 실제 내부적으로 어떻게 돌아갔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다만 꿈이 전해주는 상징적인 내용들을 해석해보면... HMM...
이 일로 출판사 내부 프로세스는 전면 스탑! 되었다. 내 원고의 출간 작업도 임시로 멈춰졌다가 한 달 후부터 재개되었다.
그렇게 작업이 재개된 후, 출판사에서는 리라이팅(rewriting) 작가를 써서 원고를 조금 손을 보겠다고 알려왔고, 나는 일단 수락했다. 1-2주 정도 지나서 내 원고의 첫 단락을 리라이팅 작가가 샘플 삼아 고친 내용을 보여줬는데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골격은 내가 쓴 것이 맞지만 거의 대부분의 문장들을 다 고쳐놓은 것이 아닌가! 친절하게도(?) 등장 인물들의 이름도 다 바꿔주었다.
솔직히 출판사의 규모를 생각하면 하자는대로 따라가는 것이 나의 일신상의 영달을 위해서라면 옳은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가로서의 양심' 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하면 그렇게 바뀌어 세상에 나온 책이 '나의 작품' 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것일까? 나는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출판부의 대표격인 임원을 만나서 미팅을 하는 자리에서 '이렇게는 곤란합니다' 라고 했고 출판계약은 무효가 되었다.
그렇게 해서 나의 세번째 원고는 망망대해로의 머나먼 항해를 떠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