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는 자신이 꿈꾸던 공부를 성취했을까?
유학의 캐치프레이즈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이다. 사대부(士大夫)란 이름이 대변하듯이 ‘공부를 하고[大夫]’, ‘정치를 하는[士, 仕]’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조선의 선비들이 다 정치를 했던 것도 아니고 그것을 권장했던 것만도 아니다. 수기와 치인 사이에는 큰 틈이 있었다. 그렇기에 조선조 내내 사대부에게 출처(出處)는 민감한 화두(話頭)였다. 서로 대립되는 이 두 개의 입장 중 하나를 선택하고 이를 치열하게 지키며 자신의 삶을 살았던 이들로 남명(南冥) 조식(曹植)과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들 수 있다.
그런데 ‘남명(南冥)’이라니? 오직 성리학만이 실학(實學)이며 다른 학문은 모두 이단(異端)이라고 믿었으며, 심지어는 성리학의 경전을 주자의 해석과 조금만 다르게 설명해도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리던 시대에 『장자(莊子)』의 첫 구절에 나오는 ‘남명(南冥)’을 자신의 호로 삼았으니 그는 아마 출사에는 전혀 뜻이 없었던 듯하다. 실제로 그는 ‘성성자(惺惺子)’라고 이름 붙인 방울 두 개를 그의 옷고름에 달고 다녔다. 성(惺)은 ‘깨달음’이니 스스로 항상 깨어 있는 마음을 지니도록 경계한 것이다. 전형적으로 수기에 올인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율곡은 이와 달랐다. 주지하다시피 남명과는 반대로 전형적인 현실 정치가의 길을 걸었다. 현실을 극복하고자 치열하게 정치에 참여했던 율곡의 태도를 짐작케 하는 일화가 남아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선조 8년(1574년) 정월 초하루에 열린 경연에 관한 기록이다. 율곡은 대신과 대간들의 격려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부족한 의욕에 변명으로 일관하는 선조를 몰아붙인다. “만약 스스로 살펴보아 나라를 다스리기에 재능이 부족함을 아신다면, 반드시 ‘자신보다’ 어진 사람을 얻어서 정치를 맡기셔야 할 것입니다(若自度才不足以治國 則必得賢‘於己’者而任之可也).” 율곡 정도의 정치가가 아니었다면 목숨도 위태로웠을 발언이다(오늘날 우리가 아쉬워하는 정치인의 태도이기도 하다). 그만큼 율곡은 치열하게 현실정치에 맞섰다. 그는 병든 몸을 이끌고 인재를 고르기 위해 사람을 접견했고 죽기 직전까지도 북방의 백성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떠나는 서익(徐益)에게 병조판서의 경험을 전하고자 했다. 아들과 조카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동생 우를 앉혀놓고 자신의 말을 대신 써 전하도록 했다. 이것이 「육조방략(六條方略)」, 율곡의 마지막 글이 되었다.
그 중간 지점에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있다. 퇴계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그가 65세에 지은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에 이런 노래가 실려있다. “당시(當時)에 힘쓰던 길 몇 해씩이나 버려두고 / 어디가 헤매다가 이제야 돌아왔는가? / 이제라도 돌아왔으니 딴 곳에 마음 두지 않으리라.” 이제 더 이상 정치에 마음 두지 않고 학문에 정진할 것을 다짐하는 내용이다. 그는 “젊은 시절 망녕되이 세상 길에 나아가 풍진(風塵)을 헤매다, 돌아오지 못하고 거의 죽을 뻔했다.”며 자신의 정치참여를 ‘어리석은 방황’이었다고 고백한다. 심지어 23세의 젊은 수재 율곡에게 자신의 전철을 밟지 말고 ‘진정한 공부’에 몰두하라고 권했다. 평생 현실 정치가의 길을 걸었던 율곡과는 달리 퇴계는 수도사의 삶을 꿈꿨다.
퇴계는 일관되게 ‘잘못 들어선' 벼슬길에서 물러나 공부에 몰두하고자 했다. 오죽했으면 그 소원을 이루었을 때 고향의 계곡(溪谷) ‘토계(兔溪)’의 이름을 고쳐 ‘퇴계(退溪)’라고 부르고 아호로 삼았을까? 그렇다면 그는 왜 그토록 ‘물러남[退]'에 집착했을까? 여기에는 자신의 부족한 공부에 대한 걱정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 토계천 건너에 터를 잡아 한서암(寒棲庵)을 짓고 ‘정습(靜習)’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물러나서 ‘고요하게 익히리라[靜習]’는 퇴계의 의지가 담긴 작명이다. 드디어 소원을 이룬 퇴계는 이렇게 노래했다. “몸이 물러나 어리석은 분수에 편안하나 / 학문은 퇴보하여 만년에 근심되네(身退安愚分 學退憂暮境).”
이렇게 퇴계가 평생토록 몰두했던 공부의 실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우주의 이치에 능통해지는 것, 많은 책을 읽고 방대한 지식을 쌓는 것, 혹은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풍부한 지혜을 얻는 것. 그럴리가? 퇴계의 평생 사표(師表)였던 주자(朱子)의 시(詩)이자 대표적인 도학시로 조선의 선비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관서유감(觀書有感)』에는 퇴계가 지향하는 공부의 목표를 짐작케 하는 구절이 들어있다. “작은 사각 연못에 큰 거울이 펼쳐지니 /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天光雲影)’가 그 안에 일렁인다. / 묻노니 이 연못은 어찌 이리도 맑을까. / 발원지에서 쉬지 않고 새 물이 흘러들기 때문이지(半畝方塘一鑑開 ‘天光雲影’共徘徊 問渠那得淸如許 爲有源頭活水來).”
옛 선비들은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동그랗고 땅은 네모나다) 사상에 따라 네모지게 연못을 팠다. 그 연못 물[거울]에 ‘하늘 빛(天光)’과 ‘구름 그림자(雲影)’가 비치려면 그 물의 상태는 어떠해야 할까? 물론 이 연못의 물은 사람의 마음을 가리킨다. ‘우리의 본성, 혹은 마음의 이치[그래서 성리(性理)다]’, 그 근원에 쉬지 않고 맑은 물이 흘러든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이 본연의 평온함을 유지할 능력을 갖추고 있고, 세상의 모든 것을 진실 그대로 인식할 수 있다. 잔잔한 연못의 물 위에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까지도 비추어지듯이 말이다. 퇴계가 평생 희구했던 공부의 목표가 바로 이것이었다.
도산서원(陶山書院)은 안동호(安東湖) 위 한쪽 사면에 높게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도산서원의 입구는 자연스럽게 대(臺)의 역할을 한다. 그 이름이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다. 참으로 퇴계의 서원에 어울리는 이름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퇴계는 자신이 꿈꾸던 공부의 목표를 이루었을까? 『퇴계선생언행록』에 이런 일화가 실려있다. “일찍이 선생님을 산당(山堂)에서 모시고 있었는데, 마침 집 앞으로 말을 탄 사람이 지나가고 있었다. 일하던 중이 ‘그 사람 이상하네, 선생님 앞을 지나가면서 말에서 내리지도 않다니?’ 하자, 퇴계가 말했다. ‘말을 탄 사람이 그림 속의 사람 같구나. 좋은 풍경 하나를 보탰을 뿐인데, 무슨 잘못이 있겠느냐?’”
걸핏하면 “내가 누군 줄 알고?”를 외치며 분노를 표출하는 현대인들이 이 일화에 담긴 퇴계가 성취한 공부의 깊이를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과도한 합리성으로 타인의 잘잘못을 추상같이 따지면서 스스로 자신과 타인의 마음을 폭풍우로 몰아넣는 사람들로 가득한 시대, 그러면서도 자신이 옳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하고 성찰은 부족한 사람들의 시대, 그래서 모두가 함께 고통받는 시대에 퇴계가 이룩한 공부는 이 난관을 돌파할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