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잊혀진 삶의 기술

언제였던가? 인문학 강의록!

by 김현철

prologue


주지하다시피 우리나라는 자타가 공인하는 IT 강국입니다. 일부 국가에서는 백본망에서나 가능한 기가비트 대역폭의 인터넷을 가정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전자정부 순위나 스마트폰 보급률이 가장 높은 나라에 속합니다. 시골 버스 정류장에서도 다음 버스가 어디에 오고 있으며 언제쯤 도착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기업 삼성과 SK하이닉스는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3/4을 점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몇 년 전 우리의 약점을 겨냥한 일본의 경제보복도 별 소용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일본의 관련 소재 기업을 궁지로 몰아넣기도 했습니다. 세계 유수의 여러 언론들이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 가장 잘 대응하는 나라로 우리나라를 꼽기도 했습니다. 여기에는 민주성, 신뢰성, 투명성과 함께 세계 최고 수준의 정보통신 인프라를 꼽고 있습니다. 이 특징들은 작년 국가의 재난지원금 지급 과정에서 이 특징들이 이웃 나라 일본과 비교가 되기도 했었습니다. 업무를 시작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국민의 79%에게 지급을 마친 우리나라와 그 시점에 19%가 겨우 신청을 마친 두 나라의 상태가 세계인들에게 화제가 됐었지요. 현대 사회에서 지식 정보 인프라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줍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듯이 이러한 강점에는 반대급부도 있습니다. 바로 구성원들 사이의 ‘갈등’입니다. 서로 이해하고 양보하며 조화롭게 살아가던 과거와는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인터넷, 스마트폰과 같은 정보 전달 매체의 발달로 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다 많은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게 되었는데 과거에 비해 갈등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유의미한 지식과 정보에의 접근이 용이해졌다면 서로 소통하고 화합하며 서로를 잘 이해하며 살아가는 방향으로의 진전이 이루어져야 하는 게 아닐까요? 그러나 현실은 반대인 경우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누군가 얻은 정보가 공동체 속의 타인을 이해하고 존중하며 협업하는 계기가 되기보다는 나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안타깝게도 나의 권리를 위해 타인의 무한희생을 요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장면도 종종 보게 됩니다. 이런 사태는 이른바 지속가능한(sustailable)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태를 보면서 많은 지식과 정보, 그리고 뛰어난 전문성이 우리의 행복한 삶을 위한 조건의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행복한 삶’이라는 동전의 한쪽 면이 지식과 정보, 그리고 전문성이라면 다른 면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논제에 대해 제가 세운 가설은 그것이 지혜라는 것입니다. Wisdom이라는 단어로 수렴될 수 없는 넓은 의미의 지혜, 지식과 통찰력을 모두 아우르는 지혜 말이지요. 동아시아인들이 오랫동안 ‘앎[知]’(위에서 논의한 지식과 정보라고 할 수 있겠지요)과 ‘지혜[智]’를 구분해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이 가설은 꽤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놀랍게도 인류의 사유가 본격적으로 탄생했던 기원전 8~2세기에는 동서양(중국과 인도, 그리스와 메소포타미아 등)에서는 이런 관점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지혜를 인문학(人文學)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저는 ‘삶의 기술’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이 ‘삶의 기술’이 수 천 년 인간의 삶에서 그 유효성이 증명되어 오랫동안 보존되어 온 저장고가 바로 고전입니다. 명검(名劍)이 탄생하려면 오랫동안의 담금질을 거쳐서 자신의 성능을 증명해야 하듯이 말이지요.


어떤 사태가 풀리지 않는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혀있을 때 우리는 ‘기본으로 돌아가자’고 말하곤 합니다(르네상스의 캐치프레이즈가 ‘고전으로 돌아가자’였던 것을 기억하시지요). 서로 다른 입장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이 복잡하게 얽혀 갈등의 빈도가 높아지는 우리 삶에서 우리가 강조하는 지식과 전문성이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솔루션으로서의 효용성을 잃어가고 있다면 우리도 기본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인간이 오랫동안 쌓아온 지혜와 통찰력의 정수인 인문학으로 말이지요.


지혜의 탄생


동서를 막론하고 기원전 6~7세부터 기원전 2~3세기까지는 인류 최고의 지혜가 발아(發芽) 한 시기였습니다. 영국의 종교학자 캐런 암스트롱(Karen Armstrong)은 이 시기를 축의 시대(Axial Age)라 일컬으며 “우리는 한 번도 축의 시대의 통찰을 넘어선 적이 없다.”라고 단언합니다. 우리의 사유를 지배하며 우리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현대의 철학과 종교가 이 시기의 중국과 인도, 그리고 그리스와 이스라엘에서 시작된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지구 반대편에 있어 당시에는 서로 교류한 적이 없는 지역에서 각각 발생한 이 ‘문화적 평행 현상’에서 더욱 놀라운 것은 이들이 매우 유사한 사유를 지혜의 핵심으로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황금률(The golden rule)이라고 부릅니다. 바로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사유입니다. 이 사유는 논어, 맹자와 같은 유교의 경전은 물론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 힌두교 등 대부분의 종교의 성경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를 무시하고 사소한 차이를 확대 재생산하여 분쟁을 일삼아온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축의 시대의 통찰을 넘어선 적이 없다’는 캐런 암스트롱의 지적은 참으로 통렬합니다.


철학(哲學, philosophy)의 어원은 그리스어의 필로소피아(philosophia)입니다. 필로스(philos)는 ‘사랑하다’ ‘좋아하다’라는 뜻의 접두사이고 소피아(sophia)는 ‘지혜’라는 뜻으로, 필로소피아는 ‘지혜[智]를 사랑하는 것’을 뜻합니다. 철학은 지혜에 관한 학문이란 것이지요. 그리스인들의 철학과 비견(比肩)될 수 있는 동아시아인의 사유는 백가쟁명(百家爭鳴), 백화제방(百花齊放)이라 일컬어지는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諸子百家)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제자백가의 다양한 사유도 결국은 인간의 삶이 위기에 처한 세상, 즉 난세를 극복하여 행복한 삶을 찾기 위한 지혜로 귀착됩니다.


그렇다면 철학의 대상인 지혜란 무엇일까요? 지혜란 본래 ‘삶의 기술’을 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과 사회, 그리고 우주에 대해 이해를 바탕으로 바람직한 삶의 길[道, Idea]을 찾고 그 길을 가기 위한 훈련 매뉴얼로서의 지혜를 찾는 학문, 그것이 철학의 본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철학이 발전을 거듭할수록 인간과 우주를 이해하는 다양한 방식을 제공해 주지만, 한편으로 철학이 분화된 오늘날의 학문은 지나치게 부분에 집중하면서 지혜의 학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가는 듯합니다.

여기에서는 철학이 지혜의 학문이었던 과거, 특히 춘추전국시대부터 비롯된 동아시아인의 사유를 중심으로 바람직한 삶의 지혜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동아시아인의 인간상


우리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오랜 사유의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는 수 천 년 전부터 인간의 본질에 대해 사유하고, 이에 관한 지식을 축적해 왔습니다. 철학, 종교에서부터 인문과학, 사회과학은 이 지식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에 이르지 못한 채 여전히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과제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삶은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정답 대신 어떤 가설(假說) 위에 정초(定礎)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개인의 삶, 나아가 사회라는 시스템 속의 인간에 대한 이해는 ‘선한 존재’, ‘악한 존재’ 혹은 ‘원죄를 타고난 존재’라는 기본적인 인식의 바탕 위에 쌓아 올려져 있다는 뜻이지요. 여러분의 삶과 의식은 어떤 바탕 위에 정초되어 있으신가요?


이 점에 대한 동아시아인들의 사유도 수 천 년 전부터 넓은 스펙트럼을 갖고 있습니다. 잘 아시는 맹자(孟子)의 성선설과 순자(苟子)의 성악설이 대표적입니다. 그 외에 인간의 본성을 확정할 수 없으며 물길처럼 터주는 방향으로 정해진다는 학설까지 매우 다양합니다. 이른바 춘추전국 시대 제자백가들의 다양한 학설처럼 인성론도 다양했던 것입니다. 이 학파들은 진시황의 중원 통일과 중앙집권적 정치 체제를 거쳐 전한(前漢) 초기에 이르러 학문의 통일, 즉 사상의 통일로 귀결됩니다. 이른바 ‘파출백가 독존유술(罷黜百家, 獨存儒術)’으로 불리는 이 변화를 통해 유학은 다른 학파를 물리치고 국교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게 됩니다. 결국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인식도 유학의 절대적인 영향 하에 놓이게 됩니다.


그렇다면 유학, 구체적으로 성리학에서 보는 인간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동아시아의 역사가 수 천 년 동안 유교의 영향 하에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의 인식도 여기에 영향받았을 가능성이 큽니다(철학자 미셀 푸코는 이것을 에피스테메라고 불렀습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채 우리 의식이 어떤 무의식적 체계 속에 놓여 있는 것을 말합니다). 성리학의 경전 중 하나인 중용(中庸)은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라는 구절로 시작됩니다. ‘하늘이 명한 것, 그것을 일컬어 본성[性]이라고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매우 중요한 선언(宣言)입니다.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하늘[天]이 부여한 것이 성(性)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소명(召命)이라고 불렀을 듯한 이 명령은 석판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마치 DNA처럼 새겨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길을 따라가는 것이 인간의 바른 삶이 되는 것이지요.


성리학자들은 이 본성을 인간에게 국한하지 않고 사회와 우주에도 적용합니다(사실은 인간 윤리의 당위성을 우주 만물의 원리[性] 위에 정초한 것입니다). 우주를 움직이는 근본 원리[性]가 선(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선하지 않다면 우주가 유지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주와 같은 이치를 부여받은 인간의 본성 역시 선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유교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인의 사상을 지배해 온 유불선(儒佛仙)은 이 공통의 기반 위에 서 있습니다). 맹자(孟子)의 ‘세상 만물은 그 자신 안에 모든 원리를 갖추고 있다(萬物皆備於我)’는 지적은 이 같은 사유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수 천 년 지속되어 온 동아시아인의 사유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이 관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말은 동아시아인들이 추구해 온 삶의 원칙은 이 원리를 구현하는 것이 되어왔다는 의미입니다. 많은 현자들의 삶과 그들이 남긴 고전이라는 유산은 바로 인간 자신의 내면에 숨어있는 이 초월적 원리를 구현한 기록인 것입니다.


공부[學問], 누구나 타고난 탁월함을 발휘하는 길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동아시아인들이 생각한 인간의 바른 삶[道]은 자신이 본래부터 갖고 태어난 무늬[性]를 현현(顯現)하는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부여된 아레테(Arete)를 실현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여겼습니다. 아레테의 원래 의미는 ‘자신의 삶을 우주의 질서에 맞게 연결시킨 것’입니다. 인간과 우주를 관통하는 삶의 본질적 의미를 찾으려 했다는 점에서 동서양을 대표하는 이 두 문명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를 깨달아 ‘아레테’를 어김없이 발휘한 자들 중 투표를 통해 지도자를 선출하는 것이라고 여겨졌습니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시작입니다. 민주주의의 시작은 이 철학적 깨달음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동아시아인의 성(性)과 그리스인의 아레테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부여받은 탁월한 자산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품수(稟受) 받은 탁월함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로 태어나지만 누구나 그것을 실현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게 공부[學]입니다. 공부는 인간이 타고난 탁월함을 그 본래의 특성대로 발휘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이 배움을 통해 지혜, 즉 삶의 기술을 익힌 사람만이 본래 타고난 탁월한 본성대로 살아갈 수 있는 셈입니다. 이처럼 동아시아인들은 오랫동안 공부를 ‘본성의 체현(體現)’으로 정의해 왔습니다. 공부란 모르는 것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갖고 태어난 덕[明德]’을 몸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원래부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몸으로 드러내는 일에 불과함에도 이것은 참으로 지난(至難)한 과정입니다. 그리고 한 번의 깨우침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유지되어야 하는 것입니다(불가에서는 이것을 돈오(頓悟)와 점수(漸修)로 표현합니다). 계속해서 유지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그것이 바로 공부의 가장 큰 어려움입니다.


한마디로 공부는 원래부터 타고난 본성인 삶의 기술을 익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그 기술을 발휘하도록 하는 과정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태어난 아름답고 위대한 본성을 밝히는 길이라는 점에서 공부는 평생의 과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선인들이 남긴 인문학이라는 텍스트는 우리가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수고를 덜어 줄 것입니다(수 천 년의 지혜가 담긴 인문학을 버려두고 자신의 수 십 년 경험에만 의지하는 사람을 두고 일찍이 장자는 우물 안 개구리[井底之蛙]라고 불렀습니다).


인문학이라는 ‘삶의 기술(The Art of Living)’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그것이 삶의 기술이라는 매우 실용적인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인문학적 역량을 더 많이 쌓을수록 내 삶에 주어지는 과제들을 잘 해결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타인과 조화를 이루며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운전을 배우는 경우를 생각해 볼까요? 처음 운전을 시작하면 자동차의 각 부위를 조작하는 것조차 힘듭니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면서 시시각각으로 주어지는 정보를 받아들여, 판단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조차 버겁습니다. 주차는 더 힘듭니다. 건물의 구조물이나 남의 차를 긁기도 합니다. 시간이 지나 경험이 쌓이고 여유가 생기고 초보 때는 흘려보냈던 정보를 포함하여 더 많은 정보를 읽어내고 좀 더 빨리 판단하고 행동으로 옮겨 더 안전하게 운전할 수 있게 됩니다. 좀 더 속도를 내도 오히려 초보 때보다 안전해지고 좁은 길도 능숙하게 다니고 다른 차의 뒷모습만 봐도 다음 행동을 예측해서 미리 위험을 피하는 능력도 생깁니다. 운전하는 기술이 늘었기 때문입니다.


삶의 기술도 비슷합니다. 인문학이라는 삶의 기술이 높아지면 자기 삶을 잘 운전(!)할 수 있게 됩니다. 삶의 기술이 부족한 사람이 어려워하는 과제들도 잘 해결하고, 다른 사람은 힘들어하는 인간관계도 제대로 해냅니다. 다른 사람이 사태의 한쪽 면만 보면서도 자신만이 옳다는 확신에 빠져 있을 때 사태를 사방팔방의 다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통찰력도 갖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경험에 의존하지만, 인문학적 통찰을 습득한 사람은 자신의 역량을 훨씬 뛰어넘는 위대한 인물들의 지혜도 활용합니다.

사회적 존재인 인간의 삶이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뜻합니다. 그 관계망 속에서 만나는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 자체입니다(그래서 《열린 사회와 그 적들》로 유명한 철학자 칼 포퍼는 ‘삶은 문제 해결의 연속이다’란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다시 강조하자면 문제를 해결하면 좋은 삶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문제해결 그 자체가 삶의 본질인 셈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관계, 그리고 관계 속에서의 문제해결력이 삶의 핵심 역량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인간관계라는 핵심기술을 익히는 데 가장 좋은 도구가 인문학입니다. 우리 삶의 난제들을 풀어가며 우리 역사를 이끌어온 현인들의 기록이 바로 인문학이기 때문입니다.


‘총론은 공감하나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이냐?’라는 의문이 생기실 분들을 위해 살짝 힌트를 드리고자 합니다(그것은 우리 인간의 삶에 대한 총체적 진실이 아니라 ‘내가 본 삶은 이렇다’ 정도의 하찮은 담론에 불과함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사회적 존재, 관계 속의 존재인 인간에게 타인의 인정과 지지는 행복한 삶에 필수 요소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말한 삶의 기술의 구체적 내용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타인에게 사랑과 존중, 응원과 지지를 받는 능력’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나는 잘 해내고 있다’ ‘나는 행복하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와 같은 존재의 가치를 묻는 결정적인 질문에 대한 긍정적인 답은 바로 사랑과 존중, 응원과 지지가 담긴 타인의 피드백에서만 얻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은행의 예금이자와 같아서 이것을 받으려면 미리 원금을 예금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많이 받고자 한다면 많이 예금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타인의 사랑과 존중, 응원과 지지를 얻어내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이 먼저 베푸는 것입니다. 타인에 대한 냉철하고 합리적인 비판과 판단(자신은 이렇게 부르지만 타인은 지적질이라고 생각합니다)을 멈추고 그저 내 곁에서 나와 함께 살아가는 것만으로 사랑과 존중, 응원과 지지를 보내야 합니다. 첨언하자면 높은 지위와 경력, 그리고 나이는 결코 원금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직급이 낮은 사람, 나이가 어린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치고 그들로부터 존경과 지지를 받는 사람은 없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런 점을 간과하고 타인을 함부로 대하고, 이것이 언론을 장식하여 여러 사람의 공분을 사곤 합니다. 높은 직위와 많은 나이에 타인을 함부로 대할 권리는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존중받고자 한다면 타인을 먼저 존중해야 하고, 지지받고자 한다면 타인을 먼저 지지해야 합니다. 전술한 것처럼 삶의 기술의 핵심[황금률]은 역지사지, 이것뿐입니다. 인문학은 인간의 역사에서 자신의 삶을 통해 증명한 이러한 삶의 기술, 우리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도 잠깐은 잊고 있었던 이러한 삶의 기술에 대해 일깨워줄 것입니다. 자, 이제 인문학이라는 삶의 기술을 익힐 준비가 되셨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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