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간은 '우물 안 개구리'다

왜 인간은 자신이 옳다고 믿을까?

by 김현철

장자(莊子)는 말한다. 인간은 모두 ‘우물 안 개구리(井底之蛙)’라고. 이 우물의 실체는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과 공간’이다. ‘우주(宇宙)’와 ‘세계(世界)’이라는 말은 모두 ‘시간[宙,世]과 공간[宇,界]’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자신의 시간과 공간이라는 한계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니 누군들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닐 수 있겠는가!

이 ‘우물 안 개구리’가 옳고 그름을 판단할 때 기준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자신의 ‘가치관’이다. 그렇다면 옳다고 믿는 것이 정말 옳은 것이 되려면 이 ‘기준’이 정확해야 한다. 그렇다면 옳음을 판단하기에 앞서 옳음의 기준이 되는 우리 가치관이 타당한지 검증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가치관은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자기 삶의 ‘시간과 공간’이라는 한계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조선 시대와 현대의 가치관이 다르고 동양과 서양의 가치관은 다르다. 기성세대와 MZ세대의 가치관이 다르고 사는 지역에 따라 가치관도 달라진다. ‘시간과 공간’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옳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자의적(恣意的)’인가? 옳음의 기준이 되는 사람의 가치관이 각각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얻어진 것이니 말이다. 이 제멋대로인 자기 옳음의 기준(가치관)을 믿고 타인과 세상을 판단하는 것은 또 얼마나 제멋대로일까? 이렇게 생각해 보면 ‘내가 살아봐서 아는데……’, ‘내가 해봐서 아는데……’처럼 허망한 이야기가 없다. 누구나 자신이 옳다는 확신에서 말하겠지만 그저 자기 삶의 시간과 공간에서나 옳은 것일 뿐이다. 그러니 이런 담론은 ‘나는 우물 안 개구리’라고 스스로 광고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렇게 자기 삶의 ‘시간과 공간’이라는 우물에 갇혀 얻은 자기의 답안지를 정답이라고 굳게 믿는 이를 장자는 곡사(曲士)라고 부른다. ‘일곡지사(一曲之士)’의 줄임말이다. 예를 들어 사물의 모퉁이가 4개 있는데 ‘한쪽 모퉁이[一曲]’만 보고서 그것이 사물의 전부라고 믿는 식견이 좁은 사람을 뜻한다. 물론 여기에서 모퉁이가 상징하는 것은 우리 삶의 다양한 가치관, 관점, 그리고 무수한 판단과 선택에서 고려해야 할 변수들이다. 자신의 작은 일 하나를 결정하려 해도 고려해야 할 변수들이 얼마나 많은가? 단 두 사람이 만나도 그 많은 모퉁이와 모퉁이가 서로 만나는 셈이니 또 얼마나 많은 고려 요소들이 생겨나겠는가? 그게 보다 많은 사람들과 관계되는 것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답안지[가치관]가 정답이라고 믿는 곡사는 모든 것을 단순화할 수 있다. 자신의 눈에 보이는 요소 외에 다른 요소는 고려하지 않으니 빨리 판단하고, 쉽게 결정할 수 있다. 의심할 여지조차 없이 너무 분명하다고 확신한다. 자신이 틀렸다는 증거들이 계속 나타나도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 지엽적인 근거라도 끌어내서라도 자신의 생각을 옹호할 뿐이다. 이른바 ‘정신승리’에 빠지는 것이다. 자신이 옳다는 확신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은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다. 우리 범인(凡人)들 모두가 그렇지 않은가?


장자는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는) ‘어리석은 선비[曲士]’는 옳은 것[道]을 말할 수 없는 것은 자신의 경험에 갇혀있기 때문(曲士不可以語道者束於敎也).”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어리석은 선비의 경험’은 자신이 파놓고 자기 스스로가 빠지는 우물인 것이다. 우리의 경험과 지식은 삶의 지혜를 주기도 하고, 우리를 우물 안에 밀어 넣기도 하는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다. 불행히도 우리의 지식과 경험이 우리의 우물이 될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그러니 ‘나는 안 그럴 것’이라는 생각은 미뤄두는 것이 현명하다 하겠다.


이제 우리를 우물에서 구해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해보자. “‘우물 안 개구리’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물 안[자신의 가치관]’에 갇혀 자기가 보는 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우물 안에 갇혀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모르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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