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5시. 플래너를 꺼내 오늘 하루 할일을 써내려간다.
투두리스트 7개, 운동 2개, 오늘의 정리는 1개. 마지막으로 '집안일' 카테고리가 남았다. 빈 칸으로 비워둘 순 없을까 머리를 굴려보지만 이내 포기한다. 세탁물 개어 제자리두기, 주방 설거지 하기, 피클 만들기. 3가지를 적었다.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한자 한자 꾹꾹 눌러 적는다.
기상후 충만했던 체력, 정신에너지는 오후 3시를 지나며 급속도로 고갈된다. 그 전에 해야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을 적절히 배치해둬야 하는데 가장 큰 복병은 집안일이다. 집중력이 높은 오전 덩어리 시간을 떼어주긴 싫고 기력이 떨어지는 오후에는 손사래 칠 정도로 하기싫은 집안일을 다 끝내는 방법이 있을까.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라면 스트레스를 덜 받고 싶었다. 나의 산만한 성향을 적극 활용해 성가신 의무인 집안일을 해치우는 방법을 실험했다. 나름대로 터득해 루틴이 된 기술 3가지를 소개한다.
1.파도타기
거창하게 명명한 파도타기 기술은 동선을 따라 집안일을 나노단위로 쪼개 연쇄적으로 처리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보자. 거실 책상에서 일을 하다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난다. 바로 옆 세탁물 건조대를 지나치지 않고 수건 하나를 집어든다. 개어서 건조대에 올리기 약 8초를 소비한 후 문을 열고 화장실에 간다. 그 다음 행동순서는 손씻기. 세면대로 향한다(화장실과 세면실 공간이 분리되어 있다). 손을 씻고나서 먹을 약을 꺼내 들고 주방으로 이동한다. 자 이제 주방에 도착했다. 주방에 온 목적인 약 먹기를 끝낸 뒤 식기건조대에 있던 프라이팬 1개를 가스렌지 아래에 수납한다. 2,3개도 아니고 딱 1개를 말이다. 그리곤 다시 본래 있던 장소인 책상으로 오기전 세탁물 건조대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속옷 하나를 개어 건조대에 올려둔다. 책상 앞에 앉는다.
이게 무슨 기술이나 되냐고? 이런 비효율적인 방식이 이해가 안 갈 수도 있다. 세탁물개기, 그릇 수납하기를 한번에 다 끝내고 편히 쉬는게 더 효율적이고 개운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일의 효율성보다 앞서는 이 파도타기 기법의 혜택은 내가 '집안일을 했다' 라는 기억이 잘 남지 않는데 있다. 세탁물을 걷어 본격적으로 앉아서 개어 옷장에 수납하는 과업을 끝내려면 덩어리 시간을 내줘야 한다. 헌데 이 파도타기 기법은 '내가 화장실에 다녀왔다' 는 주 기억만 남고 세탁물을 개고 그릇을 수납한 일은 작은 일은 뇌에 저장하지 않는듯 하다. 집안일을 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으니 스트레스를 덜 받는다. 동선의 파도를 타다보면 어느새 세탁물이 다 개어져 있고 집안에 흩어졌던 물건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식이다. 하다못해 이동한 방에 꽂혀있는 전기코드라도 빼둬야 하고 머리카락이라도 한가닥 주워 정돈하는 식이다. 흐르는 물에 작은 일을 덧붙여 진폭을 만들어 한방향으로 출렁이는 파도를 만든다. 백사장에 조개껍질들이 쌓이듯 동선이란 물결을 타고 일을 쌓아가는 방식이라고 할까.
2.퍼즐맞추기
뇌속임 기술 두번째는 타이머를 활용한 퍼즐맞추기다. 설거지를 끝낸 그릇이 그릇장에 차곡차곡 정리된 모습이 퍼즐의 완성된 그림이라고 해두자. 쌓인 설거지 중 그릇을 3개 닦으면 조각 3개를 맞춘거로 인정한다. 컨디션이 좋을 땐 한번에 열 몇개를 맞추기도 피곤할 때는 3,4개를 맞추고 쉬기도 한다. 몇 개 퍼즐을 맞출지는 타이머로 정한다. 타이머가 울릴 때까지 맞추면 된다. 마음 부담이 적은 날은 10분에 맞춰두고, 마음이 내키지 않을 때는 3분으로 돌려두기도 한다.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하다 타이머가 울리면 금새 다시 벗게 되니 이렇게 비효율적일 수가 없다. '도중에 하다가 마는' 이런 일처리 스타일이라니 찜찜하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집안일 한가지를 덩어리로 끝내고 나면 개운함보다 사고 싶지 않은 물건을 강매당한냥 뒤끝이 남는 나는 자구책으로 이런 방식을 택했다. '내가 집안일에 이렇게 시간을 많이 썼다고?!' 와 같은 억울함이 남지않도록 뇌가 착각하게 만든다고 할까. 조삼모사격 기술쯤 되려나. 일한 시간을 모두 합치면 집중해 단시간에 끝내는 편이 모든면에서 이득일 것이다. 집안일에 애정을 쏟고 싶진 않지만 정돈된 환경을 원하는 사람에게 딱 맞는. 주의력이 수시로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산만한 사람에게 제격인, 내가 찬양하는 방식이다. 한 두 조각씩 맞추다보면 어느새 완성된 그림을 보게 된다. 다만 매일 외부로 출근하는 직장인에게는 맞지 않는, 또한 대가족의 삼시세끼를 차려내야 하는 상황엔 적용하기 어려울 것이다.
3.가랜드 기법
세번째는 가랜드 기법으로 주로 얕은 무기력이 찾아 왔을 때 쓰는 방법이다. 가랜드란 긴 줄에 깃발모양의 천을 연이어 매달아 생일이나 축하할 일에 장식하는 장식품이다. 깃발대신 포스트잇으로 나열해 붙이는 모습에서 가랜드 기법이라 이름지었다.
우선 포스트잇을 잘게 잘라 집안일 한 가지를 1,2분안에 할 수 있는 단위로 쪼개 하나씩 적는다. '된장찌개 끓여먹기' 라는 과업이라면 채소 씻기, 재료 썰기, 냄비 꺼내기, 재료 넣고 끓이기, 먹기, 도구 및 그릇 설거지로 나누어 적는 것이다. 집안일뿐 아니라 이 닦기, 옷 갈아입기등 포스트잇이 아까울 정도의 하찮은 일도 적는다. 그리고는 생각을 끝내고 포스트잇에 써 있는 항목을 하나씩 격파한다. 할까 말까 생각하지 않는다는게 포인트다. 입력된 수식에 결과값이 도출되듯 움직인다. 몇 분전의 내가 입력한 명령을 그대로 수행하면 되는 것이다. 해치운 일 포스트 잇은 떼어서 한 곳에 모아둔다. 종이 한 장에, 또는 스마트폰에 할일을 나열하는 것과는 그 효과가 다르다. 처리한 일이 늘어나는 게 눈에 보이니 성취감이 생겨 무기력이 옅어지는 경험을 했다. 10분 정도 단위의 작은일도 시작하기 부담스러울 때 1분, 1개부터 한 발 내딛는 기술이다. 기술이라 하기엔 하찮지만 효과는 무시하지 못한다.
반복의 연속, 지겨운 집안일을 처리하는 기술 3가지중 활용해 보고 싶은 기술이 있는가? 하나라도 있다면 다행이다. 숨겨진 비법이라도 되는냥 늘어놓았으나 사실 내가 추구하는 생활방식을 완성하면 이런 얕은 기술은 무색해 질 것이다. 집안일의 군더더기를 더 줄이고 물건수를 줄여 충분함을 느끼는 범위를 축소하면 할수록 자잘한 테크닉은 필요없게 된다. 궁극의 간소한 삶이 완성되면 투두리스트에 집안일이라는 항목을 비워도 되지 않을까.
'하고자 애쓰는 일을 아무리 줄인다 해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은 있게 마련이다. 집안이 저절로 깨끗해질 리는 없으며, 저녁 식사가 저절로 준비될 리도 없다. 하지만 걱정은 금물! 최소한의 시간과 노력으로 여러가지 일을 해치우기 위해선, 몇 가지 루틴만 있으면 된다. 루틴은 발레 연습의 일과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너무나 잘 알기에 정확하고 우아하며 쉽게 할 수 있는, 안무가 된 일련의 동작들 말이다. '
<가볍게 살고 있습니다> 중
그 때가 되면 지겨움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던 집안일이 우아한 발레처럼 부드럽게 흘러갈 수 있겠지. 완벽히 몸에 익힌 안무처럼 '가볍게' 춤추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