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전 가끔 등산을 갔다. 대부분의 등산이 끌려간 팀 워크숍이나 부서 워크숍이나 본부 워크숍인 거 치고는 선두로 산을 잘 탔다. 그 자신감 덕에 직장 내 친한 동생과 후지산 등반을 계획했다. 일본에서 근무하던 막내 동생과 함께 우리 셋은 호기롭게 후지산 정상을 향해 출발했지만... 근본 없는 고산병으로 그 동네에서 제일 비싼 첫 산장에서 말 그대로 쓰러졌다. 나 없이 올라가는 동생들 걱정은 온몸으로 떠받드는 중력에 이미 땅밑으로 박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다시는 높은 산은 가지 않으리라 결심했건만...
비. 비상식량입니다.
드디어 유럽의 지붕이라 불리는 융프라우로 가기 위해 서둘러 일어나 두꺼운 바지와 패딩점퍼를 꺼내 입고 신발 끈도 단단히 매고 출발했다. 스위스 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곳이다.
융프라우를 가기 전에 라우텐브루넨을 들르기 위해 A열차를 탔다. 한 시간 동안 돌아본 라우텐브루넨은 흐린 날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듯 너무나 선명한 곳이었다. 눈이 녹아 바위틈에서 쏟아져 나오는 폭포, 유럽 마을에 가면 꼭 있는 그런 예쁜 무덤들, 와인과 초콜릿 상점, 풀밭에서 발견한 노란 달팽이 모든 게 아름답고 여유로웠다. 스위스만의 호사를 즐기며 더 머무르고 싶었지만 융프라우를 포기할 수 없기에 톱니기차에 몸을 실었다.
도착 30분 전, 신랑이 가방에서 주섬 주섬 꺼내어 건넨 알약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비아그라. 고산병을 걱정하던 나를 위해 이것저것 알아보고 직접 처방받아온 귀한 약이었다. 먹고 나자 얼굴에 열이 올라 뜨거워지고 으슬으슬한 것도 같고 졸음이 몰려와 30분 동안 꿀잠을 자고 나니 어느새 융프라우에 도착했다.
아. 아쉽지만 여기까지다
잠이 덜 깬 채로 신랑을 따라 휴게실에 자리를 잡고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며 신라면 하나씩 후룹촵촵! 역시 등산엔 라면이 최고다. 맛나고 귀한 음식을 만든 그분께 무한 감사를 드린다. 먹다 보니 비아그라가 확실히 효과가 좋은지 몸이 아무렇지도 않다. 이렇게 훌륭한 약을 미리 알았다면 후지산 정상도 찍었을 텐데 아쉽다.
추운 곳에서 먹는 이 작은 라면 하나가 5일 동안 몸에 축적된 치즈를 다 녹여 버린다는 명언을 남기고 일어서는 신랑을 따라 어디 말로만 듣고 영화에서만 보던 융프라우 보러 밖으로 한번 나가 보자.
이런, 오늘 날씨가 많이 흐리더니 문을 열고 나가자 눈이 온다. 아니, 눈보라가 몰아친다. 점점 거세지는 눈에 어디까지가 산이고, 어디부터가 하늘인지 구분도 안된다. 시력보호를 위해 챙겨 온 선글라스를 소품 삼아 007 제임스본드와 본드걸 빙의돼서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맑은 날의 융프라우는 정말 예쁘다는데 많이 아쉽다. 비아그라까지 처방받아 온 곳인데 이렇게 가야 하다니.많이 아쉬웠지만 맑은 하늘의 융프라우는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니 후손을 위해 덕 좀 쌓아야겠다.
더 이상 눈을 맞기에는 무리가 있어서 실외보다 더 추운 실내로 들어왔다. 융프라우 박물관을 구경하고 또 신나게 사진 찍다가 약효가 떨어지는지 두통이 몰려와 끝까지 못 보고 중간에 나와 내려가는 기차를 탔다. 아직 5알의 비아그라가 남았지만 더 먹고 융프라우를 즐기기엔 눈이 너무 많이 온다.
그. 그럼 그렇지!
차장님이 주는 융프라우 초콜릿 먹고 잠든 신랑 옆에서 여행책을 보다, 아이거 글래쳐에서 내리면 글라이네 샤이덱까지 해발 300m의 하이킹 코스가 있다는 글을 읽었다. 마침 다음 정거장이어서 신랑을 깨워 일단 내렸는데, 많이 내릴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기차가 떠난 역에는 우리외에는 없었다. 날이 많이 흐리고 하늘의 먹구름이 점점 많아지고 둘 뿐이어서 걱정됐지만 돌아갈 수 없으니 일단 가기로 했다.
길이 있는 곳은 길을 따라 눈에 덮인 곳은 흔적을 따라 우리 둘만의 산행을 했다. 융프라우를 제대로 못 보고 약효가 떨어져서 내려와야만 했을 때는 상상도 못 한 길이 내 앞에 펼쳐져 있었다. 만년설이 덮인 산이 내 뒤에 있었다. 이렇게 크고 웅장한 자연 속에 우리가 있었다. 이런 경험을 하는 걸 보면 우린 5대가 덕을 쌓은 거 같다.
눈을 헤치며 좁은 길을 내려올수록 점점 눈 대신 푸른 풀과 간간이 보이는 꽃을 보면서 대략 한 시간 정도 내려서 기차역에 도착했다. 기차역에서 우리 보고 아이거 글래쳐에서 내려서 걸어온 것을 확인하고 좋은 경험 했다며 축하를 해주었다. 우린 누구나 하는, 어디서나 할 수 있는 하이킹이 아닌 우리만의 알프스 하이킹을 했다. 이 코스 추천합니다! 근데 비상식량은 꼭 챙기세요. 배 많이 고파요.
인터라켄 도착하자마자 마트에 들러 저녁거리를 너무 많이 샀고 저걸 다 먹고 자서 다음날 띵띵 부은 얼굴로 일어났지만, 이 또한 즐거운 추억이다.
라. 라뷰
다음 날 기차를 타고 그림같이 예쁜 마을을 보며 그린덴발트에 도착해 휘르스트로 가는 곤돌라를 타러 갔다.
휘르스트 가는 곤돌라를 타러 가는 방법 3가지는 1. 버스로 1분 2. 걸어서 10분 3. 헤매서 30분
중 3번 선택하고 이런 게 여행의 묘미라며 동네를 헤매며 걸어가는데 솔직히 힘들다. 그래도 덕분에 동네 할아버지랑 말은 안 통하지만 인사도 하고, 하늘의 패러글라이더도 보고, 로또샵도 보면서 자유여행의 낭만을 쌓다가 잃어갈 때쯤 숨어있는 곤돌라 하우스를 발견했다. 티켓팅을 하는 사이 만난 중년의 한국인 부부부를 만났다. 휘르스트에서 동양인을 못 봐서 더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융프라우 이야기를 하다 아줌마가 고산병 걱정을 하시길래 비아그라를 하나 드렸다. 이런 귀한 약을 준다고 고마워하는 아저씨가 기억에 남는다. 그 약은 누가 먹었을까?
곤돌라를 타고 도착한 휘르스트 정상에서 보는 모든 것들은 정말 최고였다.
사진으로도 담이낼 수 없었고
어떤 표현으로도 부족하다.
근데 라뷰가 담아낸 내 얼굴의 표정이 말해주는 것 같다.
얼마나 좋았는지
얼마나 행복한지
얼마나 고마운지
얼마나 사랑하는지
내가 알고 있는 것 그 이상으로~~
함께여서 참 좋다♥
2014년 카카오 스토리 기록 발췌.
날씨도 한몫했겠지만 스위스의 방문객 대부분이 가는 융프라우보다 휘르스트가 더 좋았다. 그리고 꼭 다시 오기로 했다. 휘르스트에 다시 와야 하는 더 큰 이유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