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열쇠를 건네주는 건 남자의 역할이니까 기다리고 있으렴."
한복을 맞춘 후, 양가 어머님들과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으며 들은 이야기였다. 이후로 스드메, 예식장, 예물 등의 결혼식 준비가 착착 진행되어 가는 것과는 별개로 집에 대한 말씀이 없다. 집이 구해져야 혼수를 준비할 텐데...
결국 조바심을 견디지 못하고 남자를 닦달하며 못할 말을 한다.
막말 1. 이럴 거면 결혼 안 해!
10월 결혼식인데 한여름이 돼도 집에 대한 이야기가 없으니 급한 성격에 좀이 쑤셔 결국 입이 터졌다.
"도대체 왜 집은 말씀이 없는 거야? 집이 해결이 돼야 혼수를 살 거 아냐? 집 열쇠 주신다고 기다리라고 하셨는데,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야? 우리 집에서 같이 알아볼까? 우리 이러다 신혼여행 끝나고 자기 집에 들어가는 거 아니지? 그러면 나 결혼 안 할 거야!"
우다다다 내뱉고 헤어져 돌아가는 남자의 뒷모습이 짠하다. 그런데! 나도 짜증이 난다. 동생들이 먼저 결혼하고 세 번째 출가지만, 둘째는 같이 돈을 모아 집을 장만했고, 막내는 엄마가 먼저 결혼하는 사람이 살라고 한 집에 들어앉았으니 집과 예단비의 숨은 상관관계에 대해 몰랐어도 너무 몰랐다. 지금이야 예의상 하는 게 예단비라던데, 라떼만 해도 내 주위에서는 남자가 장만하는 집의 10%를 예단비로 보내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그런데 집이 해결되기 전에 떡하니 시세를 따져 예단비를 보내버렸으니 내가 짜증이 안 나면 보살이 아닌가.
막말 2. 우리 엄마를 뭘로 보는 거야!
예단비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봉채라는 것이 있더라.
예단비의 일부를 여자집에 돌려보낸다는데, 당연히 주셨다. 그런데 생각과는 다른 방식으로 보내주셨다. 예단의 예를 찾아보다 알게 된 봉채는 남자 쪽에서 예단을 받고 며칠 후, 여자의 오빠를 통해서 전달하거나 오빠가 없는 경우 신부에게 전달한다고 했다. 그런데 예비 시어머님께서 엄마한테 연락이 오길래 설마 했는데 봉채봉투를 엄마에게 전달하셨다.
지나고 보니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사람 만나서 이야기하는 거 좋아하시는 다정한 성품의 예비 시어머님이셨고, 결혼 전에 자주 뵙고 싶어 하셔서 좋은 기회였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아랫사람에게 돈을 전달하듯이 받았다는 생각에 몹시도 마음이 상했다. 결국 그 화살은 남자에게 돌아갔다.
"도대체 우리 집을 뭘로 보길래 엄마를 불러서 돈을 전달하신 거야? 그럴 거면 예단비도 아빠가 약속 잡고 만나서 전달했지!"
이튿날 신랑도 알아보고 부모님과 이야기를 한 후 사정을 이야기해 줬다. 먼저 결혼한 누이네 시댁에서 그렇게 해서 그러면 되는 건 줄 아셨단다. 성질 좀 죽였어야 했다. 하지만 해결 안 되는 집이 이제는 사면초가집이 될 상황이었다. 이유인즉슨, 엄마가 그날 만나고 돌아오셔서 하신 말씀 때문이었다.
"전세 구해준다는데, 집 사주실 거라고 했다며? 그럴 거면 다 생략하고 집에 보태는 게 나았을 텐데."
알고 보니 집을 사주신다는 말은 남자가 대외비를 누설했을 뿐이었다.
나는 그 길로 꿈과 환상의 나라로 달려갔을 뿐이었다.
그런 흔한 결혼 해프닝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다만 그게 집이었을 뿐이었다.
봉채를 보내는 시기와 방법은,
예단비를 받는 그 자리에서 去來하듯이 예단비 봉투에서 바로 돈을 떼어 신부에게 봉채비로 주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큰 실례이므로 반드시 주의하여야 한다. 시댁에서 따로 준비하여 며칠 후(너무 시일이 오래 걸리지 않는 것이 좋다)에 아들(신랑)을 통해서 보내거나 예비신부를 식사 자리에 별도로 불러서 보내는 것이 좋으며, 보낼 때는 예단비 받을 때와 같이 禮를 갖춰 봉채금액을 적고 韓紙로 만든 봉채 봉투에 봉채비를 넣고 상대 혼주에게 또는 예비신랑이 장인 될 분에게 간단한 글을 쓰고 봉채보자기에 넣어 보내는 것이 모양이 좋다.
- 여기저기 블로그의 동일한 정보를 퍼옴.
벚꽃이 예쁘고 단풍이 예쁘고 볕이 좋던 신혼집
막말 3. 내일 출근해서 주위 한 번 물어봐봐!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친정 근처로 전셋집이 구해졌고 신혼여행 후 들어갈 내 집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무엇보다 예비 시댁보다 친정과 동생들 집이 더 가까운 곳이기에 집안을 채울 가구와 가전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동안 받은 스트레스는 돈을 쓴 덕인지 다시 휘발되며 행복한 예비 신부의 삶만 기다릴 줄 알았다.
집만 해결된 거지 도배, 장판부터 입주 청소까지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이걸 내가 하니, 네가 하니, 우리가 하니, 집주인이 하니 별의별 논쟁의 끝은 "내일 출근해서 주위에 한번 물어봐!"라는 지인찬스지만 사실 '넌 그것도 모르니?'를 내포하고 있었다. 남자 성격에 물어보지도 않을뿐더러, 주위에 대답해 줄 만한 또래 직원은 미혼이고 아줌마 직원들은 나와 비슷한 생각들을 하는 걸 알고 던진 이 말은, 할 때는 몰랐지만 들어보니 진짜 기분이 나쁜데 대답할 말이 없는 못된 말이었다.
반성. 사랑해 그리고 미안해
일련의 과정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약혼자 주말을 가게 되었다. 금요일 저녁에 약혼자 주말 센터에 들어가서 2박 3일 동안 강의와 나눔을 하는 결혼 교리로 무척 기다리던 시간이었지만, 그날도 싸우고 가기 싫어를 온몸으로 내뿜으며 끌려갔는지 끌고 갔는지 우야튼 간 가긴 갔다. 여러 커플 중에 첫 시간에 유일하게 냉기를 품고 있던 커플이 우리였다. 자기소개시간에 성서모임 연수로 만난 커플이라는 소개에 '멋지다' 레이저와 박수를 쏟아지자 순간 이게 뭔가 싶었다. 비신자로 따라온 사람조차도 상대를 생각하며 참여하는데 나는 왜 이렇게 화가 나 있는 거지? 그동안 쌓아놓은 불만과 화가 부끄럽다.
두 번째 강의 후 노트에 불편한 마음을 적고 2박 3일간 나와 상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적고 나누다 보니 결혼 준비 하며 힘들고 힘들게 했던 모든 일이 후회가 됐다. 이렇게 사랑해서 결혼하기로 했는데 너무 상처를 줘서 미안했다. 두 번 다시 할 일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지만, 만약에 다시 이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때는 재고 따지기보다는 이해하고 조율하며 준비하고 싶다는 의견일치도 보았다. 퇴소하며 남은 일주일 동안 서로만 바라보며 잘 지내다가 축복받은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 가서 싸우지 말자고 약속하고 나왔다.
그런데 하필이면 두산이 한국시리즈에 진출할 줄이야...
소중한 노트를 다시 보려니 오글거려 덮었다. 휴지로 전달한 남자의 마음. 니맘 내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