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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순의 곰탕

by 기기도설

1. 정혜


2001년 6월 일요일 오전 11시


입덧을 안 하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라며, 나중에 원망 섞인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사주겠노라고, 짙은 갈색의 싼타페에 정혜의 남편과, 시부모, 시동생까지 다섯 명이 타서는 신림역을 지나 어디론가 달려간다.


막내 시 고모의 산후조리를 해주러 시어머니가 일본에 간 사이 정혜는 차돌박이를 후루룩 구워 기름장에 찍어 일주일째 먹다가, 임신 테스트기의 두 줄을 보고는 첫아이 임신임을 알았다. 사나흘 뒤 시어머니는 국제전화로 꿈을 꾸었다며, 무슨 일은 없는지 물어왔다. 집에 오시면 곰탕을 끓여달라고 정혜는 말했다. 꿈에 복숭아를 보았다는 어머님의 전화소리를 들으면서 곰탕을 연신 말했다.


노포에서 진하게 끓여 낸 곰탕이 먹고 싶다고 며칠째 남편을 조르던 정혜는 초여름 산후조리에 지쳤을 시어머니에게 곰탕을 끓여 내라고 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돈 주고 사 먹는 한적한 시골 같은 분위기가 나는 곳에 온 가족이 모여 곰탕을 먹자고 제안한 것이다.


커피 프림을 타놓은 것인 양, 분유 가루를 탄 것인 양 곰탕의 국물은 뽀얗고 하얗고 진하다. 그냥 맛있다고만 인사치레를 할 뿐, 집에 와서는 시어머니께 추석에 곰탕을 끓여달라고 부탁하면서 정혜는 생각만으로도 이미 침이 고인다.


시어머니 윤순의 곰탕만큼 진하지도 구수하지가 않아!


2. 지혜


네 번째 인공수정은 모두 실패했고 시험관 아기로 이제 첫 번째다. 옆을 봐도 산모이고 지혜는 모유 수유하러 오가는 산모들을 보면서 또 좌절한다.


지혜는 결혼한 지 8년 차이다. 아이를 싫어한 적이 없다. 언니 정혜가 낳은 첫 아들이 이뻐서 고시원에서 공부하다 무력함이 밀려올 때면 큰 조카라 불리는 아기를 보러 신림 고시원에서 수유리까지 엄마 밥이 그리워서 오는 것이라고 하면서도 큰 조카를 만난 신비로움에 마다 않고 달려가곤 하였다.


연애 5년 그리고 결혼 8년까지 남편은 둘이서 살면 된다고 말하였지만, 지혜는 자식 없는 삶을 그려본 적이 없다. 친정엄마를 따라 경동시장 어느 한약방에 들어가 음부에 침을 맞기까지 안 해본 것 없는 전국 팔도 한약방과 산부인과를 계절마다 돌곤 하였다.


주사를 더 꽂을 곳 없는 배와 엉덩이. 몸이 만들어지려면 6개월을 기다려야만 하는 인공수정으로 몇 년을 소진하고, 시험관을 시도했지만, 지혜는 서운함에 알 수 없는 죄책감에 흐르는 눈물을 닦지 못한다.


맞은편 소아병동에 독감으로 입원한 큰 조카로 언니 정혜가 지혜의 입원실을 오가면서도 자매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정혜의 시어머니는 사돈 지혜를 이뻐했다. 상견례를 하던 그날부터 귀엽고 싹싹하다며, 친절한 지혜를 딸처럼 이뻐했다.

큰 손주의 생애 처음 입원으로 먹일 음식을 들려 보내며 사태살을 정성스레 삶아내어 곰탕을 보온 도시락에 고이고이 담아 지혜를 먹이라고 보내었다.

11월 겨울 초입에 맑고 고운 곰탕의 구수함은 병실에 진동하고, 두툼한 사태살은 말캉하면서도 지혜의 서운한 마음에 스며들어 살이 되어 주었다. 무르지 않은 도가니의 살과 어우러져 주삿바늘로 구멍 난 핏자국에도 새살이 올라오듯 지혜의 눈물을 그치게 해주었다.

정혜와 지혜가 십 년이 지나고 또 오 년이 지나서도 겨울이면 이야기하는 따끈한 그 곰탕!



윤순의 곰탕이다.




2024.12.20에 끓인 곰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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