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 도둑

문명은 약인가, 독인가,

by 여목 임재광

문명의 이기는,

인간을 편리하게 만들었지만, 인간을 더 깊게 만들지는 않았다. 생각은 자동완성으로 대체되었고, 판단은 추천 알고리즘에 위탁되었다. 스스로 사유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에서 인간은 점점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라 ‘반응하는 존재’로 퇴행한다.

문제는 편리함 그 자체가 아니라, 그 편리함이 사고의 노동을 제거했다는 데 있다. 기다림 속에서 자라던 사유, 불편함 속에서 다듬어지던 통찰은 이제 불필요한 과정이 되었다.

문명의 이기는,

질문을 줄이고, 답만 남긴다. 감정 또한 황폐해졌다. 감정은 표현되지만 숙성되지 않는다. 공감은 클릭으로 환원되고, 분노는 즉시 배출된다. 느끼지 않아도 ‘느낀 것처럼’ 보이는 시대, 진짜 감정은 설 자리를 잃었다.

이 틈에서 허와 실의 구분은 무너진다. 진실은 느리고, 거짓은 자극적이며, 자극은 언제나 선택된다. 문명의 이기는 중립적인 도구라 말하지만, 그 속도와 구조는 이미 인간의 판단을 유도하고 있다.

문명의 이기는,

약이 아니다. 독도 아니다. 다만, 인간이 스스로를 비워낼 때 그것은 가장 완벽한 지배자가 된다.


생각을 대신해 주는 시대

문명의 이기는 손을 자유롭게 했지만 머리를 쉬게 했다.

생각은 로딩 없이 도착하고

의심은 업데이트되지 않는다.

느낌은 빠르고 감정은 얕다

깊어지기 전에 다음 화면이 열린다

진실은 천천히 걷고

거짓은 속도로 증명된다.

허와 실은 같은 빛을 두르고

우리는 구분할 시간을 잃었다.

문명의 이기여,

너는 묻지 않는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지,

다만 조용히 대신 생각해 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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