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연습
내겐 잊고 싶지만 아직도 잊히지 않고 남아있는 진한 기억이 있다.
이민 온 후 이듬해 찬바람이 매섭던 겨울 1월 중순의 어느 날. 아내와 나는 가게문을 닫고 퇴근하던 저녁에 8차선의 대로에서 바퀴가 탱크처럼 높은 트럭에 정면충돌로 받히는 대형사고를 당했다. 그때의 끔찍했던 상황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지만 나는 그 순간 죽음으로 걸어가고 있다고 직감하였다. 낯선 땅 대로변에 뉘어져 산 생선 튀듯이 몇 번 그러다가 여기서 생을 마감하는구나 라고...
앰뷸런스의 긴박한 사이렌 소리에 가물거리는데도 나는 계속해서 아내의 상태를 구급대원에게 물었다. "아내는 괜찮다"는 대답을 구급요원에게 들으면서 그제야 세상과 작별하는 순간임에도 안도하며 두 팔을 올리고 죽음에 항복하고 있었다. 나는 머리가 찢어지고 눈가의 살점이 찢어져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채 병원으로 실려갔지만 다행히 생명에는 아무런 지장 없었다.
그때 죽음이 이미 내게로 찾아왔다고 체념하면서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집에 홀로 남아있는 고2 딸이었다. "나와 아내가 함께 떠나면 홀로 남은 열여덟 살 딸은 어쩌란 말인가, 제발 아내만이라도 살아서 딸과 함께 살아야 할 텐데..."라는 안타까움으로 의식 무의식 중에서도 아내의 안부를 물으며 아내와 딸의 생각으로 죽음이 내게 다가오는 공포 따위는 미처 생각할 수가 없었던 거다.
죽음... 찰나 순간에 죽음이란 것을 맞이하였지만 신기하게도 공포는 없었다. 다만 사랑하던 가족에게 못 다해 준 사랑 그리고 이제부터는 그들이 스스로 감내해야 하는 삶에 무게 그런 것들이 떠나는 내 발목을 붙잡았다.
엊그제, 오랜만에 날씨가 화창하던 오전에 카메라를 메고 동내를 여기저기 기웃거리는데 핸드폰이 띠암 띠암 울렸다.
여보세요? 임 선생님이시지요?
네, 그런데요...
저는 문인협회 김 00입니다.
아~네, 안녕하세요?
저.... J 선생님 남편이 돌아갔는데 내일이 장례식인데 모르고 계실 것 같아서 알려드리려고요...
누... 누.. 누구요? J... J00 선생님 남편이라고 하셨나요?
네... 갑자기.. 지난주에 병원에서 진단을 받았는데 암세포가 온몸에 퍼져 6일 정도밖에 살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대요. 그 진단받고 이틀 후에 돌아갔셨답니다. 어제 그제.. 그래 낼이 장례식이라고 해서....
아니.. 어떻게 멀쩡하게 건강하던 분이 이틀 만에...
그러게요, 글쎄......
나는 전화기를 끄지도 않고 그냥 멍하니 들고 있었다. J선생은 문학활동을 하면서 특별히 가깝게 지내던 분이다. 그 남편은 바보스러울 정도로 착하고 또 퉁퉁하게 건강해 보이던 분으로 나도 잘 아는 교회 집사님이었다.
죽음... 어느 날 예고도 없이 갑자기 또는 긴 예고로 오랫동안 가슴을 쥐어짜게 하며 서서히 찾아와서 사랑하던 사람을 사랑하던 이들로부터 송두리째 낙 야채 가버린다. 누구도 에외없이...
다음 날 장례식장엘 갔다. 가족과 교인 그리고 문학 활동하던 회원들과 몇몇의 친구들이 검 은정장을 입고 앉아있었다. 여기저기서 눈물을 몰래 훔치느라 훌쩍거리는 소리가 간간히 들렸다. 고인을 전송하는 예배가 진행되고 찬송가가 숙연하게 장례식장을 가득히 차고 돌았다.
눈 주위가 퉁퉁부은 J선생의 손을 꼭 잡고 힘내시라고 밖에 할 말이 없었다. 슬픔이 극에 달 하면 눈물도 안 나온다 하지만 그동안 쏟은 눈물로 더 이상 나올 눈물도 없을 텐데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그를 보고 나도 함께 울었다. 장례예배가 끝나고 다과를 하며 아는 이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우리는 돌아가신 분의 얘기에서 자연스럽게 일상의 화제로 돌아갔다. 사진은 어떻게 해야 잘 찍는가부터 요즘 글은 안 쓰시는가, 장사는 잘되는가 등등.. 잡다구니한 얘기까지.... 우울한 마음을 떨치지 못하고 장례식장을 나와 가게문을 열고 나도 본연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손님이 오길래 반갑게 웃으면서 맞이하고 친구에게서 전화가 오길래 한참을 수다를 떨고... 반나절도 채 지나지 않아 그분이 떠났다는 슬펐던 순간은 내 기억에서 이미 하얗게 씻겨져 내려가고 내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세상은 어제와 다름없이 분주하고 시끄럽게 돌아간다. 길을 걷다가 나도 모르게 발 밑에 개미 한 마리가 밟혀 죽은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기억은 잊어야만 빈자리에 또 다른 기억을 담을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