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MA 중동현대미술전 《고향》전 리뷰 #2,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관.
테러와 분열의 땅으로 익숙한 중동의 미술이 서울을 찾았습니다. 이번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이 기획한 세 번째 비서구권 전시로, 미술계의 지역적인 타자로서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중동 현대미술 작가들의 목소리를 담은 작품들을 전시합니다. 전시에 대한 전반적인 인상은 1편을 통하여 다루었습니다. 필요하신 분들을 위하여 링크를 첨부합니다. https://brunch.co.kr/@imsense/9
중동이라는 땅도 낯선데, 중동의 미술이라니요. 어렵진 않을까, 지루하진 않을까, 다 이해할 수 있을까, 전시를 보기 전 질문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이 있다면, 이번 전시는 우리가 생각하는 중동이 아닌, 중동 작가들이 직접 이야기하는 중동에 관하여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것입니다. 그간 다양한 미디어들에 의하여 접했던 중동과, 그들의 목소리로 듣는 중동은 어떻게 또 얼마나 다를까요. 이번 글에서는 필자의 기억 속에 각인된 작품들을 위주로 살펴보며, 작가들이 전하는 중동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고자 합니다.
먼저 살펴볼 작품은 라이드 이브라힘(Raed Ibrahim)의 캔버스 작품들입니다. 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는 이브라힘의 작품들은 2009년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멈춤 STOP>을 미술관 버전으로 새롭게 구성한 것입니다. 이브라힘은 기존에 사용하던 도로교통 표지판의 이미지에 변형을 가하여 그가 속한 사회의 질서나 고정관념에 의문을 던집니다.
표지판은 행동을 조정하고 통제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행동에 개입한다는 것은 곧 힘, 곧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이브라힘의 작품을 마주하면, 도대체 '누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지시를 내리며 권력을 행사하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책 읽는 소녀(girl is reading)>(2019)를 살펴봅시다. 금지를 뜻하는 빨간 삼각형 안에는 독서를 하고 있는 한 소녀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읽는 행위는 계몽의 역사에서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가장 중요한 행위입니다. 따라서 이슬람 사회에서 여성이 ‘읽는다’는 곳 눈을 뜨는 것을 의미할 것이며, 이는 남성 중심적 사회를 단단하게 지탱하고 있는 부조리하고 편협한 지식 체계를 뒤흔들만한 위협의 여지가 있음을 의미할 것입니다.
작품 속 표지판은 소녀가 책을 읽는 행위를 금기시하고자 하는 이슬람 기득권층의 욕망을 투영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하여 이브라힘은 역설적으로 여성들의 진보를 가로막고자 하는 이슬람 사회에 비판을 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살펴볼 작품은 아흘람 시블리(Ahlam Shibli)의 <점거(Occupation)> 연작입니다.
<점거> 연작은 이스라엘 식민 정권과 시온주의적 사상을 가진 유대인 정착민들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주거지를 점거한 이후 마을의 변화상을 보여줍니다. 저는 이 작품이 정말로 마음에 들었습니다. 만약 아무 설명 없이 이 사진들을 마주한다면, 이 작품은 “중동적인” 분위기를 뿜어내는 '감성적인' 사진들로 보일 수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아이들의 천진한 모습, 거리 곳곳에 새겨진 그림 같은 아랍어와 히브리어, 그리고 사진 전반적으로 ‘중동’을 연상시키는 색감은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일상 사진을 연상케 합니다. 그러나 사진 옆에 기록된 설명을 읽은 뒤 사진을 다시 본다면, 시블리의 사진은 다른 의미로 읽히기 시작합니다.
알 라마 산에서 본 풍경을 찍은 이 사진은 우리에게 익숙한 팔레스타인 혹은 이스라엘의 풍경입니다. 촘촘히 붙어 있는 사각형 모양의 베이지색 집들과 곳곳에 자리 잡은 상점들의 모습은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활기 로운 거리의 모습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곳은 팔레스타인 국민들이 자유롭게 오고 가며 물건을 거래하던 알 슈하다 거리입니다.
그러나 현재 이곳은 이스라엘 군의 검문소가 설치되어 허가된 소수의 팔레스타인 사람만이 지나갈 수 있습니다. 통과가 허용된 자들도 매년 허가를 다시 받아야만 이곳을 드나들 수 있습니다.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향하던 거리, 집에서 기다릴 아이들을 생각하며 서둘러 걸음을 옮기곤 했던 그 일상의 거리가 허가 없이는 다닐 수 없는 땅이 된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그들은 서류를 제출하고 통행증을 얻기까지 보장되지 않은 몇 개월의 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허가가 된다 하더라도, 많은 이들이 유랑민 신세로 전락하기 일쑤입니다. 이스라엘 군과 정착민들의 지속적으로 이 곳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억압하고, 알 슈하다 거리에 있는 팔레스타인 상점들을 폐쇄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수많은 팔레스타인 국민들은 집과 일터가 있던 삶의 터전을 버리고 타지로 떠도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겉보기에 평화로워 보이는 사진 속 장소는 알고 보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겪었던 억압과 폭력의 역사의 기록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곳입니다.
아이들이 천진하게 웃고 있는 이 사진의 배경은 팔레스타인 사람에게는 봉쇄되어 있는 거리입니다. 현재는 이스라엘의 정착민들만 운전해서 다닐 수 있는 도로가 되어 버린 이 곳은 이스라엘 군에 의하여 콘크리트 블록, 철제 구조물, 드럼통 등으로 전부 봉쇄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곳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 지역 곳곳이 이런 식의 봉쇄로 몸살을 앓고 있다고 합니다.
사진을 스치듯 본다면 저 아이들의 웃음 뒤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좀처럼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아이들의 두 뺨에 패인 보조개와 천진한 미소 뒤에는 가족과 재산을 잃고 매일 반복되던 일상을 잃은 자들의 설움이 묻어 있습니다. 작가는 건조하고 무심하게 팔레스타인 마을과 사람들과 그들의 일상을 사진으로 담아내어, 그들의 삶 깊은 곳까지 드리우고 있는 폭력의 그늘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을 방문했을 때, 마을 곳곳을 다닐만한 시간이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필자는 관광객이었고, 마을 곳곳에 묻어있는 점거의 흔적들을 다 읽어낼 수 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따라서 팔레스타인 거리를 거닐며 서울과 다른 풍경에 감탄하고, 마을 곳곳을 사진으로 담아두곤 했습니다. 여행의 날들이 그리울 때면 다시금 그 사진들을 꺼내보기 위하여 말입니다. 물론 거리 곳곳에 남아 있는 긴장과 충돌의 흔적들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었지만, 이국적인 풍경에 매혹되어 있었던 필자에게 그들의 아픔은 좀처럼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홀람 시블리의 <점거>를 마주하고 나서야 저는 제가 방문한 참 많은 곳이 일상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투쟁의 터이자, 일상을 지키지 못하고 살아온 터를 버리고 떠나야만 하는 이들의 슬픔과 분노가 담긴 그들의 고향일 수 있었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국적인 색감과 냄새가 주는 생경함만을 느끼고 돌아왔던 터라, 작품 앞에 선 필자는 지나간 여행이 조금은 부끄럽고, 또 아쉽게만 느껴졌습니다.
필자 개인에게 가장 충격적인 작품을 고르라고 묻는다면, 저는 길게 생각하지 않고 아델 아비딘의 <청소>를 꼽을 것입니다. 이 작품은 중동을 연상시키는 진흙 색 물감으로 뒤덮여 있는 사람들을 ‘씻기는’ 영상입니다. 그런데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씻어내는 행위”는 단순히 우리의 몸을 씻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지저분한 것을 치우는 “청소”에 가깝습니다.
영상 속 백인들은 물감을 뒤덮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물대포를 쏘기 시작합니다. “권력”을 상징하는 제복을 착용한 두 백인 남성은 사람들의 저항을 감지하려는 듯 굳건하게 서 있습니다. (길거리 시위와 물대포 진압을 경험한 필자에게 물대포의 폭력성은 남다르게 다가옵니다.) ‘더러운 사람들’로 상정되는 이들은 속수무책으로 물줄기들 속에 갇힙니다. 백인들은 물대포를 다 쏘고 난 뒤 후 수세미로 그들의 피부를 닦아내기 시작합니다. 물대포가 미처 다 제거하지 못한 얼룩을 세세하게 다 지워내고자 하는 듯합니다. 얼룩으로 뒤뎦여 있던 사람들은 점점 희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차가운 물이 그들의 피부 표면을 거칠게 닦을 때마다 그들의 떨림은 점차 심해집니다. 점점 그들의 등은 굽어가고, 초점은 희미해집니다.
이 작품은 권력을 가진 자들이 역사적 사실과 사상과 사람을 지워내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그들에게 ‘얼룩'은 곧 제거되어야 하는 대상입니다. 그리고 그 얼룩을 지워내는 행위의 폭력성은 합리적인 목적에 의하여 정당화됩니다.
그러나 아이러니 한 점은 그들을 향해 물대포를 쏘고, 수세미로 벅벅 닦아내던 과정에서, 백인들의 옷과 피부 표면에 거뭇거뭇한 얼룩이 묻게 된다는 점입니다. 더불어 흰 바닥도 온통 녹갈색으로 물들게 됩니다. 얼룩을 온전히 제거하고자 하였던 이들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간 듯 합니다. 지나간, 그리고 지금도 진행 중인 탈식민의 역사를 살펴본다면 이 영상이 의미하는 바가 더욱 선명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억압의 역사는 길지만, 그 모든 시도들은 “온전히 성공적”이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억압의 역사의 한편에는 언제나 모든 폭력과 억압적 구조로부터 ‘탈’하고자 하는 움직임의 역사가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아델 아비딘의 <청소>는 특정 인종과 사상을 가진 자들을 향한 폭력을 고발하는 동시에 그 가운데서도 한 줄기 희망을 놓지 않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무니라 알 솔은 ‘위대한 남성과 영웅적인’ 그림에 대한 저항적 표현으로 자수, 제스처, 소규모 출판, 비디오, 페인팅, 퍼포먼스와 설치 등 다양한 형식을 사용하여 작업을 하는 작가입니다. 이번에 서울을 찾은 무니라 알 솔의 작품 역시 재치 있고 가벼운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전시장 바깥 벽면에 걸려 있는 <전 농부들에게 이발만 해드렸을 뿐인데, 그들은 자정까지 일을 하며 제게 호의를 베풀었지요>(2015-)라는 작품은 고향을 떠나온 이웃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자수 드로잉 작품입니다. 원색이 주는 강렬함과 수놓아진 인물들의 유쾌함이 시선을 사로잡는 독특한 작품이었습니다.
<아랍어로 된 갈증의 뉘앙스>는 레바논과 시리아 각지에서 모은 39개의 페트병에 물을 담아 설치한 작품입니다. (서울 전시장에는 일부만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른 오전 시간 전시장을 방문했더니, 페트병을 투과하는 빛이 강하고 선명했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전시장 한켠에 드는 자연광의 아름다운 때문인지, ‘미적'이라는 느낌이 물씬 풍기는 작품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이 말하는 바는 페트병을 통해 비치는 투명하고 맑은 빛과는 상반되는 듯 합니다. 작품은 레바논과 시리아 사이에 있었던 내전을 말하고자 합니다. 내전이 지속되면서 시민들이 깨끗한 물을 공급받을 수 없게 되었고, 물이 부족한 시민들은 물을 태양빛에 직접 소독하여 마시기 시작하였습니다. 전시장에 놓인 페트병들은 거대 국가, 종파와 같은 고래들의 싸움 속에 위협받는 시민들의 일상의 모습을 '페트병'과 '햇빛'을 통하여 비유적으로 고발합니다. 직접적인 비판의 방식을 취하기보다, 시민들의 삶을 한 조각을 도려내어 전시장으로 가져와 아주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방식으로 전쟁을 기억하도록 하는 작품입니다.
이전의 예술과 달리 요즘의 예술은 '당연한 것'에 도전하고, 그에 관한 질문을 유발하며, '당연한 것'으로부터 소외된 분야에 한 관심을 유도하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방식을 '예술'이라는 매개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이번에 열린 중동현대 미술전 《고향》역시 그러한 현대 예술의 특성을 한껏 뽐내는 전시입니다. 전시는 우리가 생각하는 중동에 의문을 제기하고, 과연 중동이라는 어떤 곳인가 생각해보게 합니다. 더불어 대한민국 땅에서 좀처럼 관심을 가지기 어려운 다양한 이슈들을 유머러스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던져줍니다.
전시장과 전시장을 잇는 공간마저도 작품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기 때문에 전시장을 찾는 관람객들은 쉴틈 없이 다양한 작업들과의 만날 수 있습니다. 좋은 전시이나 시립 미술관이라는 특성상 "무료"로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전시도 감상하고, 정문을 따라 펼쳐진 아름다운 정동길도 걸으시고, 맛있는 커피도 한잔 하신다면, 이보다 더 좋은 한해의 시작이 있을까요 :) 전시는 3월까지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