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의 전환은 어려움을 실제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며칠째 잠을 못 자고 있다. 잠을 못 자는 게 사람을 이렇게까지 열 오르게 할 수 있는 일이구나 체감한다. 이유는 간단했다. 다시 회사를 다니기 시작한 언니가 출근과 동시에 코를 골고 이를 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새벽에는 쥐가 쇼핑백을 갉아먹는 줄 알고 깜짝 놀라 깼다. 알고보니 언니가 이를 가는 소리였다.
한 살 터울 연년생 자매인 우리는 내 기억상 거의 모든 집에서 한 방을 썼다. (내가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남동생이 태어났으니.) 개인의 공간이 없는 삶이 이제는 좀 익숙해질 법도 하지만, 여전히 대처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불편함을 마주하면 가슴이 턱 막힌다. 자려고 누울 때면 잠을 잘 자지 못할까 걱정이 앞선다. 새벽에 깨서 언니의 코골이를 잠시라도 멈추기 위해 베개를 들썩거리고 나면, 또 새벽에 깼다는 사실과, 이 새벽에 다시 깨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는 사실에 갑갑함이 느껴진다. 밤이 깊어질수록 눈은 점점 말똥말똥 해진다.
오늘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여 오전 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실제로 잠을 깊이 잘 수 없는 것도 힘들지만, 잠 들지 못할 것을 염려하는 게 더 큰 스트레스다. 해야 할 일을 세어보고, 주말인 내일 오전까지 아이들 시험 보강을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한숨을 쉬었다. 인생이 갑갑하게 느껴진다. 언제쯤 홀로 공간을 쓸 수 있을까. 조용한 곳에 가만히 누워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까. 세상 도처에 있는 모든 부정적인 생각이 한꺼번에 밀려든다.
갑갑한 마음을 추스르기 위하여 테라로사에 커피를 마시러 나왔다. 갓 나온 라떼는 향도 좋고 고소하다. 커피를 마시며 "three goals you have for life"라는 주제로 아이 수업을 준비하던 중 한 영상을 만나게 되었다.
영상에 등장하는 에이미는 건강하고 모험심 많은 젊은이였다. 스무 살이 되던 해 그녀는 자신이 꿈꾸던 삶을 위하여 눈이 오는 많이 내리는 곳으로 이사를 하고, 그곳에서 직업을 얻어 자유와 독립심에 한껏 취해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갑작스럽게 박테리아성 수막염에 걸려 2%의 생존 확률을 선고받은 채 병상에 눕게 되었다. 두 달간 치료로 생명은 건졌으나 한 쪽 청력, 신장, 그리고 두 다리를 잃었다. 한순간에.
그러나 지금 그녀는 장애가 있는 아이들이 스포츠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후원하는 단체의 수장이자, 의족을 신고 세계 보드 대회에 참가하여 금메달을 차지하는 운동선수기도 하다. 그녀는 다시 두 다리가 있는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아이러니할 수 있지만, "NO"라고 대답하고 싶다고 한다. 모든 한계는 사람을 멈추게 하거나, 혹은 그것을 넘어 성장하게 하는데, 자신에게 한계란 후자였기 때문이라고.
영상을 보는 동안 지금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은 나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사람이 행동을 바꾸는 일보다 어려운 게 생각을 바꾸는 일이라는데. 내가 겪는 어려움을 내 인생에 엿을 먹이려는 세상의 음모로 볼 것인가, 다가올 좋은 일에 대한 하나의 스텝으로 볼 것인가. 그것은 (에이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생이라는 책의 저자인 '나'에게 달린 일이니, 나의 선택에 따라 나는 다른 결과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만약 내가 지금 내게 주어진 상황을 '원망'스럽게만 바라본다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나, 이 어려움에 대한 기대와 고마움을 갖는다면 내가 가진 기대만큼의, 혹은 그보다 더 좋은 결과를 마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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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담임 목사님께 방을 같이 쓰는 갑갑함과 어려움을 말씀드린 적이 있다. 늘 그렇듯 묵묵히 듣고 계시더니 그게 그리워질 때가 온다. 하시더라. '그렇게 사는 게 좋았다' 생각하는 때가 올 테니 지금 웃으며 살라는 말씀만 남기고 가셨다. 어려움에 대한 관점을 바꾸고, 지금 웃으며 사는 것. 그것만큼 인생을 아끼는 현명한 방법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