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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미 Mar 18. 2021

매사에 “기준이 높은” 사람들의 심리.

좀처럼 괜찮을 줄 모르는 이들의 마음에선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까.



    오랜만에 쉬는 날이다. 집 근처 서점에 와서 읽고 싶었던 책을 사고 커피를 한 잔 시켰다. 잔뜩 긴장한 채로 오전 회의를 마치고, 점심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회사원이라면,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오전 휴식을 보내고 있다.


    겉보기에 프리랜서의 삶은 큰 문제가 없다. 많은 회사원들의 부러움을 산다. 그러나 이런 프리랜서의 삶을 어렵게 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마음일 것이다. 지금의 쉼을 누리지 못하고 여전히 무언가를 하려고 드는 마음, 혹은 '생산적'이거나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적 마음 말이다.


    나 역시 쉴 때에도 수업을 준비하거나 수업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 한다는 압박에 자주 시달린다. 오늘처럼 쉬어가는 날이 되기 전이면 '내가 쉬어도 되는지'라는 물음들이 무의식 중에 마음을 짓누른다.  독일의 저술가 스베냐 플러스 푈러는 일중독은 강박적인 사랑과 같아서,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다는 느낌 때문에 늘 안달'이며, '일 중독을 겪는 사람의 자아는 그의 능력을 평가하는 사람의 손 안에서 끝없이 불안해한다'라고 했다. 내가 딱 그런 상태가 아닌가.



독일의 저술가 스베냐 플라스 푈러에 따르면  일중독은 "강박적인 사랑"과 같다.


    학생 시절부터 "기준이 높다"는 말은 자주 들었다. 그러나 그런 말을 들 때마다 나는 코웃음을 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내가? 아니야"라고 손사래를 칠 때면 상대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였다.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거나 내가 얼마나 기준이 높은지 열성을 다해 날 설득하려들거나. 최근에도 친하게 지내던 동료 하나가 '너는 기준이 높지'라는 말을 했다. 무심코 던진 그 말이 좀처럼 마음에서 여과되지 않았다. 적절히 소화되고 배설되어야 할 말이 불편스럽게 마음의 통로에 한 구석에 짓눌러 앉은 듯했다.




    우리 집은 다독이고 격려하는 분위기가 일상적이지 않았다. (그런 집이 얼마나 있으랴마는_) 아버지는 지방에서 일을 하셨기 때문에 부모님은 주말부부였다. 아버지가 주중에 일을 하러 가시면 엄마는 드라마에 나올법한 악덕스러운 시어머니를 보필하며 우리 삼 남매를 돌보았다. 집은 언제나 전쟁터였다. 엄마는 악착같이 우리를 키웠다. 아버지는 젊음을 다 바쳐 새끼들을 잘 먹이고자 고군분투했으나, 사업은 기울었다.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자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무심코 던진 그 말이 좀처럼 마음에서 여과되지 않았다. 적절히 소화되고 배설되어야 할 말이 불편스럽게 마음의 통로에 한 구석에 짓눌러 앉은 듯했다.


    학창 시절의 나는 늘 더 잘 해내야 한다고 스스로를 압박했다. 이 정도에 만족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시험 점수와 대학이 나를 결정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나름대로 인정해주는 서울 명문 대학에 입학했다. 학위를 따는 내내 일을 병행하며 돈을 벌었다. 학교에서 만나는 동료들은 늘 '대단하다'라고 했다. 그러나 돌아보면 나는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내가 나에게 하는 말은 늘 '부족하다'였다. 내 무의식이 내게 하는 말을 주로 그런 류의 말이었다. 그렇게 해도 관심받을 수 없어. 인정받으려면 더 높이 올라야만 해. 지금으론 부족해. 너는 부족해.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지금까지 잘 왔고, 앞으로 계속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다른 사람을 위로해왔다. 그러나 정작 나는 나 스스로를 다독일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나를 부러워했다. 나는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나 스스로는 자주 마음이 구멍 난 것 같다고 느꼈다.



내가 나에게 하는 말은 늘 '부족하다'였다. 내 무의식이 내게 하는 말을 주로 그런 류의 말이었다.



    주변에 기준이 높고, 좀처럼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높은 기준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마음' 때문이다. '이렇게까지 살아도 인정받기 어려울 것이라는 마음'은 사람을 중독의 소용돌이로 몰아붙인다. 나는 뛰어난 학생이었고, 장학금도 자주 받았다. 대학원을 다니면서도 무엇하나 빠짐없이 잘 해내고자 했다. '부족하다'는 마음이 메워지질 않아 일과 성취에 매달리며 살아왔다. 스베냐 플러스푈러의 말처럼, 강박적인 사랑을 하는 소녀와 같이.



    악바리로 아 온 세월은 상처를 남긴다. 이렇게까지 살지 않으면  되는 환경을  악물고 지나온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마음의 구멍이 있다. 지금껏 잘해왔어. 여기까지  왔다. 조금  편안하게 지내도 괜찮아. 불안해하지 않아도 괜찮아. 다독이는  한마디 없이 스스로의 생을 부지해온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싶다. 지금까지  왔어.  정도면 충분해_라고.



다독이는 말 한마디 없이 스스로의 생을 부지해온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싶다. 지금까지 잘 왔어. 이 정도면 충분해_라고.







덧붙이며.


이전에는 그런 말들이 '위험한 말'이라는 생각 했다. 사람을 느슨하게 만들 뿐이라고. 경쟁에서 도태되게 할 뿐이라고. 그러나 살아갈수록 사람의 길은 온전히 사람의 노력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닌 듯하다. 예상치 못한 만남의 복, 뜻하지 않게 열린 기회, 전혀 예상하지 않았지만 찾아오는 행운이 노력만큼, 때로는 노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닐까.


무언가를 준비하고, 노력하고, 열심히 산다고 모두가 흔히 말하는 물질적 성공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러니 이 정도면 충분하다. 충분하다. 스스로를 다독이며 걸어가다 보면 어딘가 내가 생각지 못했던 보다 멋진 길 위에 도착한 나를 볼 수 있겠지.






*

사진 출처

https://www.edwardhopper.net

https://www.303galle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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