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이 내게 주고 간, 돈으로 살 수 없는 깨달음의 선물.
생각보다 갇혀(?)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게 되었다. 해외 입국자 자가격리 해제 전 검사에서 양성이 나온 것이다.
해외에 있는 동안 온 가족이 경미하게 아팠다고 했다. 전반적으로 증상이 심하지 않아 재택근무를 하거나 집에서 쉬면서 이 주일을 보냈다고 했는데, 정작 내가 5일 정도 집에서 격리를 한 뒤 시행한 PCR 검사에서 양성 반응이 나온 것이다. (그제야 가족들도 그때 아팠던 그게 코로나였구나, 싶었더랬다.) 이미 가족들은 회복이 되어 슈퍼 항체(!)를 가지게 되었고, 나는 미국에 있는 동안 얻을 기회가 없었던 그놈의 코로나 슈퍼 항체를 가질 기회를 늦게나마 얻게 된 것이었다.
친구에게 양성 판정을 받은 이야기를 하니, 친구는 내가 미국에서 여행을 하는 동안 이미 양성 판정을 받고 생활치료센터에 지냈던 이야기를 했다. 친구는 두 가지 이야기를 했는데, 먼저는 코로나에 걸린 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에 쓸데없이, 비이성적으로 스스로를 탓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로는 굳이 생산적인 일을 하려 들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조언은 예상 밖이었고, 그래서 더 마음에 깊이 남았던 듯싶다.
친구는 기저질환을 이유로 센터에서 격리 치료를 받았다고 했는데, 센터에 들어가자 일주일 동안 '해야 하는 일'이 전혀 없는 낯선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저 푹 쉬면 되는 것을, 쉬질 못하고 뭐라도 생산적인 일을 해내려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흥미롭게도 생활 치료소에서는 어떤 생산적인 일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친구는 그저 있는 그대로 좋아하는 것들을 하며 편안하게, 때로는 무용하게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는데 그 시간들이 그렇게 좋았다고 했다. 더불어 집에 있었다면 어떻게든 생산적인 일, 의미 있는 일을 찾아서 하려고 애를 썼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생활 치료소에서의 시간이 더욱이 값지게 느껴졌다고 했다.
여하튼 나 역시 생산적인 일, 그러니까 돈을 버는 일을 하지 않고 24시간을 살아가야 하는 과제를 일주일간 떠안게 되었다. 게다가 나는 해외에서 귀국 후 일주일 간 자가격리를 하며 여행 기록도 정리하고, 아이들 수업 자료를 만들며 보냈기 때문에, 이제는 정말로 더 해야 할 일이 없는 상태에서 1주일을 더 살아가게 되었다.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압박이 없는 상태에서 지내는 매일은 생각보다 재미있더라. 일단 아침에 눈을 뜨면 상쾌하다. 스트레스가 많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렇게 많은 시간을 잠을 자지 않아도 상쾌한 아침을 맞이할 수 있단 사실을 새삼 깨달아 간다. 오전에는 간단히 운동을 하고, 아침을 먹고, 커피와 빵을 오물거리며 읽고 싶던 책들을 읽는다. 아이들 수업을 위한 책이 아니라 오롯이 나만을 위한 독서 시간을 언제 마지막으로 가졌었는지 가물가물 하다. 쌓여있는 책들을 한 권 한 권 읽어갈수록 내가 이렇게 무용히도 책을 읽는 시간들을 정말 좋아했었지, 라는 생각들이 차츰 든다. 매일 낮잠을 자고, 보고 싶었으나 미뤄두었던 유튜브도 보고, 생각나는 사람들의 근황도 보고 몇몇 이들에겐 용기 내어 연락을 하기도 한다. 저녁이 되면 언니가 퇴근을 하고 집에 온다. 그땐 같이 저녁으로 뭘 먹을지 고민한다.
전혀 생산적이지 않은 하루하루를 지내보니 이전보다 내가 조금씩 회복되고 채워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생산성을 명목으로 나를 소진시키기 바빴던 지난날들에는 느끼기 어려웠던 미묘한 감각들이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이런 생각이 들더라. 사람은 생산적이지 않을 때 가장 생산성 높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참으로 사람은 무언가 멋진 일들을 하기 전 기꺼이 무용함이 주는 안식을 누려야 하도록 설계된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번아웃 상태가 익숙한 현대인들이 놓치고 있는 것이, 어쩌면 이 생산을 가능케 하는 평안과 즐거움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