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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넓은 세상에서 있는 가지가지 사물과 가지가지 인간들의 인생사 중에서 오로지 자신의 것으로만 가질 수 있는 느낌과 사건과 하늘을 가지는 것'
- 공지영
퇴사 후 3개월의 여행을 끝내고 다시 아주 작은 위치로 돌아왔다. 아직 사회생활 중인 아빠는 부쩍 자식 앞에서 꺼내지 않고 묵혀두었던 본인의 지난 과거를 꺼내며 그동안 잘 살아왔었다고 그러니 딸인 내가 사회에서 당당하고 논리적으로 부끄럼 없이 잘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말을 걸어왔다.
나이를 먹고 회사 생활을 하고 보니 아빠라는 존재를 조금 더 사회적으로 받아들이고 공감할 수 있게 되어서인지 나 또한 아빠의 말에 더 이상 딸이 아닌 사람 대 사람, 어른 대 어른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내가 회사를 그만둔다고 했을 때에도 혼자 여행을 떠난다고 했을 때에도 회사로 다시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지금의 상황에서도 아빠는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고 했다. 알아서 잘 살겠지라는 말에는 그간의 나를 지켜보며 생긴 믿음도 있었겠지만 이제는 자식을 벗어나 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기분이라 그 무엇보다 감사했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아빠로 인해 스물일곱이라는 나이가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과욕스럽지도 않고 소심하지도 않은 숫자, 그래서 지금 스물일곱의 시간에 할 수밖에 없는 일을 해보려 펜을 샀다.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열심히 공부하겠다며 필기구를 하나씩 샀었던 그때와 같이. 새로운 펜 하나로 신선해졌다. 아직 다듬어진 잉크가 아니라 어색하지만 익어가는 시간만큼 작업이 늘어가겠지 싶다.
그리고 월요일 아침, 바로 책을 만드는 작업에 들어갔다. 종이를 자르고 바느질을 하느라 팔이 아프고 손가락이 쑤시는데도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고 지치지 않는다. 쉴 때마다 아끼는 부엉이 컵에 물을 가득 담아 심장이 울릴 대마다 목으로 넘겨주었더니 박동에 맞춰 물이 몸 안에서 강렬하게 흡수된다. 물 한 모금, 숨 한가득 삼켜서 또 시작한다.
am10:59
진정 '나'의 일, 내가 '살아있는' 일을 하게 되면 이렇게 되는구나 싶은 요즘. 정신없이 바쁜데도 뿌듯하고 피로가 몰려와도 나른하게 녹아내리는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