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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트리 Feb 04. 2020

건드리지 마,   마춘기니까

마흔 특집 에세이

 좋은 어느 , 어쩌다 나는 울컥하는 마음을 파란색의 271 버스  뒷자리에 태워 광화문까지 달리게 되었나. 나는 신호가 바뀌는 대로 건너가 광화문의  서점 앞에서 다리 한쪽을 무릎 위에 포개 올린 염상섭  옆에 기대어 앉았다. 슬픔이 아롱아롱하여 떨구지도 삼키지도 못하고 있는데 발꿈치에 어떤 그림자가 기웃거렸다.  무리의 중국인 관광객들이었다. 그들은 동상과 사진을 찍겠으니 비켜달라는 바디랭귀지를 하기 시작했다. , 맘대로  수도 없구나. 관광객의 사진에 대한 집념은 장인 신과 닮았다는 것을 알기에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다고 “커이커이 날름거릴 필요는 없었는데, 본능적으로 알아들었으니 걱정 말라는 리액션까지 하는 . 나의   혀는 눈치도 없고 무게도 없었다. 내가 일어나기도 전에 진작부터  15도가량 수평을 기운  들이대고 있던 카메라의 뷰파인더에서 성큼 빠져주었다.


그리고 또 성큼. 내가 그려온 이상적인 마흔의 빅 픽처로부터도 그런 식으로 빠져나온 것 같았는데...


광화문에 오기 전에 나는 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친구를 붙잡고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답이 나오지 않는 고리타분한 신세한탄을 하고 있었다. 내가 달걀을 깨면 친구는 닭을 이야기하고, 내가 닭을 잡으면 그는 달걀을 이야기했다. 우리의 대화는 뫼비우스의 띠에서 길을 잃고 사십 대의 눈물겨운 인내심을 실험 중이었다.


"나는 이 나이면 성공해 있을 줄 알았다?”

“그게 쉬우냐?”

“꾀 한번 안 부리고 열심히 살았는데 왜 이래?”

“꾀를 안 부린 게 문제라면 문제다?”

“우리 사십 대니까 좀 다르게 살자?”

“그게 마음먹는다고 되는 거였으면 진작 했겠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돼?”

“하던 거 하고 살아야지?”


나는 하고 싶지 않은 것에 이어서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이 더는 나오지 않을 때까지 박박 긁어서 열거하고 묘사했다. 그리고 이것들은 여기에 없고 다 저기에 있는 모양인데, 평생 품어보지 못하고 이대로 늙을 것만 같아서 답답하고 우울하다고 고백했다. 그러자 대화가 지겨워진 친구는 뫼비우스의 띠를 가위로 싹둑 자르듯 말했다.


 그러고 살아.”


왠지 화가 치밀었다. 예전에는 그 말이 위로처럼 들렸는데, 이제는 그만 버티고 항복을 외치라는 소리로 들렸다. 포기를 종용하며 세상에 굴복하자는 말처럼. 그러면서도 ‘나는 달라, 두고 봐!’ 하고 외치며 영화처럼 문을 박차고 뛰쳐나가기엔 내가 남다를 게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웃자고 만났는데 마음을 나눌수록 비참해지는 것을 보니 우리는 둘 다 아주 심각한 상황에 처했구나. 서로가 짠하기 짝이 없었다. 이럴 때 마시는 낮술은 엄한 대목에서 몸과 마음을 후려치므로 우리는 마시기로 했던 술을 마다하고 급히 헤어졌다. 볕 좋은 어느 날, 나는 그렇게 친구와 헤어지고 문득 탁 트인 광장에 가야 할 것만 같아 무작정 버스를 탔던 것이다. 길을 잃어도 잃은 것 같지 않은 어딘가에 있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럴 수 있는 곳이 바로 광화문 사거리였다. ‘다 그러고 사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제 갈 길 가느라 바쁜 곳. 나와 일면식 없는 사람들이 시시각각 교차하는 곳이라면 여기가 제격이었다. 이 자리에서 세종대왕 동상은 십 년째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다 그러고 사는' 백성들을 지켜보고 앉아있다. 그와 같이 한복판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훔쳐보았다. 다들 그렇게 나와 같은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대부분 과녘을 향해 쏘아진 화살처럼 걸었다. 그중에 미소를 지으며 걷는 사람은 보기 드물었지만 아주 가끔씩 있었다. 그런 군중 속에는 내 기분 탓인지 마흔 언저리로 보이는 사람들이 유독 많았다. 약간의 안도를 느끼며 마저 걸었다. 나의 두 발은 김유신의 말이 그랬듯 습관처럼 대형서점 앞으로 향했다. 거기에 소설가 염상섭의 상이 있었다. 전혀 커이 하지 않으면서 중국 관광객들에게 커이커이를 말하기까지 나는 잠시 그의 곁에 기댔던 것이다.

*

*

내게  호환 마마보다, 사춘기보다 아픈 시간이 찾아왔다. 길을 잃고 혼자 있고 싶은 날이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것이다. 잠시 이날에 이르기까지 애쓰고 용쓰던 나를 떠올려보았다.


십 대의 사춘기에는 성장하느라고 몹시 아팠다. 오감을 통해 내 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느라 몸과 마음과 머리가 터질 것 같았으니까. 어느 수업 시간에는 헤겔의 정반합이란 변증법 개념을 배웠던 것 같은데 나는 그것에 매료되었다. 세상의 모든 이치가 정반합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하여 나는 도처에 숨어 있는 모순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모순을 해결해야 하는 사명을 가진 청소년으로 살았다. 불의와 부조리와 부당함에 고개를 들었다. 내 안의 용은 조용히 숨어 몸집을 키우다가 아무래도 보기 흉측한 어른들이 기세를 부리면 참았던 숨을 몰아 불을 뿜어내곤 했다. 어른들은 가끔 그 불에 뎄고 부끄러워했으나, 부끄러운 만큼 실수하기도 했다. 그때는 어른의 자격으로 무력이 횡횡하던 때였다. 그때 나는 세상에 대한 판타지를 잃었지만, 판타지가 빠져나간 공간에는 사유하는 자아가 대신 들어앉았다. 자유를 꺾는데 맛 들인 기성세대와 대치하던 중2는 오랜 시간 내 무의식의 밑바닥에 기생충처럼 붙어살고 있다. (이제 기어 올라오는 일이 잘 없구나.)


20대는 슬라이딩의 시기였다. 대학 도서관의 대리석 바닥을 미끄러져 들어갔다가 미끄러져 나오는 낮과 밤을 보냈다. 그래서 공부를 찰떡같이 했더라면 좋았겠으나 참으로 개떡같이 했다는 후회만 남아 있다. 수학, 과학 빼고는 나만 잘하면 다 잘 될 거라고 생각했던 십 대의 제한적 세계관이 갑자기 확장되면서, 뒤처지지 않으려면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주 절실히 깨달은 시기였다. 공부하고 싶으면 비용을 벌어야 했고, 내가 그 비용을 모으는 동안 누군가는 이미 공부를 마치고 시간도 학점도 더 벌었다. 현실은 냉혹했고 프리미엄을 가진 친구와 같은 처지가 아닌 이상, 같은 이상을 향해 갈 수 없다는 냉혹한 현실과 마주쳤다. 사유하는 자아의 학점은 최고점과 최하점 사이를 마구 슬라이딩했다. 그런 와중에도 정신없이 아파하고 정신없이 놀았으며 정신없이 사랑하고 정신없이 이별하다 정신줄도 놓았다. 그러다 사회에 흘러들어왔다. 사회 초년생의 슬라이딩은 도서관의 두꺼운 대리석 위가 아닌 얄팍한 살얼음 위에서 벌어진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치열해졌다. 그 치열함도 지나고 보니 퍽 아름다웠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그 시절은 제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눈뜬장님의 청춘이었다.


30대는 자력갱생의 힘을 깨닫는 요즘 말로 '겉바속촉'의 시기였다. 경력만큼 자연히 실력도 늘고 적당히 인정받으며, 하기 싫은 것은 거부하고 하고 싶은 것에 집중하는 자주성을 회복했다. 종종 좋고 싫은 것을 과감하게 추구하거나 포기할 수 있었다. 나만의 즐거움을 가꾸고 지킬 정도의 내공이 생겨 쉽게 주눅 들지도 않으며 쉽게 지치지도 않았다. 내 취향을 먹고 자란 자아를 촉촉하게 지키기 위해, 외벽을 단단하고 바삭하게 만들어 세우는 아주 현명하고 잘난 때였다. 강해 보이면서도 유연한 속내도 가진 삼십 대는 예쁘고 건강하다. 30대에는 신통하게도 아끼는 것이 하나쯤 생기는데 그것은 곧 삶의 무기가 된다. 그것은 탄탄한 인맥일 수도, 남들이 원하는 지식일 수도, 재테크로 키운 통장일 수도 있다. 나의 경우에는 천일야화처럼 밤새도록 말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이때만 해도 시간은 아직 내 편이었다.


그런 삼십 대를 졸업하는 순간, 나는 맹렬하게 그림을 그리다가 붓을 탁 놓아버린 화가처럼 무언가를 잃었다. 아무리 마음을 눌러 짜도 의지와 열정은 안에서 굳은 물감처럼 나오지 않았다. 서른아홉과 마흔의 시간이란 게 자로 재고 금을 긋듯 경계가 있는 것도 아니건만, 무엇이 나로 하여금 그 차이와 다름을 이토록 민감하게 느끼도록 하는 것인가. 나이를 먹는 것이 ‘정’인데 나는 그에 ‘반’하여 어떤 ‘합’에 이르려는 것일까. 젊음에 머무르려는 마음과 떠나려는 몸이 부딪혀 모순이 탄생했다. 사회적 나이는 어느덧 중년인데, 사회적 자아는 삼십 대의 그것에서 조금도 크지 않았다. 국가가 정한 청년의 범위에서 성큼 벗어나고 있는데 나는 보편적인 중년의 모습이 아니었다. 대한민국을 넘어 아시아를 강타한 82년생 김지영만큼이나, 미혼의 사각지대에서 겉도는 80년생 아무개쯤은 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친애하는 나 자신을 사각지대에서 구해낼 재간이 없었다. 지금껏 만들어온 나 자신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좋다가, 다시 발부터 머리끝까지 끔찍하게 싫어졌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다시 돌아온 모순의 시기, 마흔. 그리하여 마춘기(마흔의 사춘기라고 하겠다)가 시작됐다.


맹견을 키우는 집 대문에 붙인 개 조심 안내문처럼 이마에 ‘마흔 조심! 물리면 책임 못 짐’이라고 써둬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건드리면 아마 물어버리진 못하고 차라리 울어버리겠지.) 오지 않은 미래와 보내야 할 과거 사이에서 극도로 민감해진 채 으르렁거리는 중이다. 요즘따라 먼저 산 자가 아는 척하면 신경이 사나워지고, 나중 산 자가 아는 척하면 기가 막히더라. 여러모로 참을성이 바닥이 난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그래도 너무 방치되는 건 싫다(어쩌라는 건가?). 그냥 집이 넘어가는 바람에 울며 겨자 먹기로 이사 가는 심정인 사람을 대하듯 달래주었으면 좋겠다. 이제는 묵직한 과천행 4호선을 타야 하는데, 나도 모르게 발랄한 신도림행 2호선 열차를 타는 실수를 할지도 모르니까.


특히 내일이 불투명한 작가들은 이 나이쯤 되면 나처럼 위험에 처한다. 자기 안의 파랑새가 가라는 곳으로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해야 할지 모르니 말이다. 우리들의 파랑새는 보통 돈과 기술이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마흔이 얼마 남지 않은 한 후배는 제빵 제과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고, 마흔을 넘긴 한 선배는 바리스타 자격증을 땄으며, 마흔의 한 동료는 있을 자리를 찾지 못해 고향으로 내려갔다. 들어보니 작가를 하던 그 선배는 번역가로 전향했고, 다른 선배는 중국에 (프로그램 포맷) 보따리 장사를 하러 다니고, 또 다른 선배는 감감무소식으로 생사를 알 수 없다. 하지만 아직 많은 작가가 열악한 상황에서도 방송을 만들고 있다. 즐기지 못할 조건이 즐비한데도. 모험을 좋아하던 사람들이 모험보다 보험을 들고 있다.


건방지게도 중년의 선배들을 사방에 두고 유난을 떨고 있다. 그러니까 다 그러고 산다는 소리나 듣지. 요즘 따라 눈뜨면 벽 보고 한동안 돌아누워 있는 버릇이 생겼다. 미루는 법 없이 자꾸만 먼저 와서 기다리는 아침이 밉다. 더 이상 시간은 내 편이 아니다. 아침을 베어 먹고, 점심을 베어 먹고, 저녁을 베어 문다. 맛이 없어 도로 게워내고 싶은 하루들로 배를 채운다. 나이는 이렇게 먹고 또 먹어, 내일 또 절로 채워진다. 주는 대로 날(日)로 받아먹는 내 모습에 신물이 난다.

스물다섯 살쯤에 내가 상상했던 마흔의 모습은 딱 하나의 이미지였다. 지독하리만치 강한 향수를 온몸에서 풍기면서 매서운 눈빛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는 최고층의 P 버튼을 누르는, 이른바 성공한 여자. 그러나 현실은 모니터 앞에서 백스페이스만 연거푸 누르고 있다.


이게 나야

그 이상과 이 현실의 간극이 커서 아직은 중년의 땅이 낯설다. 발을 딛고 싶지 않은데 중력보다 강한 힘이 발목을 끌어당긴다. 드라마도 사람도 한 시즌이 끝났으면 다음 시즌으로 넘어가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스토리가 등장한다. 주인공이 움직여줘야 다음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이건 제자리만 맴돌고 있으니 나올 게 없다. 나이에 갇히지 않으려면 신속하고 비상하게 살아남아야 한다. 그러는 사이 나는 현실과 꿈, 소유와 무소유, 책임과 자유의 이중 교배로 낳은 이상한 여자가 되어있다. 보통의 사람처럼 '마흔이면 해야 했을 일'이란 목차에 보편적이고 타당하다 여겨지는 것들을 적어놓고 스스로를 재고 있다. 애초에 마흔에 할 것들과 했어야 할 것 따위를 누가 정했단 말인가. 그걸 알면서도 선택의 폭이 좁아지는 길목으로 나를 몰아넣고 있다. 나는 앞으로 무엇이 될까.  

나는 날카로운 칼을 들고 나무토막처럼 굳은 내 앞에 섰다. 지금까지가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반죽해온 시간이라면, 마흔부터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조각해가는 시간이다. 사춘기가 지나갔듯 마춘기 또한 지나갈 것이다. 적어도 쉰내 나는 오십이 되는 것만은 면해야겠다. 지금 믿을 것은 오로지 그것뿐이다. 번복하겠다. 시간은 결국 내 편인지도 모르겠다.


덜컥 먹은 나이의 쓴맛에 불평하느라 하루가 다 갔다. 나라는 노답 인간은 답이 정해진 물음을 계속해서 물었나 보다. 그게 사실은 위로를 요청하는 우문이었음을 나조차도 몰랐다. "다 그러고 살아."가 아니라 “네가 얼마나 멋진데! 기다려 때가 온다."라는 답이 듣고 싶었다는 것을 몰랐다. 그걸 몰라서 진만 뺐다.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그만 일어나 서점으로 향한다. 책을 읽고 집에 가서 밥을 먹자. 조용히 하던 것을 계속하자. 나에게는 삶의 기본조차 다시 모험이다.

가까이 마흔의 고비에 놓인 사람이 있다면 농담으로라도 건드리지 말자. 그들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지뢰니까. 잘못 건드렸다가 죽는 수가 있다.


마흔은 위험하다.

그러나 세상 일은 누가 먼저랄 것 없는 일 투성.

나중 된 자 먼저 된 자 되고,

먼저 된 자 나중 된 자 될 일 많으니,

앞서 있다거나 늦되다고 해서

오만하지도 낙심하지도 말자.


노답_ 지금 내 인생 속도는 40. 가긴 가는 거 맞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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