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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트리 Feb 04. 2020

못 먹는 사과

마흔 특집 에세이

사과의 본질은 무엇일까. 언제 하느냐보다 어떻게 하느냐가 아닐까. 사과는 하는 타이밍도 중요하지만 그 내용이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늦었으면서 내용도 틀린 사과는 최악의 결과를 낳지만, 건네기 적절한 기간을 훨씬 넘기고도 받을 사람의 마음을 깊이 헤아린 사과는 언제나 유효한 법이다. 상처 받은 사람의 마음도 시간의 도움을 받아 점점 누그러지기 때문이다. 뒤늦게라도 마음에 연고를 발라주니 감사히 받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거다. 사람의 생각 시스템은 자기를 기본값으로 프로그래밍되어 있어서 웬만해서는 자기 공식에 넣고 상황을 돌린다는 것. 그러니 나오는 답이 제 각각이다. 그러니 처음부터 내가 맞는 게 맞고, 어쩌다 내가 틀렸다 싶어지면 내가 맞다고 일단은 우기고, 내가 틀렸다는 객관적인 버그를 발견하면 잠시 오류가 나버려 재부팅을 해야 하는 사실에 분개한다. 화가 나는 이유는 자신의 공식이 틀렸다는 사실 때문이다. 뇌가 번거로워진 것이다.(혹자는 이를 위기에 처한 자존심이라고 했다.)


그렇게 화는 쉽게 나지만 사과는 쉽게 할 수 없다. 재부팅해서 미안한 감정까지는 어떻게 코딩해놨는데 그 사실을 출력하기가 오류를 수정하는 일보다 어렵다. 심지어 상대가 사과를 받아주지 않으면 미안한 마음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야속한 마음만 남고 만다(나만 그래?). 그렇지만 사과하는 것조차 미안하여 말을 삼키며 괴로워하는 사람을 보면 용서하는 마음이 쉬이 들고 만다. 목에 걸린 부끄러움을 잡아 꺼내지 못해 컥컥 대던 경험은 누구나 한 번쯤 있으니까. 그래서 용기를 내지 못하고 기꺼이 사라지기를 감수한 사람의 뒷모습은 어쩐지 붙잡아 안아주고 싶어지기까지 한다. (사과는 내 받아먹은 걸로 하겠소, 이렇게.)

사과란 그런 것이다.

담담하고 씩씩한 말로는 차마 전할 수 없어서 빚진 마음을 시간으로 갚아가는 것.

또는 빚진 마음 그 자체.

그것만으로도 사과는 단단해진다.


타이밍을 놓쳤다고 해서 사과할 일이 사라지진 않는다. 기다리는 사람이 지치기 전에 하면 제일 좋은데, 그 타이밍이 적절하다고 해서 모든 사과가 잘 전달되는 것도 아니므로 사과의 온도와 결을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제대로 된 사과는 이렇게 어렵다). 혹시나 언변이 부족하여도 전달이 옳게 되지 못할 것을 염려 말고, 다만 사과의 마음을 진실로 채우는 데 힘을 써야 한다. 관계에 새바람이 불어오길 기다린 것은 사과를 받는 쪽이기 때문에 전해 오는 마음에만 신경을 집중할 것이다.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은 서늘하지만 뜨겁기도 하다. 그래서 마음의 짐을 덜기 위해 문 아래로 밀어 넣는 때늦은 리포트식 사과에는 차게 식어버리고, 진중히 정면으로 두드려 오는 노크식 사과에는 마음이 달아오른다.


지난여름 H로부터 재부팅에 1년이 걸렸던, 아주 때늦은 사과를 받았다. 그는 '별것도 아닌 일로 내가 왜 화를 냈는지 모르겠다'며 사과를 전해왔다. 이렇게 할 거면 하지 말지. 그는 옆을 지키던 소중한 사람을 우습게 만들어놓고 단순하게 '화냈던 일'로 치부해버렸다. 아무리 소통이 가볍고 쉬워진 시대라도 사과마저 가볍게 해치워서는 안 되지 않나. 문자에서는 이것으로 마음의 짐을 덜고 홀가분해지겠다는 발신자의 의도가 느껴졌다. 마무리 인사까지 담긴 사과는 참으로 일방적이었다.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인  뽑기 같은 사과.

사과는 최소한 통화로, 문자는 사과를 위한 통로로 썼다면 어땠을까. 결국 노여운 마음이 들고야 말았다.


[수신인 없음]


나는 답장을 쓸 수 없었다. H의 아픔이 아프고, H의 기쁨이 기뻤던 그때의 나는 사라졌기에 사과를 수신할 사람도 없었다. 그렇게 사과는 반송되었다. 그것이 오랫동안 나 자신보다 더 응원했던 사람과의 마지막 교신이었다.

그래도 묵은 사과를 전하는 사람의 용기를 잊지는 말자고 다짐한다. 중년이 되었지만 용기를 용서로 받지 못하고 말았다. 괜찮아, 난 괜찮은 어른 안 할 거야. 뒤늦은 용서는 나 혼자 해도 될 것 같다는 마음이랄까. 그러면서 내가 꺼낼 사과는 없는지 뒤적이는 중이다.


노답_ 뭐든 있을 때 꺼내 먹자, 아끼다 썩는다.



@applec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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