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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트리 Feb 04. 2020

비교보다 비유를 무기로

마흔 특집 에세이

나와 닮은 남자가 있다. 영화 <괜찮아요, 미스터 브래드>에는 비영리 회사를 운영하는 47세의 브래드가 나온다. 브래드는 하버드 음대에 지원하는 아들과 보스턴으로 가는 길인데, 실버 카드와 할인항공권으로는 좌석 업그레이드를 할 수 없는 일에서 자신의 위치를 절감한다. 실패한 중년의 망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며칠이 펼쳐진다. 그를 그렇게 만든  대학교 동창생들의 ‘잘남이다. 브래드가 젊은 시절 가졌던 이상주의는 성공한 친구들 앞에서 빛깔을 잃고 덧없이 밟히는 낙엽이 되어버렸다. 잘난 친구들의 모임에 초대받지 못한 처지나, 재능 있는 아들 뒷바라지에 대한 걱정으로 잠자리가 뒤숭숭하다.

줄곧 자신과 친구들의 다른 처지를 비교하다가 이런 통찰에 이른다.

“그들을 묶는 끈은 우정이 아니라 성공이다. 날 깜빡했든 일부러 뺐든 별반 다르지 않다. 나는 명단에 없다.”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는다.

“나는 아무도 아니다. 가치 없는 인간.”


붓다가 보리수나무 아래서 참나의 존재가 되며 말한 ‘나는 아무도 아니다’가 아니다. 오디세우스가 외눈박이 거인에게 자신을 ‘아무도 아닌 자’로 알려주어 목숨을 구했던 노바디도 아니다. 브래드의 ‘아무도 자기 파괴적인 자조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비교는 치명적이다. 사람을 장님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에 맛이 들리기 시작하면 자기가 가진 것과 이룬 것을 눈앞에 두고도 보지 못하게 된다. 초조해지기 때문이다. 삼십 대까지는 만회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가 충분해 보였는데, 사십에 입성하면서부터 남의 떡은 영원히 남의 그릇에 담겨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초조함에 좌초되기 십상이다. 초조와 조바심의 덫에 걸린다.

주목을 받는 사람이 되지 못했다고 별거 없는 걸까, 주머니 사정을 걱정한다고 가치가 없는 걸까. 그게 아니란  알지만,  공식에서 어지간히도 벗어날  없다. 자본주의에 인기주의를 덧댄 신을 신고 다니는 이상, 어디를 가든  위에  있을 뿐이다. 디지털 혁명으로 인해  속도는 혼란스러울 정도로 빨라졌다. 사실 내가 대단한 누구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자각을 하는 것은, 보다 깊은 지성의 세계에 가까워졌다는 뜻이지만 현실에서는 그 사실이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풍요로운 지성보다 풍요로운 물성에 집착하느라, 다들 ‘그 무엇’이 되고 싶어 한다.


나는 잠 못 드는 브래드 때문에 덩달아 잠을 못 이루고 있다. 어느덧 아들(의 젊음과 가능성)까지 질투하고 있는 브래드, 친구의 인스타를 보고 있는 브래드, TV에 나온 친구를 질투하는 브래드, 20대의 이상주의 때문에 패배주의에 빠진 브래드, 쪼들리는 경제력에 한숨 나는 브래드, 그 모든 브래드들이  나였다. , 정말이지 나는 비교의 달인이니까. 그러는 나야말로 노바디이자 낫띵이었으니까.


생각해보면 삶은 지금까지 비교의 연속이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비교 당하며 인생을 시작한다. 첫째라면 부모에게 비교되고, 둘째라면 첫째에게 비교되면서. 또래 어머니들이 모여 서로의 아기를 칭찬인 듯 비교하며 친목을 도모하는 현장에서 아기들은 자기 손에 없는 무언가를 다른 아기를 보고 탐지한다. 곧 본능적으로 뺏는 자와 뺏기고 자지러지는 자의 구도가 만들어진다. 비교의 레이스는 그렇게 시작된다. 나보다 잘난 것들은 항상 있다. 그것도 꼭 주변에 있다. 우리는 신에 의해 자신의 결핍을 빠르게 깨닫도록 만들어졌다. 걔는 있고 너는 없는 것을 찾아라! 저주인지 축복인지 모를 이 능력은 일생토록 되풀이된다.

되풀이되는 비교는 진화하려는 인간의 본능이다. 우성이 되어야 살아남는 시스템이 인간을 비교하게 만들었다. 도태에 대한 저항이다. 그런데 모두 도태될 이유가 있을까. 지구에는 고양이도 필요하고 개도 필요한데. 낙타와 펭귄은 다른 건데. 아무도 낙타가 월등하고 펭귄은 후지다고 평가하지 않는다. 우리는 낙타가 등이 굽었다고 해서, 펭귄이 날지 못한다고 해서 업신여기지 않으면서 인간에 한해서만큼은 다른 태도를 보인다. 타인은 물론 자신에게서 모자란 점을 찾아 싫어하는 능력이야말로 월드클래스 아닌가.  


사십 대에 접어들면서 그 어느 때보다 비교를 많이 한 거 같다. 열심히 살았는데 나는 왜 ‘그 무엇’이 되지 않았을까. 방향조차 감이 안 잡히는 사막에서 낙타처럼 걸었는데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모래 위에 남긴 생의 자국도 바람에 속절없이 지워진다. 이러다 흔적도 없는 인간이 될까 봐 두렵다, 저편의 펭귄은 뭐가 그리 잘나서 얼음 위에서 살아남은 것이냐, 식의 독백이 꾸준히 이어졌다.


누구나 그렇듯 나도 특별한 존재가 되길 원했다. 하지만 살면 살수록 내가 얼마나 별 볼 일 없고 뻔한 존재인지만 자각하게 된다. 나의 속물근성, 이기심, 무지와 무능력이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실망스럽다. 운과 주변의 도움으로 능력 이상의 좋은 결과를 얻으면, 자기가 대단하다는 과대망상에 빠질 때가 많다. 게다가 보고 들은 건 많아서 눈만 높다. 그러니 앞에 조금만 장애물이 나타나도 금방 낙심한다. 말만 앞서다가 해보지도 않고 낙심하는 것에 길든다. 불행은 여기서 비롯된다. 좌절하는 습관을 갖고 성공을 꿈꾸게 되는 것이다.

며칠 전에 가치 평가에 찌든 내 본성을 뜯어보려고 읽은 로버트 그린의 저서 <인간 본성의 법칙>에서 다음 문장을 발견했다. 무딘 연필을 들어 강판에 갈듯 여러 번 밑줄을 쳤다.


우리는 누구나 나를 남들과 비교한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영역에서 뛰어난 사람을 보면 긴장감을 느낀다.  
그리고 이때는 누구나 어떤 형태로든 시기심을 느낀다.
이는 우리 본성에 포함된 부분이다. (중략)
하지만 현실적이 되기로 하자.
내 안에서 나를 남과 비교하려는 충동 자체를 제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을 깨닫자.
이것은 사회적 동물로서 우리의 본성에 너무 깊이 배어 있는 부분이다.
대신에 우리가 염원해야 할 사항은 이렇게 자꾸 비교하려는 성향을 서서히
뭔가 긍정적이고 생산적이고 친사회적인 것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친사회적으로 살기라, 요즘 들어 가장 어려운 제안이지만 수락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나는 비교를 멀리하고 비유와 친해지기로 했다. 나의 존엄을 위하여. 이겨내는 습관을 갖기 위하여. 비교는 불행을 낳고, 비유는 다행을 주니까. 적당한 재능과 적당한 끈기를 가진 어중간한 인간이 비교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면 브래드와 나처럼 시름에 잠긴 어른이 되므로.

인간이 뼈를 깎는 고통 없이 변하기는 힘들지만 꽤 노력하는 중이다. 내 안에서 비교가 고개를 내미는 순간 두더지 게임하듯 사정없이 내리치면서. 그리고 가위바위보 게임 같은 비유에 길들여지고 있다. 상대가 주먹일 것 같으면 나는 보자기를 펴는 것이다. 지지 않으려면 약간의 뜸이 필요하다. 아, 생각해보니 가위바위보란 참으로 공명정대하며 존엄의 절정으로 응축된 게임이구나. 보자기에게 먹히는 주먹이 가위에겐 이기고, 가위에게 지는 보자기는 주먹을 이긴다. 삼각으로 이루어진 힘의 균형으로 인해, 무엇이 무엇보다 잘나고 못남이 의미가 없다. 이에 또 비유하자면,  세상에 펭귄보다 잘난 낙타와 낙타보다 못난 펭귄은 없다. 나는 그저 한 마리 낙타요, 그대는 한 마리 펭귄일 뿐. 비교에서 비유로 딱 한 글자만 바꿨을 뿐인데 인생이 조금 편해지는 것 같다.


비유는 오늘을 살아낼 힘을 준다. 나의 영혼은 걸 크러시의 여왕 엘리자베스 1세이며, 덩굴 속에 몸을 숨긴 호박이며, 진주를 만들고 있는 조개이며,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오늘은 이만큼의 비유로 계속 살아보겠다.

와, 나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


노답_ 내일은 나무늘보입니다.


ㅎ ㅔㅔㅔㅔ ㄹ  ㅗㅗㅗ ㅗ ㅇ ㅜㅜㅜ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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