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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트리 Feb 04. 2020

하루살이를 애도하는 법

마흔 특집 에세이

 가족들이 오랜만에 모여 외식을 하러 가는 날이면 나는 조카와 동급이 된다. 딱 6명이 승차하기 좋은 9인승 승합차에 나까지 포함해 8명이 구겨 앉아야 한다. 말이 9인승이지 솔직히 성인의 다리가 들어갈 수 없는 구조이다. 세 명의 조카들이 고작 걸음마하는 수준일 땐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어느새 내 옷을 입어도 무색한 덩치들이 되어버렸다. 그 때문에 한 차로 이동할 때는 가족들 모두가 조금씩 불편을 감수하고 차에 오른다.

 나는 제일 먼저 뒷자리에 오른다. 조카들과 나란히 앉게 되는데, 어쩐지 그 자리는 성인으로서의 실격을 의미하는 것 같다. 일단 운전을 하지 않아서 운전석을 차지할 수 없을뿐더러, 서열상 이모일 뿐 조카들이 받는 관심과 사랑의 급에는 한참 못 미치며, 어른 중에서도 졸병으로서 양보가 필요할 땐 제일 먼저 나서거나 빠져야 하는 입장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가족 외식을 하고 집에 오던 길이었다. 그날도 역시 나는 조카들과 뒷자리에 실렸다. 숨 죽은 배추의 기분으로 앉아 오는데, 차 안에 하루살이 하나가 들어와 시야를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창문에 붙어 요염을 떠는 것이다. 어쩐지 옆에 앉았던 둘째 조카가 이 장면을 빨리 보았으면 해서 말을 걸었다.


"서붕아, 너 이게 뭔지 알아?"

"뭐야, 파리야?"

"얘는 하루살이란 애야. 하루밖에 못 살고 죽어서 이름이 그래."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창문을 힘껏 내리쳤다.


 악. 조카의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이모!  그랬어? 어차피 하루밖에  사는데!!!"


 그 놀란 눈에 야속함이 가득했다. 조카에게  케이크를 들고 가며 괜히 트위스트를 추다가 홀라당 엎어버린 꼴이 됐다. 왠지 익숙한 깨달음이 뒤통수를 쳤다. 물컵에 물이 반밖에  남았네 반이나 남았네의 뻔하디 뻔한 관점의 문제 말이다. 하루밖에  사는 거니까 끝장을 내버린 나는 남은 시간을 지켜주고 싶었던 조카에게 혼나고 말았다.


 손바닥에 붙은 하루살이의 날개에서 내가 보였다.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하루밖에 못 살면 그만 살아도 되나, 지금이 별로면 내일도 별로일 테니 기대할 필요도 없나.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답이 없다. 일을 못 하면 가차 없이 잘라도 되고, 못생기면 괜히 싫어해도 되고, 나랑 다르면 그냥 틀린 거고, 내일이 없으면 오늘 대충 살아도 되는 것이 된다. 노답이라서 노력조차 하지 않게 되는 삶. 반평생이 이러했으니 앞으로 남은 반평생에 마저 더 볼 게 있겠냐는 속단으로 어리석어졌다. 


 하루살이가 사실은 10일까지도 살 수 있다는 말은 조카한테 하지 않았다. 나는 유효기간이 한참 남은 쿠폰을 실수로 삭제해버린 아픔을 느끼면서 잠시 부동자세로 있었다. 정해진 한계가 있어 슬픈 (그래도 내일 갑자기 꿈을 꾸게 될지도 모를) 어떤 존재와 조카의 동심을 함께 죽였다는 생각으로 괴로워졌다. 뒷자리가 아니라 트렁크에 실려 가도 할 말이 없을 지경이었다. 내면이 타격을 입었나 보다.

*

*

 그동안 살면서 여러 번 격을 잃었다.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사놓고는 멍청하게 맨손으로 나가서 아르바이트생에게 불려 왔고, 붐비는 화장실에선 방광의 채근으로 몸을 비틀었고, 아무도 안 보는 줄 알고 이를 옴팡지게 들여다봤는데 건너편 사람이 다 지켜보고 있었고, 푸드코트에서 사레가 들러 남자친구 앞에서 코로 물을 뿜었고, 화가 나면 미처 거르지 못한 욕이 입을 더럽혔다. 이런 일들은 새발의 아니, 하루살이발의 피로구나.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이 떠올랐다.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려고 익살을 떨면서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요조. 인간은 어떻게든 어울리며 살아야 하니까, 그래야만 한다고 여겨지는 대로 살면서 바꿀 의지도 갖지 않고 선택도 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었다. 

  책을 다 읽고 맨 앞장에 '인간은 스스로 자격을 가져야 한다'는 문장을 적어 놓았다. 남이 주는 것이 아닌 내가 주는 격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로. 나이가 들면 어른에게 거저 주어지는 자격이 많다. 돈을 벌 수 있는 것, 번 만큼 맘대로 쓰는 것, 어디 가서 존댓말을 듣는 것, 책임지고 문제 해결을 기대받는 것, 능력껏 집단을 이끄는 것. 그렇지만 이것들이 자기 스스로 주는 자격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원하는 만큼 쉴 자격, 안 하고 싶은 것은 안 할 자격, 싫은 무리와 거리를 둘 자격, 몸에 좋은 것만 먹을 자격, 내가 나를 좋아할 자격 같은 것들 말이다. 이것은 아무도 먼저 주지 않으니까 종합영양제 먹듯 스스로 반드시 챙겨야 한다.  

 그런 자격을 더욱 견고하게 하는 것이 품격인데 이것은 어른이라고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기도 모르게 욕망과 이성을 조율해 아름다움이 몸에 밸 때까지 돌보고 가꿔야 겨우 가질 수 있다. 품격 없이 자격만 주장하는 사람은 꼴이 사납다. 자격과 품격으로 짝지어진 쌍 격을 둘 다 갖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루살이나 인간살이나 사는 게 결코 쉽지 않다.

 

 나는 조카 앞에서 격을 잃었다. 멀리 보지 못한 근시안으로 어른의 자격도, 잔혹하게 드러난 내면의 편견으로 인간의 품격도. 남아있는 나의 내일을 절망스러워한 까닭에 일어난 일이다. 이게 바로 인간실격의 시작이라는데 생각이 미칠 때쯤 차가 주차장에 들어서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내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우리는 다 함께 고기 냄새를 풍기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다행히 엘리베이터 탑승 정원은 10명이었다. 누구 하나 빠짐없이 올라탈 수 있었다. 문이 닫혔다.


 조카는 곧 이 일을 잊었지만 나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날개도 시간도 반 토막 난 하루살이의 가능성을. 어쩌면 나의 가능성을.


노답 _ 인간실격 혹은, 마흔실격
반값이 되고 있는 나의 하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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