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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트리 Feb 04. 2020

섹시하거나  
시시하거나

마흔 특집 에세이 

 여자는 모든 순간이 우아했다. 하얀 리넨을 즐겨 입었는데 어둡게 태운 피부와 어울려 관능적이면서도 건강미가 넘쳤다. 그녀가 머문 자리에는 항상 책과 술이 있었다. 다소 단호한 목소리지만 리듬감이 있어 부드럽게 들렸고, 동작은 날렵하여 보는 눈이 즐거워졌다. 숨을 쉴 때마다 미세하게 오르내리는 몸은 상대방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 같은 박자로 호흡하게 만들었다. 탐스런 머리가 늘어진 모양은 함부로 만질 수 없는 검은 커튼 같아서, 여자에게서 유일하게 우리와 같은 인간미가 느껴지는 부분은 제멋대로 뻗치기를 갈구하는 앞머리뿐이었다. 이상하게 공들이는 법이 없는 앞머리는 며칠 전 여자가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해치운 가위질을 암시했다. 나는 은근히 바람이 불기를 기다렸다. 바람이 불면 도도한 얼굴 위에서 단정한 척 기다리던 잔머리가, 은밀하게 발을 구르는 집시처럼 굴었기 때문이다. 여자가 서 있는 곳에서 레몬 향이 불어왔다.


 이것은 섹시한 나의 모습을 상상하며 쓴 글이다. 그러나 여기, 상큼한 레몬 향이 나는 지적이며 관능적인 여자는 온데간데없고 뚱한 얼굴을 한 무취향의 여자가 머리를 말리고 있다. 그 모습이 꽤 박력 있다. 왼쪽, 오른쪽, 뒤쪽, 앞쪽 한 번씩 흔들어 물기만 대강 털어낸 후 토너, 크림, 선크림을 바르고 5분 만에 속옷과 겉옷까지 일사천리로 몸에 두른다. 무엇을 조합해 걸쳐도 웬만해서는 불협화음이 나지 않도록 속옷부터 신발까지 블랙, 블루, 화이트 톤으로 통일시켜놓았다. 대충 봐도 시시한 차림이다. 일명 스티브 잡스와 마크 저커버그 스타일, 그것이 현실의 나다.

 요즘 내 패션 철학은 단순하다. 입어도 전지현처럼 태가 안 날 거면, 단순하게! 걸쳐도 공효진처럼 신박하지 않을 거면, 심심하게! 대신 센스 하나만 챙기자. 여기서 센스란 까만 옷에 붙은 허연 먼지 정도는 테이프로 굴려 떼주는 정도의 센스를 말하니 부담은 갖지 않는 걸로. 남들 시선에 좀 뻔뻔해진 나는 어릴 때는 상상조차 못 했던 소탈한 여자가 되었다. 소탈함 속에 피어난 관능을 아무도 모른다.


@Alex Katz

 그런 나의 이미지에 반전이 하나 있다. 나는 아주 일찌감치 화장품에 손을 댔다. 유치원 때부터 엄마가 잠깐 아랫집이나 시장에 가면 몰래 화장을 했다. 화장품 뚜껑을 열자마자 쏟아지는 꽃향기나 폭신한 분첩의 질감도 신기하고, 입술에 쓰는 붓이 일단 너무 앙증맞아서 손대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이 재밌는 걸 왜 엄마만 쓰지? 나는 소꿉놀이 세트에 있는 가짜 플라스틱 화장품 세트 대신 진짜를 원했다.

 가끔 집에 메이크업 박스를 들고 방문 판매하는 아줌마가 오시는 날이면 나는 그 직육면체 가방을 빨리 열어보고 싶어서 몸을 비비 꼬았다. 간식 꺼내는 소리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개처럼 어쩔 줄 몰랐다. 그 상태로 엄마와 아줌마가 주고받는 신변잡기를 들으며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기다리는 자에게 신제품 테스트와 메이크업이란 호사가 있나니. 아줌마는 화장해주는 조건으로 노래를 시키기도 했는데, 그 판도라의 박스에서 총천연색 팔레트를 꺼내 준다 생각하니 율동도 절로 나오지 뭔가. 36색 크레파스보다 신기했던 메이크업 팔레트.

 아이섀도 붓이 눈두덩이에 간질간질 닿는 것이 황홀하여 "이쪽 눈은 보라색을 칠해주세요”, “입술은 주황색이요"하고 주문도 참 구체적으로 했다(뭘 안다고). 작업이 끝나고 아줌마가 얼굴 앞에 대준 왕 거울 안에는 홍시처럼 터질 것 같은 공주병 아동이 보였다. 마무리 멘트는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였다.


 어린 나이에 방판의 맛을 알아버린 아동은 그 모습 그대로 초등학생이 되었다. (아마 요즘 태어났더라면 십만 구독의 최연소 뷰티 유튜버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2학년 때 반장이 되고 며칠 후, 담임 선생님은 학급 친구의 병문안 일정을 잡아 알려주셨다. 병문안 가던 날 외출 준비를 다 마치고 음료수 박스도 야무지게 챙겼는데도 시간이 남자, 나는 안방 화장대로 향했다. 화장대 서랍에서 엄마의 베이지색 지문이 묻은 콤팩트가 입을 뻐끔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손가락으로 훑어 볼에 몇 번 두들겨 보고 집을 나섰다. 약간의 분향만 빼면 절대 티가 날리 없었다.

 어떤 친구가 아팠는지 기억나지 않는 병문안을 마치고 돌아오는 택시 안, 선생님이 내 볼을 쓰다듬어 주시다가 놀라 물었다.

 “어쩜 호랑이 얼굴은 이렇게 곱..! 어머, 혹시 뭐 발랐니?”

 “아녜요.”

 나는 몰래 바른 분칠이 발각되자 창피한 나머지 거짓말을 해버렸다.

 “괜찮아, 선생님한테는 말해도 돼.” 선생님은 포기하지 않고 추궁했다.

 “안 발랐어요.” 나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선생님과 헤어져 집에 도착했는데, 기다리던 엄마가 내 얼굴을 요리조리 뜯어보더니 웃었다.

 “엄마 화장품 바르고 갔어?”

 “응.”

 “그런데 왜 선생님한테는 안 발랐다고 했어?”

 “반장인데 나쁜 어린이라고 할까 봐."


 언제나 그랬듯 어른들은 어린이의 알량한 자존심은 신경 쓰지 않는다. 엄마는 모른 척을 해주지도 않았고 혼을 내지도 않았다. 나는 여자 어른이 하는 건 다 멋져 보여서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금지된 것을 소망했고, 엄마의 립스틱을 구경하면 반드시 다시 돌려서 뚜껑을 닫는 어린이답지 않은 조심성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여간 잔망스러웠던 게 아니다.

 이제는 얼굴에 유화를 그린 데도 괜찮은 나이의 지긋한 어른이 되었지만, 정작 나는 화장을 잘하지 않게 되었다. 본의 아니게 페미니즘이 대두된 시대 상황에 맞춰 탈코르셋을 실행 중인 진보주의 여성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화장하지 않은 내 얼굴이 맘에 들어서 안 하는 것이다. 나는 모공 없는 달걀 피부를 가진 것도 아니고, 보정 어플 없이 찍은 셀카에는 눈을 찌르려고 손가락을 드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 년 대부분의 날을 민낯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런 자신감은 나조차도 놀라운 지경인데, 말끔히 나은 줄 알았던 과거의 공주병이 새로운 유형으로 재발한 것 같다.


 이렇게 된 데는 직업 환경에도 이유가 있다. 매일같이 붓는 다리를 주체할 수 없어 양반다리를 하고 올라앉아 대본을 쓰거나, 세수만 하고 겨우 출근했는데 퇴근을 건너뛰고 익일 출근의 상태로 업무를 연이어가는 살인적인 스케줄 등은 나를 경이로운 뷰티월드로부터 떼어놓았다. 이십 대에 만난 <섹스 앤드 더 시티>의 작가 캐리가 휘황찬란한 뉴요커의 옷장을 열어젖히고 화려한 연애를 하다가 창문 앞에서 우아하게 원고를 쓰던 그림과는 판이하게 다른 현실이었다. 그리하여 제대로가 아니면 아예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극단주의자인 나는 ‘꾸밈없이’의 힘을 믿고 탈뷰티를 선택했다. 옷장 앞에서 30분씩 고민하던 시절은 일찍이 끝내버렸다.

 그러나 내게는 분위기라는 게 있다. 그 시절 화장품 박스에서는 나오지 않았던, 상상하는 사람의 분위기. 그것은 내가 가진 유일한 무기인데, 아무도 내가 무장을 했다는 것을 모른다는 점이 재밌는 사실이다. 누가 알아주고 몰라주고는 문제가 아니다. 남의 이목을 따지며 살기에는 그동안 인생을 너무 낭비했으니까. 가진 건 분위기뿐이라고 생각하자 많은 것이 수월해졌다. 매일 같이 신는 파란 운동화가, 7년째 입는 노란색 오리털 파카가 나만의 분위기이며, 어쩌다가 입는 치마가 독보적인 분위기에 일조한다. 유행을 따르지 않으니 무엇을 어떻게 하든 나의 것이 되는 경험을 한다. 내가 가진 생각들도 얼굴에 드러나서 부족함을 신경 쓰는 화려한 멋쟁이보다 멋을 따로 내지 않아도 부족하지 않은 느낌이다. 이것은 자기만의 분위기를 가꾼 사람만 가질 수 있다.

 섹시하려면 시시해질 줄도 알아야 한다. 외모로 드러낸 자유는 강박이지만, 태도에 드러나는 자유는 진짜이다. 그래서인지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시시해 보이는 사람들이 알고보면 섹시한 구석이 많다. 기대하지 않았던 매력이 드러났을 때 효과가 커지는 이치일까. 고급스럽게 차려입은 남자와 이야기하다가 지루해서 죽을 수도 있고, 반면에 대충 입었지만 대화가 잘 이어지는 남자와 이야기하다가 섹시해서 죽을 수도 있다. 섹시한 분위기는 반드시 젊고 잘난 것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멕시코의 누드 비치에서 나는 세계 최고로 섹시한 노부부를 본 적이 있는데, 그들은 탄력이 거의 없는 몸뚱이에 거동도 느렸지만 젊은 커플들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아름다움보다 당당한 섹시 그 자체의 나체였다. 게다가 남을 배려한 자리 선정, 평생 해온 것처럼 눈치 보지 않고 눕는 포즈, 책을 읽다 한 번씩 손을 포개는 것까지 모든 게 자연스러웠다. 그들 옆에서 몸을 사리던 나의 겉과 속은 얼마나 재미없던지. 


 시시한 마흔의 생일을 앞두고 동료 작가 바바라가 빨간 립스틱을 선물했다. 미국으로 출국하는 참에 면세점에서 화장품 하나를 고르라는 것이다. 나는 립스틱 하나를 골랐다.

 "큰 거 고를 줄 알았더니 고작 립스틱이야?"

 "있는 것도 잘 안 바르는데 고작이긴!”

 비록 바르지는 않지만 평소 말린 장밋빛에 대한 취향은 확고했기 때문에, M브랜드의 신상 립스틱을 입술에 발랐는데 바른 건지 만 건지 티도 나지 않았다. 불행히도 침팬지 손바닥 같이 메마른 내 입술은 그걸 받아주지 못한 것이다.

바바라가 크게 실망하여 말했다.

 "호랑아, 이 색깔은 진짜 아니고요. 혈색 도는 걸 바르자.”

 그래서 나와 그녀는 빨간, 그것도 아주 새빨간 립스틱 앞에 가서 섰다. 나는 장난으로 발라보고 90년대 멜로 영화의 주인공을 흉내 낼 셈이었는데 지켜보던 바바라가 결정타를 날렸다.

 "너 이거 바르니까 중경삼림의 그 여자 같은데?"

 "누구였지? 장만옥? 임청하?"

 장만옥이든 임청하든 그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머릿속에서 이미 마마스 앤 파파스의 '캘리포니아 드리밍'이 들려오기 시작했으니까. 겨울날 한참을 걷다 화창한 캘리포니아에 있다면 따뜻할 거라는 노랫말이 입술 위에서 튀어 오르고 있었다. 나와 바바라의 무의식이 통했다.

 ‘이건 무조건 사(줘)야 해.’

 나는 흐느적 춤을 추던 여자의 이름을 끝내 기억해내지 못한 채 비행기에 올랐다. 캘리포니아 공항에 착륙해서야 누군지 생각났다. 그녀의 이름은 왕정문이었다. 공항을 나서기 전에 나는 입술을 한 번 더 발랐다. 그리고 꿈이 이루어질 것 같은 훈훈한 날씨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한동안 빨간 캘리포니아 드림을 입에 물고 지냈다. 그것은 탈뷰티의 중년에 찾아온 화룡점정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서울의 중경삼림 속에서 여전히 빛나고 싶은 소망이었다. 나는 요즘 아주 시시한 계획 하나를 세우고 있다. 인류사에 화려한 흔적은 못 남겨도, 찻잔에 입술자국을 남기는 여자로 살겠다는 것. 슈퍼에 가더라도 핏기 없는 얼굴로 다니지 않겠다는 것. 이런 하찮은 계획에도 나는 가슴이 뛴다. 왜냐, 시시한 것이 가장 섹시하니까.


노답_ 빨간약처럼 바르자, 빨간 립스틱. 그냥 두면 얼굴이 마이 아퐈!




립스틱 짙게 바르고 @Alex Ka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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