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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트리 Feb 29. 2020

동생의 기억법

마흔 특집 에세이

태어났더니 눈 앞에 볼이 빨간 애가 하나 있었다. '언니'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게 엄마, 아빠 다음으로 배워야 하는 단어라고 하였다. 내가 그 세 단어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자유자재로 부를 수 있게 되었을 때, 어쩐지 저항감이 들어서 나는 언니 대신 '니'라고 줄여 부르기 시작했다. 그럴 때면 엄마는 훈계했고 언니는 막 끓기 시작한 주전자처럼 칙칙 달아올랐다.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언니라고 부르면 이유를 불문하고 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세상에 온 순서대로 주어지는 질서와 권리를 뒤죽박죽으로 만들고 싶었는지 모른다. (니가 니가 뭔데.)


우리의 만남은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유치원에 다닐 때 가족 앨범에서 언니가 나를 안고 있는 사진을 발견했다. 나는 뒤에서 내 목을 끌어안고 있는 볼 빨간 아동과 발버둥 치고 있는 아기의 이미지를 충격적으로 해석했다. 사실과는 전혀 상관없이. 충격을 감추지 않고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언니가 나 목 조르고 있는 거야?”

언니는 내가 세상에 나오자마자 날 괴롭힌 게 틀림없었다. 사진은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예상컨대 친절한 표현에 소질 없는 엄마가 나의 등장을 언니에게 자상하게 설명해주었을 가능성은 아주 희박했고, 이로써 언니는 나를 반긴 적이 없다는 확대 해석의 가능성만 커졌다. 그로부터 나는 조금씩 언니를 ‘니’라고 불러도 괜찮을 합리적인 근거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내가 기억하는 첫 번째 근거는 옷장 서랍이었다. 언니는 듣고 싶은 것만 골라 들을 수 있는, 수시로 고막을 열고 닫는 용한 재주를 가진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게 된 일이었다. 우리가 유치원에 다닐 무렵이었다. 옷을 꺼내 입고 묵중한 서랍을 그대로 열어둔 채 놀고 있는 언니에게 엄마가 말했다, 서랍을 닫으라고. 열었으면 닫는 것도 해야 한다고. 뭐든 마무리가 중요한 법이라고. 세 살 짜리도 알아들을 만한 수준의 말이었지만 언니의 고막은 단단하여 뚫리지 않았다. 나는 엄마 목소리가 재차 들릴 때마다 언니가 움직이겠거니 하며 쳐다보았지만 언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방치된 서랍 역시 헤벌쭉 입을 벌린 채 꿈쩍도 않고 갸우뚱 늘어져 있었다. 그 모습이 위태하다고 느낀 나는 가만있지 못하고 나섰다.


“언니, 엄마가 서랍 닫으래!”


언니의 고막은 막강했다. ‘야, 내 고막 방탄 고막이야.’라고 뻐기는 듯 심지어 뒹굴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서랍 한번, 언니 한번, 다시 서랍 한 번을 보았다. 내 안에서 슬슬 낯설고 반갑지 않은 감정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타인에 대한 못마땅함이란 감정이 내게 인사를 해왔다. 점점 조여 오는 가슴을 해방시켜주려면 언니를 쪼아야 했고, 결자해지라고 서랍을 다시 닫는 일은 응당 언니가 해야 할 일이라고 판단했던 나는 크레셴도로 외치기 시작했다.


“서랍 빨리 닫아야 하잖아! 그렇잖아!”

“이따가 한다니까.”

“이따가가 지금이 됐잖아! 그렇잖아!”

“그럼 네가 닫아.”

“니가 했는데 왜 내가 닫아? 그렇잖아!”하는 반문을 끝으로 언니는 내게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한나절이나 늘어진 혀처럼 쑥 빠져있던 서랍은 결국, 해가 질 무렵이 되어서야 기다리다 지친 내가 푹 밀어 넣었다. 왠지 분하고 억울했다. 그것은 앞으로 ‘니’의 존재와 관련해 내 인생에 일어날 수만 개의 억울한 일들 중 하나일 뿐이었으며, 가장 작고 사소한 시작에 불과했다.

*

*

초등학교 1학년 입학식을 하고 혼자  등교하던 날에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 엄마는 언니에게 동생을 데리고 학교에 가라고 했다. 언니는 일부러 신발을 빨리 신어버렸다. 신발 버클을 마저 채우고 있는 나를 기다릴 것처럼 “, 빨리 신어.”라고 하더니 먼저 계단을 내려가버렸다. 벌써 1층에서 언니가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아직 3층을 돌아 내려가고 있었다. 다급한 걸음으로  칸씩 내려가다가 발을 헛디딜 뻔했다. 이것  서러워서 같이  가고 싶은데 엄마가 ‘같이 가라  을 철석같이 지키고 싶었을 뿐이다.

언니를 놓칠세라, 바꿔 말해 학교로 가는 길을 잃을세라 짧은 다리를 재촉했다. 걷기와 달리기의 중간 모드로 언니가 사라진 동선을 열심히 좇았다. 골목을 좌로 우로 꺾자, 눈 앞에 알록달록한 아가방과 크로바와 쓰리세븐과 조다쉬 행렬이 펼쳐지고 있었다. 같은 학교로 등교하는 무리를 만난 것이다. 조금 안심이 되는 순간, 언니의 조다쉬가 눈에 띄었다. 나는 바짝 따라잡으며 조다쉬 옆에 나의 아가방을 나란히 맞추고 말했다.


“엄마가 같이 가랬잖아.”


언니는 대꾸하지 않았고 나와 약간 떨어져서 걸었다. 속으로 집에 가면 엄마한테 일러야지, 하는 생각이 찐득한 고로쇠 수액처럼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상황,  기분 모두  방울도 흘리지 않고 담아두겠어! 그래도 언니를 따라   있어 다행이었다. 골목에서 다른 조다쉬가 튀어나오기 전까진. 언니는  조다쉬를 반갑게 아는 척하더니 나는 안중에 없이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조다쉬  마리가 다그닥다그닥 언덕을 올라 사라져 갔다. (진짜 가니? 갔냐?) 나는  이상 언니를 눈으로도 좇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냉동실 속에 아껴둔 투게더를 언니가   먹어버렸다고 울어봐야 사라진 아이스크림이 돌아오지 않듯, 부지런히 걸어봐야 부질없는 일이었다.  가방 행렬을 따라가다 보면 학교가 나올 것이다, 라는 판단이 내가   있는 최선이었다. 언니의 가방이 조다쉬이고  가방이 아가방인 것처럼 우리의 세계는 이질적이라 합쳐질  없었다. ‘ 대한 근거가 하나 추가됐다.


훗날, 언니가 청소년기 내내 잠꼬대 중에 친구들의 이름을 외쳤다는 사실이 아주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 그래! 친구가 좋아서 그랬던 거지 내가 싫어서가 아니었을 거야. 언니가 갑자기 놀아주지 않자 혼자 노래하다 지친 안나의 마음을 안다. 엘사가 처음부터 안 놀아준 언니였더라면 안나가 문짝에 등을 대고 슬픈 표정을 지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내가 안 그랬던 것처럼.

커가는 동안 우리는 엄마에게서 ‘서로에게 하나밖에 없는 자매’란 말을 누누이 들으며 몸서리를 쳤다. 그렇게 서로 죽일 듯이 흘겨보다가도 가요프로 앞에서는 의외로 죽이 잘 맞았다. 이상은의 ‘담다디’가 강변가요제로 세상에 공개됐을 때 나는 닭다리 과자를 와그작 깨물어 먹고 있었다. 이 센세이셔널한 순간을 나 혼자 볼 수 없어 언니를 불렀다. “빨리 와! 노래가 닭다리 닭다리 닭, 이래!” 우리는 한동안 껑충한 젠더리스 패션의 가수에게 빠져 안방에서 다리를 번갈아 들었다 놨다 했다.


그 당시 한국의 대중가요는 전 국민을 하나로 만드는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우리 자매라고 별 수 없었다. 나는 흥을 주체 못 하는 내적 관종이었는데 언니는 그걸 아주 잘 파악하고 있었다. 나는 신승훈의 ‘미소 속에 비친 그대’나 하수빈의 ‘더 이상 내게 아픔을 남기지 마’, 그리고 사랑해 마지않던 이덕진의 ‘내가 아는 한 가지’ 같은 노래가 나올 때면 가수 뒤에서 샤랄라 무대복을 입고 사부작 거리며 춤추는 무용수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했고, 언니는 신곡이 나오면 레코드점에 가서 악보를 사 왔다. 악보가 나온 날이면 의기투합하듯 언니는 피아노를 치고 나는 그 뒤에서 방을 가로지르는 무아지경의 춤을 췄다. 이별에 슬퍼하는 발레리나가 되었다가 흥을 감당할 수 없어지는 순간이면 바닥을 구르는 과격한 현대무용가로 변신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도 압도적인 예술혼이었다. 언니는 옆구리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고 끝까지 연주를 마쳤다. 그리고 악보를 챙기며 같잖다는 듯이 한 마디 했다.


“야, 숨 쉬어.”


흠칫, 그렇게 나는 춤출 때 숨을 자주 멈춘다는 사실을 언니 덕에 알게 됐다. 그러나 안간힘을 쓰는 나의 몸짓, 그걸 보는 맛에 언니는 악보를 펼쳤다. 그게 내가 아는 한 가지다.


언니는 위험하거나 혹은 대범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아랫집 아줌마가 나를 불러 캐물었다.

“혹시 네가 성적표 태워서 창문 밖으로 버렸니?”

태울 수 있는 종이는 차례 지내고 태우는 지방밖에 모를 때였다. 부모님 사인을 해서 도로 가져가야 하는 성적표를 태울 사람이 누가 있을까. 있었다, 우리 집에.

“보니까 너네 집 성이 쓰여있던데.”


이웃 간에 본인의 자녀가 성적표를 태웠다는 억울한 오명이 돌자 아줌마가 직접 CSI가 되기로 한 것이다. 나의 머릿속에서 베란다로 던져진 성적표에 아가일 패턴의 면 스타킹이 오버랩되었다. 언니는 어릴 적에 종이를 오리다 말고 갑자기 신고 있던 스타킹 무늬를 따라 가위질을 했던 전적이 있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하고 놀라서 쳐다보자 씩 웃으며 구멍을 몇 개 더 뚫었다. 그 당시엔 미처 단어를 몰라서 표현할 수 없었는데 말하자면 ‘와, 진짜 (돌아이)가 나타났다!’라고 확신했던 것 같다. 언니는 스타킹을 베란다 창문 밖으로 내던져버리는 것으로 완전범죄를 꿈꿨다. 하얀 스타킹은 땅바닥을 떨군 뱀의 허물처럼 보였고 며칠 후 엄마에게 발각되었다. 나는 언니의 완전범죄가 이번에도 실패했음을 직감했다.


언니가 격동의 사춘기를 오래 누리는 동안, 나는 빨리 철이 들었다. 그리고 이어 온 나의 사춘기는 아직도 언니에게 주의가 쏠린 나머지 다들 모른 척했다. 별 탈이 없는 줄 알았겠지만 나는 두 번 다시 내재된 흥을 가족 앞에서 꺼내지 않게 되었다.


오빠가 있거나 동생만 있는 친구들은 나도 언니가 있으면 좋겠다, 고 말하곤 했다. 그러면 나는 마른 얼굴을 훔치며 그건 위험한 생각이라고 대꾸했다. 물론 세상에는 서로를 끔찍하게 위하는 형제자매도 많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식탁의 모서리에 위태하게 놓인 감과 귤처럼 따로 놀았다. 언뜻 닮아보였으나 맛도 향도 무척 다른 종자들이었다. 내가 새로 산 옷을 허락없이 입고 나간다거나, 선물 받아 한 번도 쓰지 않은 워크맨을 몰래 가져가서 도둑맞는 등의 일로 나는 결코 다정한 엘사의 동생 안나, 고흐의 동생 테오처럼 될 수 없었다. 언니는 내게 '틀려 먹은' 요주의 인물이었고 영원히 ‘니’가 될 운명이라는데 열 손가락을 걸 수 있었다.

*

*

열 손가락은 그대로 자라 우리는 어른이 되었다. 얼마 전에, 멋모르고 들어 놓은 보험을 재설계해야 할 일이 있었다. 보장성과 가성비를 따져 계산하는데만 벌써 1주일이 지나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생명을 보장하는 문제를 앞에 두고 절절 매고 있으니 사는 게 갑자기 싫어졌다. 메모지에 열 장이 넘도록 계산을 하고 있는데, 이것을 빼자니 저것이 문제고, 저것을 빼자니 이것이 아까웠다. 양팔이 번갈아 들리는 고장 난 인형을 만지는 것처럼 이득과 손실을 따질 수 없었다. 단돈 천 원쯤을 아끼려고 금쪽같은 10시간을 쓰고 있는 멍청한 사람이 되었다. 화가 나고 짜증이 솟구쳤다. 요즘 따라 풀리는 일이 없더니, 보험이 뭐라고 내 바짓 가락을 붙잡고 늘어지나? 보험설계사는 가입금액을 늘려야 한다고 제안했고, 나는 줄이려고 계산을 했다. 보장될 미래보다, 현재가 더 불안했다.


보장 항목은 대체 누가 짓는지 이름도 어려웠다. 의사도 이게 무엇을 보장해준다는 건지 절대 알 수 없을 정도이다. 잠깐 로드샵의 화장품에 빗대보자면 이런 식이다. 달달한 대추 아이섀도, 무화과 파운드케이크, 햇살 두 스푼 스크럽, 하늘을 나는 하마 바다 패치, 설레는 끝 소개팅, 새하얀 백사장, 바다로 잠기는 태양, 키 큰 돌 하르방(웃지 마라, 실제로 있는 제품명이니까) 같은 작명처럼 그 보장 항목이 뜻하는 바를 직관적으로 알 수 없었다.


나는 전투력이 엄청나게 필요한 동시에 능동적인 문제해결력이 필수인 방송일도 여러 번 해냈는데 왜 세상물정에 대해서는 바보같이 구는 걸까. 나는 지퍼도 올릴 줄 모르는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면 패망의 에너지에 쉽게 빠지는 성향의 사람이다.) 급똥을 처리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하다가 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두서없이 펼쳐진 보험약관들을 뒤적이며 횡설수설한 끝에 무너지는 한숨을 쉬었다.


“보험이 너무 어려워서 모르겠어.”

“괜찮으니까 하나씩 천천히 말해봐.”


내가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말투였다. 언니에게 내 말을 들어주는 귀가 있었나, 하는 생각에 짐짓 놀랐다. 주민등록번호를 뺀 나머지 숫자만 보면 뇌가 얼어버리는 나를 위해 언니는 손수 계산기를 두들겨주기 시작했다. (학교 다닐 때 공부는 내가 더 잘했는데 인생은 그렇지가 않았다.) 언니는 언니 집에서, 나는 내 집에서 따로 또 같이 보장내용을 하나씩 묻고 따지기 시작했다. 통화는 1시간을 넘어가고 있었다. 이상하게 지금 너무 다정하지 않나? 너무 믿음직하지 않나? 낯선 기분이 들었다. 형만 한 아우 없다는 속담을 우습게 봤었는데, 우습게 보면 안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괜찮아. 보험사에 궁금한 걸 물어보고, 설명 듣고, 다시 생각하면 돼. 걱정하지 말고.”

언니는 점퍼를 처음 입는 아이한테 지퍼 채우는 법을 가르쳐주듯 말했다. '지퍼 양쪽을 모아, 한쪽 홈에 끼우고, 쟈크를 올려, 그러면 끝. 할만하지?'라고 말하듯이.


갑자기 어린 시절 언니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목격했던 쌍무지개가 떠올랐다. 언니는 스크류바를 좋아했는데 광고에서 본 것처럼 나선형 무늬를 따라 꼭 돌려 먹었고 나는 쌍쌍바를 좋아했는데 매번 똑같은 크기로 분리하는데 실패하면 작은 쪽부터 먼저 먹었다. 언니와 보기 드물게 사이가 좋은 날이면 사분의 일로 떼어진 쪽을 그냥 주기도 했다. 그때 집 앞 베란다 밖으로 내다보던 무지개는 언니와 나, 둘만 아는 마술 같은 기억이 되었다. 가끔 나타나는 무지개를 보는 동안만큼은 우린 사이좋은 자매였다. 아무도 그때 우리가 본 것을 똑같이 말할 수 없다. 무지개가 어디에서 어디까지 이어졌었는지 하늘이 얼마나 오묘한 색이었는지 그 순간에 동네를 둘러싼 공기와 색감이 어땠는지 우리조차 정확히 설명할 수 없다. 그저 함께 목격한 장면을 각자의 기억으로 저장할 수 있을 뿐이다. 틀린 게 아닌 다른 관점으로.  


나는 항상 내가 쌍쌍바의 큰 쪽이라고 생각했다. 잘게 부러지지 않고 크게 살아남은 쪽. 내 생각이 틀렸었는지 모른다. 언니는 이제 세 아이들과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나눠 먹는 엄마가 되었다. 뒤엉킨 기억에도 불구하고 나는 언니가 나를 아끼는 것이 진심이며 사실은 사랑스러운 사람인데 내가 봐주지 않으려 했다고 나를 타일렀다. 나이를 먹은 탓일까, 우리가 죽이 맞을 수도 있다니? 그동안 언니는 혀 짧은 소리로 전화를 걸기도 했고, 나랑 데이트를 하고 싶어도 했다. 조카의 학업으로 상담이 필요하면 문자를 했고, 내가 일할 때는 바쁠까 봐 용건만 말하고 빨리 끊었다. 쌍쌍바의 큰 쪽은 언니였다.


엄마의 핸드폰에 언니는 '듬직한 큰 딸'이라고 저장되어 있다. 나는 '우리의 호프 막내딸'이다. 엄마의 마음이 '호프'가 아닌 ‘귀여운’이었다면 나는 좀 더 심플하게 살 수 있었을까. 그래도 다행인 건 언니가 '듬직한'의 몫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언니 대신 어릴 때부터 나는 스스로 만들어낸 책임감을 떠안고 사느라 버거웠다. 그러나 정작 마흔에 이른 엄마의 호프는 좀처럼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고 몰래 운다. 가끔 폰에 찍힌 내 이름을 볼 때마다 부채의식에 사로잡힌다. 내가 희망을 놓아버리는 동안에도 엄마는 계속 붙들고 있는 것이다. 그런 생각에 다다르면 또 마음이 가빠진다. '듬직'을 차지한 언니 덕에 나는 언제까지나 '호프'로 남을 수 있게 됐다.


언젠가 엄마는 언니의 성미때문에 볼이 맨 나한테 얘기했다.

“사람이 다 다른 거지, 틀린 게 아니야.”

그러고는 TV 홈쇼핑에서 완판 매진 임박을 알리는 상품을 보며 말했다.

“저거 사보니까 보던 거랑 색깔이 아주 틀리더라.”

그거야말로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거라는 말로써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분명 틀렸지만 언어습관이 나랑 좀 다른 거니까.


언니는 조다쉬
나는 쌍쌍바


노답_ 너만 언니 있냐, 나도 언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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