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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트리 Feb 19. 2020

각각술래의 시대

마흔 특집 에세이

오늘도 당신과 나의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 있다. 이제 우리는 누군가의 손을 잡고 뛰는 강강술래 따위는 절대로 할 일이 없을 것이다.


어릴 적 외할머니 집에서 맞은 추석의 밤. 집마다 보름달을 구경하러 나온 아이들이 원을 이룰 수 있을 만큼 모였을 때 누군가 자연스럽게  “강강술래 해야지!”라고 말했다. 그 목소리가 슬리퍼를 끌며 함께 나갔던 엄마였는지 삼촌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성수동의  한 공동주택 마당에 큰 원이 만들어졌다. 서로 모르는 아이들끼리 손을 마주 잡았다. 고학년으로 보이는 언니가 강강~수얼래! 하며  끌기 시작하자, 나와 사촌들도 그 언니를 따라 외치기 시작했다. 가사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강강술래. 딱 그뿐이었다.


회전에 익숙해지자 이상하게 고요한 마음이 찾아왔다. 그러자니 맞잡은 손에 얼마큼 힘을 주었다 뺐는지, 뺐다가 주었는지가 느껴지고 누구의 발이 조금 더 빠르고 느린지가 있었지만 우리는 알아서 조율하고 있었다. 조금씩의 차이는 있었어도 큰 애, 작은 애 모두가 하나의 목소리이자 하나의 속도였다. 누구의 목소리가 더 크게 튀는 법은 없었고, 누구 하나 멈춘 아이도 없었다. 집단의 마법에 빠졌던 걸까. 둥글게 커지는 원에서 각자의 ‘나’는 사라지고 ‘우리’만 있었다. 그 원 안에 있는 이상, 낙오자는 없었다. 우리의 속도가 느린 자를 끌어주고, 우리의 목소리가 작은 목소리를 보완해주었다. 우리의 소원이 그렇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혼자서는 불가능한 집단의 놀이가 강강술래였다.


속도가 느려져 지루해질 때쯤 누군가 “오른쪽으로!”하고 외쳤다. 모두 방향을 바꾸느라 주춤하는 것 같더니, 이내 연결된 힘에 이끌려 금방 자리를 잡았다. 어른들은 소원을 빌라고 알려주었다. 야속하게도 내 머릿속에는 벼가 노랗게 익은 풍년의 그림과 통일이란 글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주입식 교육의 폐해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 법이다).

그렇게 훌륭한 어린이가 된 기분에 감격하며 집에 들어왔던 기억이 난다. 그날 밤, 마당에 나왔던 아이들은 비슷한 마음으로 잠들었을 것이다. 의자 뺏기의 원도, 수건 돌리기의 원도 아닌 거대한 강강술래의 원을 만들어본 어린이가 되었으니까. 달을 구경하던 아이들이 원을 만들고, 어른들이 그 원을 구경하고, 그 모습을 달이 구경하는 그런 달달하고 원만한 밤이었다.


이제 강강술래를 하자고 하면 누가 선뜻 일어날까. 위기감도 벌칙의 재미도 주지 않는 놀이인데. 일제히 도는 것 말고는 짜릿한 목적과 규칙이 없는 놀이를 누가 하려 할까. 목적이야 어떻든 보상이나 쾌락이 없는 단체 활동은 이제는 환영받지 못한다. 다른 사람의 손 대신 핸드폰을 잡고 있는 각각술래의 시대이니까.

방송 촬영 날. 작가, 피디, 카메라팀, 조명팀, 출연자 집단이 모인다. 속으로는 자신의 보상과 성취를 위해 모였지만 궁극적으로 하나의 방송을 위해 합을 맞춰 돌아간다. 그렇게 내가 아는 강강술래의 예술을 구현한다. 시간이 허락하고 준비한 분량만큼의 회전이 끝나면 점조직으로 흩어진다. 마음속으로 다 각각의 구실과 실속을 생각하는 것이다. 계산 없는 날이 없고 계산 없는 방송은 당연히 없다.


고된 촬영을 마치고 단체 사진을 찍지 않는 팀은 이유가 있다. 잠깐의 여유도 없거나, 리더가 사진을  좋아하지 않거나, 팀원들이 리더를 싫어하거나. 나는 사진으로 기록을 남기는 걸 좋아하는데, 요즘 들어 후배들이 사진을 많이 피한다는 게 느껴진다. 사람에 따라서는 날 것의 사진보다는 최상의 모습으로 보정된 앱 사진을 선호하기 때문에, 혹은 먼 훗날 안부도 묻지 않을 사람과의 단체 사진은 불필요하기 때문이란 생각이 엿보여 씁쓸해질 때가 있다. '단체'란 단어는 ‘짜장면으로 통일하라’는 말이 그렇게 되었듯, 어느새 폭력의 의미가 됐다. 개인의 취향 앞에서 단체는 숨을 죽이고 만다. 그렇게 군데군데 빠진 채로 있는 계란 한 판처럼 단체 사진은 불완전해졌다. 때문에 종종 맨 앞으로 달려와 앉는 후배가 있으면 고맙기까지 하다.

*

*

즐거운 단체 사진의 마지막 기억은 고등학교 졸업사진이다.

교복의 시절,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날씨부터 확인했다. 맑고 화창한 날이면 잊지 않고 카메라를 가방에 챙겼다. 사진 놀이는 악한 시간을 버티는 즐거운 강강술래였다.

학교 안에서 우리는 다른 차원을 넘나들었다. 1교시가 끝나서 엎드렸는데 깨어보면 야자시간이었고, 조례가 끝나면 점심 도시락을  폈고, 10분 거리의 매점을 2분 만에 다녀왔고, 7반에 빌려준 교과서는 발이 달린 듯 5반에 가 있기도 했고, 희한하게 매일 날짜는 내 번호 끝자리와 같았고, 분명 양호실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교무실에서 나오는 애도 있었으며, 학기 내내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유일하게 딱 하나 한 것이 자퇴인 애도 있었다. 그런 일들이 맞물려 학교가 돌아갔고, 수업 종소리는 무자비할 만큼 정직한 속도로 다시 돌아왔다. 사진은 그  모든 차원의 흔적이었다.


현상된 사진에는 중간고사로, 기말고사로, 수련회로, 방학으로, 입시가 있는 한 방향으로 돌고 있는 우리가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는 경쟁자였다. 그래도 우리는 서로 지탱하며 낙오와 이탈을 막았다. 손에 손을 잡고 소원을 빌다가 졸업식을 맞았다.

*

*

지금 나는 어떤 손을 잡고 있는 걸까.

처음부터 뜨거운 손도 있고 서늘한 손도 있다. 내 손을 잡은 척만 하고 힘을 뺀 사람도 있고, 나는 놓고 싶은데 꽉 잡고 놔주지 않는 사람도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그렇다. 또 따뜻했던 손이 차갑게 식기도 한다. 각자의 실속이 같은 온도가 아니면 안 되는 시절이니까.


그래서 선배가 될수록 조바심이 난다. 아직 기운이 팔팔한 후배들은 열정만 넘쳐 온도를 조절하는 선배의 마음을 모른다. (그건 말해줘도 모른다. 그냥 아직 모를 때이다.) 그러니까 콧김을 뿜고 힘이 차고 넘치는 후배가 입을 닫으면 마음이 슬퍼진다. 입을 닫은 것은 마음도 닫았다는 뜻이고, 입을 닫은 후배들은 제 발로 뛰지 않고 억지로 끌려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선배들은 후배의 실수를 받아들이며 성장을 돕고 후배들은 선배의 고집을 받아들이며 성장한다. 그것이 일에서의 강강술래 법칙이다.  그래서 후배들의 낙오와 이탈은 선배의 깜냥과 아량에 따라 수습이 되고 선배가 추진력이 떨어졌을 때는 잘 키운 후배의 힘으로 버티기도 한다. 그런데 선배가 낙오하면 어떻게 될까? 선배의 손이 미끄러지면 후배들은 손을 힘주어 잡을까 놓아버릴까. 놔버리고는 놓쳤다고 말하진 않을까.


이제 나는 낙오한 선배가 될까 봐 가끔 두렵다. 능력을 한창 씹어먹을 후배들에게 소고기를 주고 싶은데 고작 스팸을 주게 될까 겁이 난다. 아니, 그마저도 없을까 봐 몹시 떨린다. 그래서 나는 가능한 사진을 많이 찍어두고 싶다. 우리가 우리인 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기 위해. 어느 아침에 눈을 떠 날씨를 확인하고 각각술래를 하는 그들을 찾아, 우리의 힘을 확인하고 싶다. 그들의 손이 식기 전에 민낯이든지 살이 쪘든지, 사진을 싫어하든지 좋아하든지, 나에게 친근감을 느끼든지 거리감을 느끼든지 상관없이 무언가 따뜻한 장면을 한 장 남기고 싶다.

강강술래가 그리운 달의 마음으로.


노답_ 지구는 둥글고 지구인은 모났고. 







불타는 강강술래. 혼란하다 혼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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