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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트리 Feb 13. 2020

남의 결혼행진곡

마흔 특집 에세이

나는 결혼식을 싫어하는 사람이다. 결혼식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도 딱히 없겠지만, 나는 이상하게 결혼식장에 가면 마음이 언짢다. 언니가 결혼할 때도 결혼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매의 눈물이라든가, 이제 한 침대를 쓸 일이 없을 거라는 허전함에 짠해진다든가 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날, 언니는 아침부터 웃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나는 당시의 남자 친구와 조용히 앞줄에 앉아, 연애하며 먹고 마신 것들로 인해 웨딩드레스가 꽉 끼면서도 즐거워 어쩔 줄 모르는 언니를 구경하고 있었다. 나도 속으로는 웃고 있었다. 속 태우는 사고뭉치를 더 이상 집에서 안 봐도 된다니 결혼식이 그래서 경사라고 하는구나, 하는 마음으로.


약간은 안 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남들은 결혼식 때문에 관리까지 받으며 없는 살도 빼는데, 언니는 무슨 생각으로 대충대충인 걸까. 언니가 입은 드레스는 예식장에서 옵션으로 준 서너 가지 중에서 그나마 내가 최선을 다해 골라준 것이었다. 또 신부화장은 언니의 인물을 보기 좋게 버려놨는데, 정작 언니는 자기가 부은 얼굴로 왔기에 불평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사과를 과도로 깎아먹기가 귀찮아서 껍질째 먹는 언니를 생각하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깎을 필요가 없는 과일을 좋아하여 귤만 먹느라 일 년 내내 손바닥이 노란 인간 아닌가.


태어날 때부터 우리 자매는 워낙 다른 노선을 걷고 있었기 때문에 내게 언니의 결혼식은 마치 홍보물을 보고 찾아가게 된 대형 마트 이벤트 같았다. 주최 측의 정성을 봐서 참여는 하되, 딱히 내 바구니에 담을 건 없는 이벤트. 그러나 결혼식의 볼거리는 풍부했다. 하이라이트는 응원단이던 언니의 동기들이 무한궤도의 노래에 각 맞춘 응원쇼였지만, 일단 시작은 언니와 형부가 천장에서 내려오는 두레박쇼였다.


이것이 무슨 코미디인고. 전구를 백 개쯤 달아놓은 리프트가 너무 눈이 부셔서 누가 신랑인지 신부인지 볼 수도 없었다. 리프트에서 내린 언니는 버진 로드로 향하면서 연신 웃느라 얼굴이 찢어질 것 같았다.

따다다단 따다다단 따다다딴다다 딴다다단!

기다리는 형부 얼굴을 보며 왜 내가 미안해지던지. 결혼행진곡이 울리자, 드레스 아래로 언니의 감춰진 팔자걸음이 나아가기 시작했다(잘 가, 오지마). 그 뒤태를 보며 나는 언니가 망칠 뻔했던 남의 결혼식을 잠시 떠올렸다.

*

*

대학생 시절에 나는 선배의 소개로 웨딩홀에서 주말 아르바이트를 했다. 주된 업무는 홀 매니저 같은 일이었다. 예식장을 준비하고 정리하는 일로, 신랑 신부 부모에게 식의 진행순서를 안내하고 촛불 점화 리허설을 하고 후반부에 이르면 샴페인을 따서 신랑 신부에게 따라주었다. 가끔가다 하객들 앞에서 터져버린 샴페인 뚜껑에 맞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결혼식 반주를 책임지던 선배가 예비군 훈련이 잡혔다며 대타를 찾았다. 나는 한때 피아노 신동으로 불리던 언니에게 대타를 권유했다.


“할 수 있겠어? 피아노 안 친지 오래됐는데.”

“6학년 때 내가 외삼촌 반주한 거 모르냐?”

“아는데 남의 결혼식 망치지 말고 연습 해.”

“몇 시까지 가면 돼?”

“토요일 2시, 늦지 말고 와.”


언니는 어릴 때부터 결혼식이며 성가대 피아노 반주를 도맡아 했으니 괜찮겠지. 그러나 주말이 가까워질수록 언니가 피아노 뚜껑을 열어보지도 않았다에 예비 신랑 신부의 축의금 전부를 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저 내가 안 볼 때 연습했을 거라고 믿는 수밖에 없었다.  


조마조마한 토요일 당일, 신부는 카메라 메모리 카드가 터질 만큼의 사진을 다 찍었고 홀도 완벽히 준비됐으며, 양가의 어머니들은 촛불 점화를 세 번 씩이나 연습했다. 오로지 사회자만이 내리꽂는 조명 아래서 식은땀을 흘리며 멘트를 연습하고 있었다.   사회자의 땀이 점점 식어갈 수록 내 손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신부 측에선 이렇게 시작이 여유로운 예식장은 처음 본다는 말이 들려왔고, 신랑 측에선 배고픈 하객들이 식권만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식사를 먼저 할까, 조금 더 기다릴까 고민하는 얼굴들. 성미 급해보이는 어르신 하나가 입을 열랑말랑 하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언니가 사연 있는 여자처럼 맹렬한 팔자걸음으로 뛰어들어왔다. 나는 한시가 급했던 터라 성질부릴 새도 없이 언니를 피아노 앞에 앉혔다. 드디어 기다리던 결혼식이 진행되었다. 신랑은 정신 없는 사이 어느새 주례 앞에 서 있었다. 사회자가 노래방 습관인지 마이크를 입술에 붙이고 멘트를 쳤다.

“박수로 축하해주십시오, 여러분. 신부 입장!”


딴따다돤-! 딴따다돤!! 똰똬다똰따돠딴똬돠단!


응? 나뭇가지 위에 새가 앉듯이 아주 사뿐히 건반을 두드려야 하지 않나, 바그너의 결혼행진곡은? 딸을 떠나보내기가 아쉬워 가급적이면 천천히 연주되길 바랐을 신부 아버지와 우아하게 걷고 싶었을 신부의 걸음은 건반과 같이 힘차게 두들겨 맞았다. 언니가 거친 숨을 달래지 못하고 시작한 탓이었다. 신부는 라 쿠카라차의 전진하는 병정이 되어 한달음에 주례 앞으로 왔다. 나는 이마를 세게 치며 언니의 등을 노려보았다.

‘끝나고 가만 두지 않겠어.’

 

마지막 연주인 멘델스존의 축혼 행진곡이 남았다. 나는 이제는 마이크를 먹고 있는 사회자 뒤에서 언니의 등을 주시했다. 이번엔 좀 잘하자, 하는 텔레파시를 전하고 있었다. 아니면 이따 샴페인을 따다가 뚜껑에 나 스스로 이마를 갖다 대리라. 언니가 슬쩍 돌아보았다. 우리는 하객들을 가로질러 눈이 마주쳤다.

내 거친 생각과 불안한 느낌과 그걸 지켜보는 너. 그건 아마도 원수 같은 자매.

둘 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어 쏘아만 보았다. 눈을 부라리자 언니가 등을 돌렸다. 어깨를 한껏 끌어올린 언니의 손가락이 마침내 건반에 닿으며...


따,다다,단! 따다다다단 따다다,뙁! 따다다똬앙!  


노래방에 삑사리 고음이 있다면 결혼식에는 삑사리 연주가 있다. 손가락 힘을 조절하지 못한 언니는 결혼생활의 리얼리티를 상징하듯, 우르르꽝꽝 천둥번개를 내려주었다. 신랑 신부는 아까 그 병정들을 다시 불러 퇴진하듯 결혼식을 마쳤다. 그날 나는 샴페인 뚜껑을 이마쪽으로 조준했으나 김이 먼저 빠져있던 샴페인은 터지지 않았고 그것이 그 결혼식의 유일한 다행이었다. 내가 남은 정리를 하는 사이, 언니는 자신의 피아노 연주만큼이나 빠른 번개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

*

언니의 결혼식을 시작으로 많은 결혼식들이 내게 노크를 해왔다. 당시, 방송국에서 막내작가의 경조사는 가장 마지막 순서를 차지했으므로 나는 꽤 친한 친구의 결혼식에도 쉽게 갈 수 없었다. 녹화가 끝나면 그들은 이미 신혼여행지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영화를 보고 있었다. 나는 누군가의 결혼식에 참석할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잊고 지냈다. 주말 녹화라는 사실이 처음에는 불참의 명백한 이유였으나 날이 갈수록  합리적인 사유로 변질됐다. 일정이 다른 프로그램을 맡게 되었어도, 대외적으로는 주말녹화 딱지를 붙였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다.


그새 나는 비교적 운신이 자유로운 위치가 되어 있었다. 나의 안녕을 묻지 않던 작가 선배들도 디지털 청첩장은 꼭 보냈고, 안 친한 동료와 매니저도 청첩장을 주고 갔으며, 어느덧 후배들도 하나씩 청첩장을 내밀었다. 청첩장이란 건 묘했다. 받아도, 안 받아도 찜찜한 것이 부채의식 아니면 서운함으로의 초대장 같았다. 그 와중에 디지털 청첩장을 반드시 보내고 마는 사람들도 늘었다. 나는 축하도 디지털로 해주고 싶었지만 인습이라 부를 수 밖에 없는 어떤 힘에 굴복하며, 은행에 들러 현금을 뽑아 봉투에 넣고 축하말을 써서 결혼식장을 찾아가는 아날로그적 수고를 하며 밥도 먹지 않고 돌아왔다.

 

결혼식장의 식당 또한 부담스러운 장소였다. 친한 사람들 안 친한 사람들, 끼리끼리 앉아서 방송가 가십을 뷔페 접시보다 높이 쌓아가는 틈 속에 오래 있을 자신이 없었다.

“넌 요즘 뭐해?”

모 작가가 예의상 묻더니 듣지도 않고 다른 말을 꺼낸다.

“그래서 그 후배랑 그 선배랑 대판 했대!”

다른 모 작가가 이어 간다.

“그 피디 때문에 빡친 작가가 한 둘이 아니라던데.”

좁은 바닥 아니랄까 봐 연결고리를 찾아낸 또 다른 모 작가가 덧붙인다.  

“그 팀에 걔 있잖아, 걔가 호박씨를 그렇게 깐대.”

“배우 A가  촬영 전날 펑크 낸 거 알아?”

“미친 거 아냐?”


청첩장의 효력은 거기까지 였다. 결혼식장에 나를 묶어두기 위해서는 더 강력한 것이 필요하지만, 남의 결혼식에 그런 건 없었다. 그건 이름도 얼굴도 모를 내 신랑 아니고서는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방송국 놈들(!)은 대외적으로 -가족과 애인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도 많아 이렇게 모이기만 하면 입이 바쁘다. 나는  같은  방송국 놈이면서 같은 업종 종사자들을 대하는 넉살과 관심이 턱없이 부족했다. 결혼식장은 지체 말고 빠져나오는 게 제 맛인 장소가 됐다. 아주 배고플 때만 빼고.

*

*

나의 친구 W는 지극히 일반적인 직장인이며, 일반적인 월급을 받고, 일반적인 문화생활을 하며, 일반적으로 매력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일반적이지 않은 조건 때문에 혼수상태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녀의 목을 조르고 있는 하나는 결혼이었다.

W는 동료와 후배들의 청첩장을 받고 속이 뒤틀려 가는 중이었다. 들은 바로는 회사에서 청첩장이 월간지처럼 달마다 돌아온다고 했다. 자기만 돌릴 청첩장이 없는 것이 부끄럽다 못해 수치스럽다는 것이다.

보다 못한 내가 바보 같은 소리를 했다.

“비밀리에 결혼한 척하는 건 어때?”

“아니, 청첩장이 중요한 건데.”

“말이냐 방귀냐, 청첩장은 결혼의 상징일 뿐이야. 돈만 내면 찍어주는 그 종이 따위!”

“그 상징이 필요해. 내가 그걸 언제 내밀지 다들 내기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올해도, 내년에도 나만 무소식일 게 미치도록 겁이 나.”

친구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친구를 이상한 패배의식에 빠뜨린 채 놔둘 수 없었다.


“너 내가 제일 좋아하는 언니들이 누군지 알아?”

“누군데?”

“최화정, 이영자, 이소라, 엄정화, 송은이 언니들.  그 언니들이 정말 멋있지 않니? 결혼은 안중에 없이 사시는 분들이라고. 우리가 그 뒤를 잇는다는 긍지를 가져라.”

“그럼 이영애, 김희선 언니는 안 멋있는 거야?”

나는 약간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 그 언니들은 다른 축에 계신 분들이고...”


친구들 중 가장 마지막까지 혼자일 것 같다는 불안에 빠진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 대미를 장식하는 건 꼭 내가 하겠다는 이상한 약속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조수석에서 조용히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내가 월간 청첩장 사태가 일어나는 회사에 다니지 않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이 자리에 내가 아니라 남자가 앉아 있어야 하는 건데! 결혼이 대체 뭐라고 멀쩡한 여자를 바보로 만드는 건지! 이런 것들.


친구가 가진 그 다양한 일반적인 조건조차 없는 나는 결혼이 체감상 여전히 먼 곳에 있는 것 같다. 결혼은 내가 언젠가 갈지도 몰라서 구글맵에 찍어둔 별표 같은 것이지, 빨리 뛰어가 바통을 잡아 채야하는 계주가 아니다. 게다가 그 별은 더블 클릭 한 번으로 금방 취소 할 수도 있는 걸.

*

*

엄친아 중의 하나가 늦은 장가 소식을 전해왔다. 하얀 청첩장이 엄마의 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얼굴도 모르는 엄친아와 엄친딸들의 수많은 결혼식에 다녀오던 엄마는 한 번도 내게 결혼 스트레스를 준 적이 없었다. 엄마는 “능력이 되면 혼자 살라.”는 진보적인 멘트를 던졌다, 한 십 년 전에. 십 년 전의 의견이 혹시나 바뀌었는지 차마 물어보지 못하고, 심지어 내가 능력이 안 되는 바람에 혼자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말도 솔직히 꺼내지 못하고 엄마 등에 대고 선포했다.


“엄마, 난 결혼식 안 할 거야.”

엄마가 돌아보며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

“뭐? 결혼식이 너 때문에 하는 건 줄 알아?”

내가 대답했다.

“나 때문이 아니라면 더욱 할 필요가 없지.”

“얘가 지금 무슨 소릴 하고 있어! 다닌 게 얼마나 많은데.”

“그럼 이제부터 가지 마셔. 난 안 할 거니까 그런 줄로만 알아.”


나는 변치 않을 서약을 하듯 단호했으나 엄마는 나를 무시하고 텔레비전을 시청하기 시작했다. 못 말리는 애라는 것도 알지만, 말리기도 귀찮다는 표정이었다. 평소에도 혼자 결정하고 뜬금없이 통보하는 내 성미를 아주 잘 아는 엄마였다. 그러나 엄마와 내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일단은 내가 결혼식을 같이 올릴 사람이 없다는 가장 중요한 사실 말이다.


마흔의 덫에 걸린 싱글로서 솔직히 나보다 젊은 사람들의 결혼식에 가는 일이 마냥 반가운 일은 아니다. 이런 내 생각과는 상관없이 혼기가 찬 지인들의 결혼식은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무작위로 벌어지고 있다. 좀 전에도 전화가 왔다. 나는 혼잣말을 한다.

“난 긴급재난 문자만 받는다.”

아닌 게 아니라, SNS에서 막 상견례를 마친 사진을 올린 사람의 번호였다.


어쨌거나 축하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불현듯 나는 무슨 일로 축하받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축하받은 지 너무 오래되어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축하받을 일이 거의 없는 인생이었다. 눈곱을 떼면서 나 혹시 잘못 살아왔나, 진지하게 생각 중이다. 사람들은 어쩌면 축하를 받고 싶어서, 인생에 축하받을 일이 별로 없어서 결혼하는 건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결혼은 그 사람이 밉든 싫든 축하를 해야만 하는 일방적인 행사니까. 나도 모르게 그저 축하가 받고 싶어 결혼해야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다. 아마, 아빠가 가장 안심할 만한 생각일 텐데…


사람들의 기준으로는 축하받을 것이 없어 좀 서러운 나는, 결혼이 아니어도 정말 축하받고 싶다. 결혼행진곡 말고 마흔 행진곡을 틀어놓고 씩씩하게 걷고 싶다. 주례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어떠한 경우라도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며, 행복의 도리를 다 할 것을 맹세합니까?”

"네!"

나는 이어지는 모든 질문에 ‘네’라고 대답할 것이다. 축하를 받아야 하니까.

“여러분께서 방금 모든 맹세를 같이 들으셨습니다. 이에 주례는 이 축하식이 원만하게 이루어졌음을 선언합니다.”

사람들의 박수갈채가 쏟아져 나오면 나는 버진 로드가 아닌 마흔 로드를 걸을 것이다. 그리고 언니가 건반 위로 천둥번개를 부리더라도 개의치(노려보지) 않을 것이다.

*

*

몇몇 얼굴들이 “우리들에게는 ‘남의 결혼식’이 될 너의 결혼식은 어떤 건데?”하고 묻는 모습이 떠오른다. 안 한다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날마저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서점에 가서 성혼선언문 대신 베스트셀러를 읽어대진 않을 것이다. 오래전에 상상한 나의 결혼식을 털어놓자면 대략 이렇다. 현장에서 지켜보는 느낌으로 상상해주길 바란다.


장소는 카리브해, 투명한 바다 위.

바다를 배경으로 별의별 포즈를 취하고 있는 남자와 여자가 있다.

반은 벌거숭이가 되어서 되지도 않는 점프샷을 하다가 결국 호흡이 안 맞아서 포기한다.

괜히 모히또를 한 잔씩 들고 시커멓게 탄 손을 클로즈업해서 찰칵,

엄지발가락에 포커스를 맞춘 물그림자 사진을 찰칵,

지나가는 돌고래 떼에 광분하여 못생겨진 얼굴을 찰칵.

몇 장의 사진들을 봉투에 넣어 나를 아끼는 사람에게 국제우편으로 통보할 계획이다.


노답_ 축하는 디지털로 할게요?


물 때 못 맞추면 길 안 열린다. (지금은 만조로구나...)


모세의 기적보다 어려운 나의 버진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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