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트리 Feb 12. 2020

델마와 루이스의 엔딩

마흔의 우정을 지키는 법

  그 애의 첫인상은 청국장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지독한 향수가 부어진 청국장 냄새였다. 나는 새 학년의 낯선 분위기에 적응하면서 며칠 째 등교를 꾸역꾸역 하던 참이었는데, 그날따라 교실에는 도무지 적응하기 힘든 냄새 분자가 흥건했다. 아침자습도 전에 이게 무슨 시련인가 하며 사물함으로 책을 꺼내러 갔다. 교실 뒷문이 열릴 때마다 사물함 앞을 지키고 섰던 애가 기계처럼 입을 열었다.

  “나 때문이야, 오늘 아침에 청국장 먹고 왔어.”

  코를 찌르는 냄새보다 생소한 단어 ‘청국장’에 꽂혀 책을 꺼내다 말고 옆을 돌아보았다.

  “청국장이 뭐야?”

  나는 새로 출시된 문제집 이름을 묻듯 그 애에게 다가가 성큼 코를 박았다. 교복에 쏟고 온 것도 아니고 단지 먹고 왔을 뿐인데 이런 신기한 냄새가 나는 것이 정녕 음식인가, 하여 마약 탐지견처럼 킁킁거렸다. 세상엔 내가 모르는 게 너무 많구나. 우리 집 식단에는 청국장이 한 번도 오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도 (요즘은 없어서 못 먹는) 청국장의 존재를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부지런한 자백에 맛 들였던 아이는 청국장을 모르는 사람을 본 게 더 신기했는지 오두방정을 떨었다.

  “너 청국장 몰라? 된장 같은 거!”


  눈으로 보지 않은 것은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그리기 힘든 것이고, 먹지 않은 것은 온갖 음식을 상상해도 맛이 나지 않는 것이다. 그 정체불명의 청국장에 대해 듣느라고 자습 시간이 다 가버렸다. 그래서 그게 이런 야리꾸리한 냄새가 나는 거냐 했더니 실은 남고, 여고, 예고, 중학교의 학생들이 등교하며 한 길에서 만나게 되는 우리 학교의 지리적 특성상, 냄새 테러범으로 지목되는 것이 두려워 교복에 향수를 어마어마하게 뿌렸단다. 덧붙여 총 4개교의 학생들을 괴롭게 만든 건 엄마의 ‘한 입만 먹고 가’ 때문이라며 얼굴을 붉혔다. 한국 토종음식과 영국 향수의 조합이라니. 그중 하나만 했어도 파급력은 왕성했을 텐데. 어떤 농밀하고도 창의적인 융합은 상황을 나아지게 하기보다 악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우리 반 모두가 그 날 뼈저리게 체험했다.

  그날부터 그 애한테 조금씩 정이 갔다. 사실, 청국장 먹고 온 애와 청국장 모르는 애가 베프가 될 확률은 문과반 학생이 이과반으로 이전할 확률만큼도 안 됐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애와 나는 성격, 성적, 친구 유형, 관심사까지 뭐 하나 비슷한 구석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치 청국장과 버버리 우먼처럼. (대충 분위기로만 보자면 내가 청국장이고 친구가 버버리 우먼이다.)


  그런데 그 확률 계산이 틀렸던 것은 내가 수포자였던 문과생이었기 때문일까. 신기하게도 우리는 낭랑 18세부터 마흔에 이르는 지금까지 베프의 길을 달리고 있다. 그사이 달라진 게 있다면 친구는 일찍 결혼했고 나는 여전히 미혼이며, 결과적으로 친구의 결혼은 먼저 먹다가 체한 음식과도 같아서 우리는 체기를 진정시키느라 몇 년째 함께 고민 중이었다는 것.

  밥 한 끼 먹자고 만날 때마다 우리는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두 마리의 원숭이가 되어 서로를 보듬는다. 먼저, 사회에서 만난 친구끼리는 절대 가질 수 없는 온도로 새치를 뽑아 모아준다. 머리 사이에 고랑을 만들어 누비는 친구의 손가락을 느끼며 나른한 행복감에 빠지는 것이다. 숱이 너무 많다는 핀잔을 들으면서. 손바닥에 모아진 새치를 꼬집어 흔들어 보인다. 뽑힌 새치의 수로 우정의 무게를 가늠하기도 한다. 뒤통수 위에서 없어, 아무리 찾아도 없어. 라는 말을 듣고나서야 못 이긴 척 머리를 든다. 머리가 다 뽑힐지언정 철지난 우정을 그렇게 확인한다.

 '날 이만큼이나 아끼는구나.'

  그리고 이내 몸을 일으켜 내일에 쫓기는 바쁜 얼굴이 된다. 뜬금없이 중간부터 말해도 철석같이 알아듣는 무수한 이야기를 나눈다. 쫓아오며 괴롭히는 사람들은 구역질이 나고, 돈은 떨어져 가고,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는 줄 알았는데 도로 번호만 바뀌고 있는 현실에 대하여. 도로는 20이었다가 30이 되었다가, 막 40번 도로에 진입한 참인데 우리 어쩌지? 하면서.


  나는 이런 우리의 모습을 영화 <델마와 루이스(1991)>에 비유하곤 했다. 짧은 여행을 떠난 두 여자가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고 멕시코로 도망치려는 이야기 속에서 1966년형의 민트색 선더버드는 아름다운 두 여자를 싣고 애리조나 주의 먼지 날리는 사막 도로를 정처 없이 질주한다. 페미니즘 때문에 언급되는 영화였지만 나는 색감과 미장센에 끌린 나머지 이런 풍경에선 도망도 예술이네, 두 여자 중에 나는 루이스 쪽이겠네 하면서 반해버렸고 꽤 오래전부터 그녀들을 응원했다.

  영화는 끝내 두 여자가 추락하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앞은 절벽, 뒤는 경찰. 진퇴양난의 위기 속에서 운명을 같이하기로 한 두 사람은 절벽 밖으로 날아오른다. 그 절박한 우정은 정지된 비상으로 박제된다. 내가 본 엔딩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슬프고 짜릿해서 여러모로 복합적인 기분이 들게 하는 장면이다. 예수와 사탄, 제우스와 하데스를 동시에 만난 것 같달까. 나는 그 엔딩을 일종의 계시로 여겨 카톡 프로필로 삼았었다. 그 행위는 나와 친구의 지속 가능한 우정을 암시하는 동시에, 너와 나의 비상구는 ‘비상’하는 것뿐이라는 희망을 표현한 것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연료였다.

나는 너의 루이스, 너는 나의 델마.


@Thelma and Louise


  그런데 그게 나만의 생각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은 얼마 전이다.

  마흔의 도로를 달리는 동안 친구는 비밀이 많아진 대신, 나는 한없이 투명한 일상을 살고 있었다. 나는 예상 가능한 범위에서 움직이고 예측 가능한 일과를 보냈으며, 서점 아니면 집, 일의 아노미 상태 아니면 무기력한 무직의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오로지 한 가지 즐거움이 있다면 친구와 따뜻한 밥을 먹는 것. 밥 한 끼로 하루의 절망을 잠깐 잊어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친구는 내가 모르는 누군가와 약속이 많아졌다. 나와 함께 먹기로 했던 그 밥이 누군가의 입에 들어갔다. 나로서는 더 이상 인과가 연결되지 않는 친구의 이야기가 위태위태한 회전초밥 접시처럼 쌓여만 갔다. 고백하건대, 나는 친구의 대인관계에 개입하거나 하나부터 열까지 참견하며 구속하는 종류의 인간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나 살기 바쁜 타입으로 자유방임주의에 컴플레인을 받으면 모를까.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선더버드 엔진이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친구를 기다렸던 어느 날, 나는 혼자 밥을 먹다 말고 허공에 편지를 썼다.


나의 델마, 얼굴을 본 지 오래라서 눈치를 못 챈 거 같은데 말이야.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밥그릇을 빼앗긴 개는 사소한 자극에도 겁을 먹고 공격적으로 변하기 쉬운 법.
급기야 다 식은 청국장에 겨우 밥을 비벼 먹는 것만 같고, 향수로 중무장을 하고도 매력 없는 체취가 날까 하여 촉각을 곤두세우는 짐승.
너의 루이스가 지금 그런 때를 맞이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가장 완벽하게 못난 역변의 시기.
내가 생존에 기어를 넣고 달리는 동안,
너는 어디에  간 거야?
아직 갈 길이 반이나 남았는데 해체를 앞둔 아이돌 그룹처럼 억지로 웃고 있는 게 우리 얘기라니.
이 황량한 매트릭스 세계에 너와 내가 한 팀인 줄 알았는데, 너는 치지직거리며 잠깐씩 다른 세계로 사라지곤 해.

그러니 우리 잠깐 갓길에 차를 대고 쉬자꾸나.




  지난가을, 미국의 작가협회에 가 볼 기회가 생겼다. 그곳은 70년대 영화부터 최근 흥행작인 보헤미안 랩소디까지 수많은 영화 대본들이 소장된 보물섬이었다. 맘껏 열람해도 된다는 말에 내게는 어떤 상징과도 같아진 <델마와 루이스>의 대본을 먼저 찾았다. 함께 달리는 게 신나지 않게 된 우정을 되찾기 위한 나만의 의식이라고 해두자. 마지막 페이지는 델마와 루이스가 죽음을 각오하고 있는 절벽 앞으로 나를 데려갔다. 거기에 내가 그렇게 읽고 싶었던 두 마디 대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Are you sure?"

  루이스가 친구에게 묻는다.

  "Hit it."

  델마가 친구에게 답한다.


  너와 함께라면 무엇도 두렵지 않다는 간지러운 대사 하나 없이. 진짜 우정은 길게 말할 필요가 없다. 설명이 필요 없다. 두 여자의 대화가 돋보기로 본 듯 툭 불거져 나왔다. 나는 시나리오를 바꿔 써보기로 했다. 내 상상 속에서 친구와 나는 교복을 입고 차 안에 앉아 있다.


  청국장이 묻는다.

  '내 인생 지금 이판사판 공사판인데 어떡해?'

  버버리가 답한다.

  '그냥 질러.'


  끝까지 함께 가는 친구가 있으면 성공한 인생이다. 그러나 나는 출발하는 대신 친구를 내려준다.

  '여기서부터는 나 혼자 갈게.'

  마흔의 우정은 조금 외로울 수 있다. 나이 든 우정은 서로를 막다른 곳으로 내몰지 않기 때문이다. 추락으로 가는 길에 친구를 태울 수는 없다. 또 다른 건 무게의 이유도 있다. 늘어가는 친구의 비밀, 벌어지는 경제력, 빈곤해지는 연락 등을 모두 트렁크에 채우고 달리기엔 너무 무겁다. 구태여 말해지지 않은 것들은 묻어두는 게 서로 좋다는 걸 아는 날들. 모든 걸 공유하는 시대라고 해서 감정까지 공유할 필요는 없다.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를 줄이고 내 것만을 연소하기로 했다. 그래서 요즘 사람을 태우기보다는 내려놓고 있다.

  오래된 관계가 방향을 잃으면 질주를 잠시 멈춰야 한다. 억지로 끌고 가는 것보다는 정차하는 것이 낫다. 멈추면 그제야 내 위치가 제대로 보이기 시작한다. 얼마나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이대로 괜찮은지. 주위를 둘러보고 숨을 고르면 한 치 앞에 숨어 기다리던 비극이 제때가 아닌 것을 알고 슬그머니 사라진다. 내 삶을 돌아보기 시작한 순간부터 꾸준한 우정 앓이가 시작됐다. 일상에 독감 같은 어둠이 찾아오거나, 내가 막다른 벼랑 끝에 가까워지면 친구들을 하나씩 하차시켜야 하니까.

  ‘너는 여기가 안전해. 곧 돌아올게.’


  친구를 내려놓는 일이 이렇게 짜릿하고 스릴 넘치는 일인 줄 미처 몰랐다. 어릴 때는 관계를 그르칠까 봐 내가 망가지는 줄도 모르고 조심히 태우며 달렸지만, 지금은 그래서 좋을 게 없다. 감당하기 벅찬 것, 무리가 따르는 것은 잠시 내려두는 것이 좋다. 그것이 사랑하는 친구라면 더더욱.

  나는 멈춰 선 우정을 애달파하지 않는다. 어느 날 콘크리트처럼 딱딱해졌던 마음이 물렁물렁해질 때를 틈타 스리슬쩍 치고 들어오는 우정을 은근슬쩍 받아주는 인간이니까. 그게 십 대 사춘기와는 다른 사십 대 마춘기의 유연함이니까. 이걸 친구들이 본다면 부디 이해해주길 바란다. 내가 마음이 없어 연락이 없는 게 아니란 것을, 잠시 혼자만의 무모한 질주 중이란 것을. 재미없는 것은 나 혼자 할 테니 친구들은 부디 신수 훤하게 즐기고 있길 바라는 내 우정의 표현이란 것을. 얄팍해지고 싶지 않은 절박함때문이란 것을.


  내가 돌아오면 말이야, 우리 애리조나를 상상하며 춘천에 가자. 나는 어느 막다른 닭갈비 골목에서 너에게 물어볼 거야,  맘도 확실한지.


여기로 할까?


그럼 망설이지 말고 델마의 목소리로 대답해줘.


들어가자. 라고.




Are you sure?


Hit it!!!
노답_ 한 때는 영원했을 친구도, 자칫하면 0원의 우정이 되지.




매거진의 이전글 남의 결혼행진곡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