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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트리 Feb 10. 2020

그게 아니라 증후군

마흔 특집 에세이

    나는 좋아하는 것은 몇 개 없지만 싫어하는 것은 무진장 많다. 그  출구 없는 불호의 창고 속에서 찾은 가장 싫은 1순위는 바로 부정당하는 일이다. 당연히 그걸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부정적인 사람조차도 부정당하는 일은 끔찍이 여길 테니까. 그런데 세상의 모든 이슈를 한 큐에 부정하는 것이 얼마나 쉽냐면, 말머리에 이렇게 붙이기만 하면 된다.

  아니, 그게 아니라!


  대화를 가로막는 각종 장애물 중에서도, 밑도 끝도 없이 부정하는 증상에는 뾰족한 약이 없다. 사만다에게서 그게 아니라 증후군이 의심된 건 15년 전 만난 지 몇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박스는 이렇게 두면 되겠다.”

  “아니, 그게 아니라 이렇게 둬야지.”

  사만다는 가로로 놓인 문구용 박스를 세로로 돌리며 말했다. A4용지 박스의 뚜껑을 뒤집어 필기도구를 담아둔 것이었다. 나는 눈을 꿈뻑 거리며 합리적인 차이가 있는지 생각해 보았으나 아무리 봐도 다를 게 없었다. 이건 테트리스에서 막 내려오는 일자 테트로미노를 가로로 놓느냐 세로로 놓느냐의 문제 같았다. 층층이 쌓아 올린 블록 더미를 한 번에 터트리는 희열을 위해서라면 세로가 맞겠지만, 고만고만한 단층에서는 가로로 놓는 것이 전략일 수 있다. 엄밀히 말해 무엇이 맞고 틀리다 할 수 없으며 그저 플레이어의 마음에 달린 일이었다.  

  ‘테트리스라면 내가 폭파 전문이라고.'

  

  사만다에게는 특별한 것이 있었다. 사람의 입을 다물게 하는 무언가가. 그가 나누는 대화에 귀를 기울여보면, 나 말고도 불특정 다수에게 ‘그게 아니라’가 쏟아졌는데 특히 아랫사람에게 심한 경향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무언가를 가르쳐야 하는 사람이며 상대는 가르침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듯한 상황을 만드는데 선수였다. 만약 내가 당신이 숨을 쉰다고 말하면 그게 아니라고 대꾸할 사람이었다.

  ‘그게 아니라’는  파리를 잡아야만 존재의 의미가 있는 파리채처럼 불쑥 튀어나와, 사람들의 입과 귀를 시도 때도 없이 찰싹 때렸다. 이런 식으로라면 감탄사에도 찰싹, 한숨 소리에도 찰싹, 급기야 지나가는 느낌표도 찰싹 때려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토크쇼 출연자라면 자막으로 ‘무엇이든 부정해드립니다’라고 넣어줘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다. 그를 만나면 나는 맞기만 하다 기절한 파리가 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중독성 있는 말을 잘 만들기도 하지만, 잘 전염되기도 하는 사람이라서 멀리 도망쳤다. 그게 아닌 세계에서 아주 멀리. (볼드모트의 이름을 언급하기도 꺼려하는 호그와트 학생의 심정이 이런 거였구나.)


  오랜만에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서울을 뜨기 전에 만나자는 것이다. 아마 업데이트할 소식을 가운데에 젠가처럼 쌓아놓고 내가 젠가를 하나씩 뺄 때마다 '그게 아니라'고 할 테지. 벌써부터 눈 앞에서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동안 공들여 읽은 명상서적과 자기계발서들을 떠올리며 나마스떼의 두 손을 모으며 날을 잡았다. 그게 아니라가 밉지 사람이 미운 게 아니잖아?

  만나기로 한 디데이가 가까워 올수록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게 아니라’에 속절없이 당하는 것도 싫지만, 가장 싫은 건 사만다를 정말 싫어하게 되는 일이었다. 돌탑이 잘못 쌓여서 무너지는 게 아니라, 잘못 올린 마지막 돌 하나에 무너지듯이. 싫어하는 것을 하나만 더 추가하면 내가 무너질 것 같아서 싫었다.

  부정의 아우라에서 나를 보호하기 위해 주문을 걸었다. 그것은 한 사람이 오래 쓴 못생긴 지갑 같은 거야, 지겹지만 빼버리면 허전한 라디오 CM 같은 거야, 흥을 돋우는 판소리의 얼쑤 같은 것이며, 상대방과 조응하려는 접속사의 잘못된 용례일 뿐이야, 라고. 먼지 쌓인 요가 매트를 꺼내 앉았다. 디데이까지 호흡과 명상으로 단련하겠어. 반가움만 남고 거부감은 떠나라, 긍정 에너지로 가득 채워라, 나는 우주의 일부이다.  나는 이제 그의 부정에 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긴장을 이완하고 언더독 자세로 꺾여 있다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파리채를 꺼내면 뒷발로 차 버릴 거야."


  그가 보이는 곳 100미터 전, 두근두근. 이제 와서 도망칠 순 없었다. 경찰서에 들어갈 때보다 더 떨리는 거 같았다. 내가 이렇게 스트레스에 취약한 인간이라는 것에 스스로 놀랐다. 겉모습은 마흔이지만 속은 병아리 숨결에도 날아가는 민들레 홀씨가 되어 있었다. 면역력이 약해지면 인간에 대한 면역력도 뚝 떨어지는 거야. 그러니 민들레를 씹어먹는 잔혹한 행위는 하지 말아 주라, 생각하며 카페의 문을 열었다.  

  방긋 웃는 사만다가 보였다. 나도 방긋 웃었다. 이렇게 반가운 걸 보니 우리가 맞는 부분이 별로 없어서 그렇지 근본적으로 나쁜 사람들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잘 지냈어?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이것저것 배우면서 살았어. 사업도 준비하고."

  "멋지다!!!"

  "아니, 그게 아니라! (어쩌고 저쩌고)"


  ‘절대’라는 말은 절대로 써서는 안 됐다. 그 단어는 바라는 바를 ‘반대’ 하는 힘을 가졌으니까. 그게 아니라 다음부터의 말들은 하나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내 감탄사에 그대의 옳고 그름은 필요 없다. 이 자리가 선이나 소개팅이라면, 이건 100프로 퇴짜 사유였다. 이후로도 우리의 대화는 회전문 같았다. 내가 몸을 집어넣으면 다시 돌려 내보내고, 또다시 들어가면 다시 내보내고. 계속해서 들어가고 나오고 하는 동안 머리가 빙빙 돌았다.

  자꾸만 밖으로 튕겨 낼 사람을 왜 만나자고 한 건지, 어떻게 해야 그게 아니라를 물리칠 수 있을까. 아무래도 묘수가 필요했다. 이제는 내가 회전문에 들어가고 있지도 않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사만다는 계속 말하는 중이었다.

  나는 이제 때가 되었다는 걸 알았다. 타임 투 세이 굿바이, 는 아니고 미운 정 고운 정을 총동원하여 진실을 말해줘야 할 때라는 것을.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의 지경이 되어 손바닥을 들었다. 탐모!

  “잠깐만! 그거 알아?"

  "어?"

  "지금까지 그게 아니란 말을 오조오억 번 했다는 거."

  사만다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세상에는 그러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그렇지만, 그러므로, 그 밖에도, 하지만. 이런 접속사도 많다고! 이제부터 차라리 그런데를 써줘. 나를 위해서도 당신을 위해서도 당신을 만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아니 그게 아니라! 어머! 아니 이게 아니고!"

  이제야 마침내 이해하게 된 것 같았다.

  자기도 모르게 또 그게 아니, 라던 사만다가 놀라 입을 털었다. 둘 다 풋 하고 웃었다. 사만다는 신경 써서 말하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노력할수록 그게 아니라는 이름을 가진 파리채 없이 대화의 전장을 누빌 수 없다는 것만 확실해졌다. 화제를 전환하며 말을 이어갈수록 부자연스러웠다. 열쇠 구멍에 맞지 않는 열쇠를 억지로 넣고 돌리듯이. '그게 아니라'는 내게는 파리채였지만, 그에게는 만능열쇠였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보니 저주받은 개구리 왕자가 생각났다. 자기는 사람의 말을 하는 줄 알지만 들리는 건 개굴개굴뿐이어서 몹시 답답한.

  이 저주가 걱정스러웠지만 내가 용기 내서 말했으니 그도 용기 내서 고쳐나가길 바라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속이 후련했다. 임금님 면전에 "당신 귀는 당나귀 귀입니다"라고 또박또박 아뢴 뒤 퇴청한 기분이었다.


노답_    그게 뭐라고 그걸 그렇게 참았냐고? 아니 그게 아니라~




I can't BEAR this any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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