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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트리 Aug 20. 2021

터뷸런스가 예상되오니

단디 매고 갑시다

Fasten your seat belt, please!


대학교 영어회화 시간에 되풀이해서 외웠던 이 한 문장을 기억하고 있다. 교수님은 안전띠를 매라는 상황 이후로는 진도를 나가기는 커녕 재미 없는 사담을 혼자 즐기고 있었고, 우리는 두 사람씩 짝을 지어 이어지는 대화들도 마저 외운 것 같은데 기억력의 세례를 받은 건 이것 뿐이다.

그때만해도 이런 날이 올 줄 상상조차 할 수 없던 밀레니얼 초기에 막 입성하여 대부분이 비행기 탑승수속을 살짝 긴장되는 특수한 일처럼 여기고 있던 때였다. 하늘에 쏘아 올려진 작은 인간이 될 때까지 손에 땀을 쥐고 있었달까(나만 그랬나).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일이 어디 지금처럼 손가락으로 항공권을 클릭하고, 버스 타듯 줄만 서면 알아서 되는 일이었던가. 내가 승무원이나 파일럿 쯤 되는 줄 알까봐 빨리 고백하자면, 나는 그저 비행기가 지나가는 장면을 멀리서 보기 좋아하는 방송작가이다.


때문에 그 영어 한 줄은 아쉽지만 전혀 써먹을 일이 없었고, 기체가 조금만 흔들려도 알아서 안전띠를 매는 인간이기 때문에 승무원에게 그 말을 들을 일도 거의 없었다. 오래전에 훈련받은 뇌는 평생 나를 단단하게 허리를 졸라 맨 파블로프의 개로 만들곤 했다.

때 아닌 안전띠 타령을 하는 이유는, 순전히 나의 에고 때문이다. 대한민국 국민 서열상 마흔이 되던 날 에고는 숨을 헐떡거리며 깊이 잠들어있던 영어문장을 끄집어내 버클을 채우고 잔소리를 퍼부었다.


‘우린 지금 터뷸런스를 지나고 있다. 패슨 유어 씻 벨트 플리즈.’


이토록 자신을 걱정하는 에고를 갖고 있는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계속해서 묻고 있다.

 ‘터뷸런스는 잠깐이면 끝나잖아, 이번에 왜 이렇게 오래 가? 터널이야 뭐야?’  


잊고 있었다. 삶은 터뷸런스가 줄 선 긴 터널이란 것을. 능구렁이도 못 된 오만한 내 영혼이 어느덧 마흔의 난기류로 접어들었고 나는 그것을 피할 수 없던 사고라 부른다. 인생의 항로를 돌이켜보니, 백설공주병에 걸렸던 어린이 구간 - 탄성보다는 저항력에 능했던 학생 구간 - 똥의 맛을 상상하게 해준 사회인 구간을 넘어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를 지났다. 그리고 펼쳐진 광활한 사십대륙. 거기서 기다리고 있던 터뷸런스를 통과 중이다.

그 크기만큼 마음의 소란도 강력해진다. 내 나이 사십이면 눈이 번쩍 뜨이는 잔칫상을 차리고 있을 줄 알았더니, 현실은 웬걸! 아찔해서 눈을 감고만 싶어진다. 이렇게 아직도 아픈 거 보면 청춘 맞는데, 심리학이 적중하니 서른인 거 같은데, 공자는 왜 사십을 불혹이라고 하였나. 여전히 미혹되는 일은 많고 이유 있는 불안의 혹만 커져가는데.


그래서 나처럼 피할 수 없는 사고를 맞을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사실 마흔에도 안녕한 인생은 쉽지 않은 거라고. 그러니까 우리 서른이고 마흔이고 구분짓지 말자고. 비슷한 처지인데 괜히 말하기도 뭐해 괜찮은 척 하고 있을 뿐이라고. (아닌 분들도 있을테니) 어쨌든 나는 틀려 먹은 거 같으니 가려면 먼저들 앞서 가시라고.

그럼에도 나는 생의 모든 이륙에서 착륙까지 내가 안전했으면 좋겠다. 일, 생활, 가족, 관계, 현실의 모든 기류를 잘 뚫고 나왔으면 좋겠다. 내가 비록 비행기 꼬리에 앉을지라도 창밖의 구름은 다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구름이 변화무쌍한 것과 태양이 지고 별이 뜨는 것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면 좋겠다. 후지지 않게 그 자리에서 빛났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시작의 목적이 끝이듯, 이륙의 목적도 착륙이다. 우리 모두는 도착할 곳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게 어디인가. 그러니 가는 동안은 영화도 마음대로 골라 몇 편씩 보고, 맥주나 와인도 마시며 마음놓고 가시길. 졸다가 끼니 놓치지 말고! 목적지가 어디든, 지금도 가고 있다는 게 중요하니까.


거기가 어디든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안전띠를 매고 있자.

기내식 같이 오는 인생의 기회도 졸다가 놓치지 말고 꼭 받아 먹자.


근데 나 지금 어디 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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