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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트리 May 12. 2020

나의 친애하는 주지스님

마흔 특집 에세이

꿈에 예수님과 부처님이 손을 잡고 나타나셨다. 그러고는 동시에 물으셨다.

"너는 크리스천이냐 불자냐?"

나는 손을 입에 물고 어버버버, 하다가 우문현답 같은 나발을 불었다.  

"저는 둘 다이기도 하고 둘 다 아니기도 합니다."

"지쟈스, 너 좋은 것만 다 하려고 그러느냐?"

예수님한테 제대로 간파당했다.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것이냐? 나무아미타불…”

꿈 속이었지만 부처님의 부릅뜬 눈을 보고 동그랑땡을 떠올렸다.

“두 분도 친히 손을 잡고 다니지 않으십니까. 그래도 제가 신천지만 아니면 되지 않겠습니까.”

두 신성은 민망한지 슬그머니 손을 놓았다. 그걸 보고 기가 산 나는 때를 놓치지 않고 다그쳤다.

"것보다! 제가 기도하면 들어나 주..." (쌩-)

나의 신들은 예고 없이 오더니, 갈 때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기도만 할라치면 꼭 이러시더라?


    자다가 일어나니 우리 집에 떡이 와 있었다. 발신지는 현덕사였다. 이미 증발한 꿈을 더듬어보니 부처님이 가기 전에 손가락으로 오케이를 한 것 같긴 했다. (어머, 츤데레!) 우리 집으로 여름이면 옥수수가, 가을이면 감이, 겨울이면 한과가 왔다. 계절이 바뀌는 족족 계절 양식이 집에 도착했다. 나는 크리스천이지만 아는 목사님이 없고, 불자가 아니지만 아는 스님은 있다. 심지어 마주 앉으면 절로 무릎을 꿇게 된다는 신선 눈썹의 주지스님이다. 6년간 찾아온 이 일용한 양식들은 모두 그분의 선물이다.

    속세에 찌든 내게 스님의 살뜰한 보살핌이 도착하면, 스님과 내가 2천 겁(*불교에서 2천 겁이 지나야 하루 동안 동행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고 한다.)의 세월을 지나 만날 운명으로 만들었던 결정적 순간이 떠오른다. 그때 나는 어느 산간도로를 달리는 봉고차 안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고, 스톱을 갈등하며.


    오래전, 아빠와 아이가 오지로 떠나는 예능프로그램을 할 때였다. 당시 나는 혼자 배낭여행을 다녀봐서 오지를 잘 찾을 거란 (왜 때문이죠?)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세계 각국에 보내지는 외교관처럼 전국의 각 도, 시, 군, 구, 읍, 면, 동, 리로 파견됐다. 다시 말해, 파견의 임무를 띠고 홀로 파국의 시절을 견디고 있었다.

    그 파국의 일주일이란 동화와 영화를 짬짜면처럼 섞은 복합장르물과 흡사했다. 

     꼭두새벽부터 이런 장면이 펼쳐진다. 어둠 속에서 기다리는 봉고차, 드르륵 문을 열면 내비게이션 액정만이 하얗게 빛나고 있다. 스파이가 몰래 전하는 암호처럼 내가 생소한 지명을 말하면, 오늘 출장을 배정받은 기장님은 해커의 손놀림으로 폰을 두들긴다. 미사일 표적이라도 찾은 듯 깃발이 꽂히면 화면에 나타난 화살표를 따라 미지의 마을로 떠난다. 그리고 나는 12시면 돌아와야 하는 신데렐라가 된다. 나는 유리구두 대신, 전날 어느 산속에서 묻혀온 진흙투성이의 운동화를 신고 있다. 동떨어진 전국구 오지마을들의 위치를 연결해 동선을 계속 확인한다. 해가 지기 전에 모두 봐야 한다는 책임을 느끼며 안전벨트를 맨다. 해는 아직 뜨지 않았다.

    ‘자, 게임을 시작하지.’

    동이 틀 무렵, 첫 번째 휴게소가 나온다. 나와 기장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화장실에 들러 생존신고를 하고, 나는 매점에서 커피와 빵을 좀 사서 기장님한테 드린다. 빵을 전하는 손 끝에서 지금 거의 돈키호테 수준의 비이성적인 모험에 끌려왔다는 것을 인지하신다. 여기서 약간 전우애가 다져진다. 오늘도 살아서 돌아가자는 눈빛을 교환한다. 기장님의 당이 떨어지면 나의 생존율도 떨어진다. 비장하게 다시 시동을 거는 기장과 비장한 기장의 눈꺼풀을 매섭게 주시하는 작가. 졸음운전을 감시하는 CC카메라가 된 나의 동공은 빨갛게 켜져 있다.

    아침과 점심을 모두 거르고 오지에 도착하면 정겨운 농가는 없고, 마을 입구에 <00 테마마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간판만 위풍당당했다. 다시 핸들을 꺾어 부랴부랴 도착한 다음 마을은 럭셔리한 별장촌이 되었거나, 또는 로마의 콜로세움처럼 무너진 폐허가 되어 마른 풀벌레 소리만 나를 반겼다. 결국 절망에 빠진 나는 소도 없고 사람도 떠난 외양간 앞에서 울부짖었다.

    “오지는 무슨 오지! 오지게 없는 게 오지다!”

    어느 두메산골에서의 외침은 내 입에서 나와 다시 내 귀에 들어왔다. 그야말로 굴절 없는 청정의 메아리였다.

    게다가 촬영지 컨펌은 꽤(아니, 꽥소리가 날 만큼) 까다로워서 마치 영화 <신과 함께>의 7 관문을 거쳐 귀인인지 아닌지 심판받는 것과 같았다. 그곳이 왜 귀처(귀한 곳)인지 동네 감자밭에 묻혀 있는 감자알 수와 개울가에 개구리가 몇 마리나 잡히는지 (상식적으로 알 턱 없는 일을) 빠삭하게 알아놓고 변론해야 한다. 특히 책임연출자의 취향과 철학이 크게 작용했다. (김남일 선수의 명언이 절로 생각난다. 답답하면 너네가 찾던지!)

    “그래서 여기 개구리가 얼마나 나온대?”

    “그래서 여기쯤에 흉가가 있으면 좋을 텐데?”

    “그래서 소젖은 얼마나 짤 수 있대?”

    “그래서 이 동네에서 뭘 할 수 있어?”

    “그래서 다음 마을은 어디야?”

    이 모든 질문에 내가 일일이 대답을 했다는 게 그저 기적이다. (그래서 내 심장에는 지금도 참을 인 3조 3억 개가 꽂혀있다.) 이런 식이면 마블 영화처럼 출연자들에게 녹색 쫄쫄이 옷을 입혀서 찍고 그래픽으로 원하는 배경을 그려 넣는 것이 더 쉬울 지경이었다. 그러니 촬영 아이템으로 템플스테이가 정해졌을 때 하나, 종교적인 예법을 존중하면서도 둘, 방송적으로는 그 색채가 너무 강하게 담겨도 안 되고 셋, 수행보다는 경험으로 승화할 수 있으면서도 넷, 그림마저 아름답기 그지없는데 다섯, 방해하는 방문객 없이 우리 촬영팀만 있을 수 있는 절을 찾으라는 말은 아주 꼰대 같은 염라대왕이 한가롭게 엘라스틴 하는 소리였다.

    ‘귀인은 됐어, 내가 먼저 귀신이 될라니까!’

    나는 혀를 깨물고 싶었다. 그런 절을 찾으면 내가 머리를 깎고 들어앉을 심산이었다. 그리고 복수하는 마음으로 촬영을 결사반대해야지. (합장)


    나는 ‘촬영하기’ 참 좋은 절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의 절간을 이 잡듯이 뒤졌다. 인터넷으로 조사한 엄청나게 아름다운 절들을 도장깨기 하듯 찾아갔다. 절은 우리가 맛집 가듯 검색해서 금방 갈 수 있는 데가 아니다. 부처님은 그렇게 우리를 호락호락 만나주시지 않는다. 하필이면 왜 깊은 산속 옹달샘 옆에 계시는 건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심지어 어떤 절은 주차장에서 절 사무실까지도 만보를 걸어야 했다. 주지스님을 만날 수 있기는커녕 수행하는 젊은 스님들의 이동 행렬만 잔뜩 구경할 수 있었다. 10층 높이에 압도적인 크기의  금빛 황홀한 부처님이 수 백명의 중생을 맞이하셨다. 관광객으로 넘쳤다, 세모. 벚꽃동산이 있어 앵글에 대충 담기만 해도 시청자들의 봄 세포를 터트려서 덩달아 시청률도 터질 것 같은 절도 있었다. 등산객으로 넘쳤다, 세모. 기암절벽에 지은 암자가 하늘에 우뚝 솟은 듯 보이는 절도 있었다. 여긴 아름다운 만큼 위험했다, 엑스. 그래도 나는 꼬박꼬박 모든 절에서 촬영 허락을 받아두었다. 섭외는 모두 해놓고, 방송말로 까는(취소하는) 것은 이쪽이어야 하니까.

    그러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도착한 어느 으리으리한 절에서 나는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의 카피로 유명했던 CF에 등장해 배우 한석규와 나란히 걸었던 스님을 만났다. 방송국에서 왔다는 말을 전해 들으신 스님이 물었다.

    “내 그간 꽁꽁 숨어 지냈는데 어떻게 알고 찾아오셨는지?”

    “모르고 온 것인데 그저 여기 계셨을 뿐입니다.”

    스님이 짓는 미소에 달고 짠 감정이 스몄다. 숨바꼭질의 성공은 지난 CF의 위세가 끝났음을 의미해서였을까. 스님은 녹차를 따라주시며 촬영을 고사했다. 나도 절이 몹시 반듯하고 정갈하기가 이를 데 없어 어쩌다 근정전에 든 무수리처럼 부담을 느끼던 차였다. 이만 빨리 꺼져드려야 좋을 것 같았다. (합장)


    해가 서쪽으로 기우느라 몸이 달아 있었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나는 폰 속의 위성지도와 기장님을 번갈아 쳐다봤다. 이상하게 지어진지 얼마 안 돼 정보가 거의 없는 절 하나가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짙푸른 수풀 사이에 세 개의 지붕만 오롯이 보이는 작은 절이었다.

    “기장님, 정말 마지막으로 한 군데만 더 가볼까요?”

    “시간이 되겠어요? 해가 곧 질 거 같은데.”

    “강원도 오대산 방향, 지도로는 1시간 20분 나와요.”

    “1시간 안에 끊어볼게요.”

    순간, 기장님이 <분노의 질주> 시리즈의 빈 디젤처럼 보였다. 못 먹어도 고! 신데렐라와 돈키호테와 당 떨어진 레이서가 뒤죽박죽 힘을 합쳤다.

    헤드라이트를 켜고 어둑어둑해진 오솔길을 구비구비 돌았다. 그 끝에 현덕사가 있었다. 그리고 승복을 휘날리며 나온 주지스님이 있었다.

    “보살님, 뭐한다고? 일단 와서 커피 마시라, 내가 내려준다.”

    나는 손님방에서 구구절절 이곳에 온 목적과 이유를 알리며 혹시라도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까 봐 복부에 힘을 주고 있었다. 스님이 다 듣고 말씀하셨다.

    “나 티비 안 봐서 몰라, 모르는데 다 해줄게. 누가 나온다고? 근데 상관없다! 작가 보살님이 해달라는 것은 내 다 해줄게! 걱정마라, 속 끓이지 마. 다 돼! 이거 고구마 하나 먹어봐라, 맛있다이.”

못 이기는 척 고구마를 맛보고 나오는데 달이 환하게 빛났다. 그 달은 내가 내내 애타게 찾던 동그라미였다. 이제 집에 가자.

    그때 스님은 나의 딱한 얼굴을 읽으셨던 걸까. 간절하고 절박한 사람의 마음을 알아보신 걸까. 겉으로는 웃으며 넉살 좋게 굴어도 속이 바짝 타서 재가 될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감지하신 걸까. 스님은 천도재 때문에 달아놓은 수백 개의 연등을 철거해달라는 나의 부탁을 조금도 주저 없이 들어주셨다. 촬영 일정이 몇 주 미뤄졌을 때도 불편한 기색조차 없으셨다. 제작진의 무리한 요구도 무조건 긍정하셨다. 오히려 “괜찮다. 걱정마라, 다 된다!” 하며 나를 안심시키셨다. 걱정 말라는 말, 다 해준다는 말. 그 누구한테도 들어보지 못한 든든한 말이었다. 씩씩하고 담대한 척 하지만 늘 불안하고 맘 약한 내게 가장 필요한 약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현덕사에서 촬영이 시작됐다. 스님은 출연자와 고무신 던지기 게임을 하다 다시 승복을 휘날리며 꽈당 넘어지셨다. 출연자며 스태프들도 깜짝 놀라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아니, 나는 괜찮다? 걱정 마소!”

    스님은 부처님이 가진 것을 다 내주듯 모든 걸 주시고, 우리들의 걱정은 다 가져가셨다. 절을 놀이터처럼 여기며 뛰어다닐 수 있게 해 주셨다. 아이들은 발우공양으로 밥의 소중함을 배우고, 아빠들은 템플스테이의 힐링을 만끽했다. 그렇게 모두가 아는 성동일의 물아일체 짤이 탄생했다. (물론 제작진은 기진맥진했지만.)

    인생이 잘 풀리지 않고 장애 넘어 또 장애일 때가 있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서 남은 건 포기밖에 없을 때가 있다. 동료의 탈을 쓰고 각료 행세만 하는 사람들 속에서 상처 받을 때도 있다. 저지를까 말까 장고 끝에 악수 둘 때도 있다. 고와 스톱 사이의 수많은 존재들이 오늘도 별처럼 홀로 빛났겠지. 나는 스님을 만나고 확신하게 됐다. ‘못 먹어도 고’는 언제나 옳다는 것을.



    지난가을, 함께 방송일을 하던 치타를 만나 현덕사의 추억을 야금야금 꺼내 먹었다. 치타가 말했다.

    “스님이 밥을 정말 많이 주셨거든, 절밥 먹고 싶다.”

    나도 지지 않고 말한다.

    “난 거기서 두릅을 처음 먹어봤어. 살면서 먹은 것 중 제일 맛있게 먹은 밥이었어.”

    기껏 만나 밥타령을 하다가 우리는 마음이 통했다. 나는 공손히 전화를 받치고 스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스님, 저희 밥 먹으러 가도 돼요?”

    “걱정 말고 와라! 와서 묵고, 하루 자고 가라이! 지금 오대산 너무 이뻐! 다 보고 가라이! 알았제?”

    치타와 호랑이는 포효하며 강원도로 내달렸다. 스님은 더 말갛게 젊어진 안색으로 앉아계셨다. 반대로 훅 늙은 얼굴로 나타난 우리를 마치 어제에 이어 또 본 듯 물으셨다.

    “그래, 뭐 먹고 싶나?”

    “다요.”

    스님은 일부러 해안도로로 우리를 데려가셨다.

    "느그 바다 봐라. 참 좋지? 노래 틀어줄게."

    스님은 캘리포니아 드리밍을 선곡하셨다. 강릉 바다의 부서지는 파도와 노래가 부딪쳐  빈곤하던 마음에 흥이 뿌려졌다. 속세에 찌든 마음을 깨끗하게 빨아 입고 돌아가라는 보살핌이었다. 치타의 그을린 얼굴에 웃음이 번졌고, 나는 가만히 인연의 힘을 생각했다. 우리는 바닷가에서 스님과 오붓한 외식을 하고 절로 돌아왔다.

    “우리, 자기 전에 춤춰야 된다!”

    절에서 춤이라니, 치타와 나는 무슨 이벤트인가 싶었으나 워낙 힙한 스님이시니 따르고자 했다. 스님은 유튜브에서 댄스곡을 찾아 트셨다 (디제이신줄). 이렇게 소화시키고 자야 한다고. 우리는 두 곡이 이어 흐를 동안 스님과 척추를 꺾다가 오는 새벽에 108배를 하라는 말씀에 덜컥 네, 하고 대답했다.


    나는 새벽에 일어나 홀로 108배를 하며 생각했다. (곯아떨어진 치타는 오지 않았다.)

    ‘나는 108개쯤의 복을 타고났어.’

    무릎에서 삐걱-하는 소리가 났지만 모른 척했다. 나는 아직 내가 타고난 복의 반도 안 썼다. 어줍잖은 샛별이 사라지고 내 안에 동이 트고 있었다.  

    급히 서울로 가려는데 스님이 주머니에서 무심한 척 묵주를 꺼내셨다.

    “하나씩 해라.”

    마침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있어서 준다는 듯이 툭, 무심하게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셨다. 그러나 전날 미리 챙겨두셨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나는 기도와 절을 둘 다 하는 사람이다. 아무래도 제대로 된 종교인의 모습은 아니겠지만, 기도하는 손이나 합장하는 손이나 내게 다름없는 건 복세편살(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자)을 바라는 마음이다.

    평생 나에게 절은 수학여행에서 간 경주의 불국사뿐이었다. 팔만대장경이 있다는 합천 해인사는 시험 때문에 외웠지 가본 적도 없다. 그러다가 삼십 대 중반, 영원히 잊지 못할 절 이름 하나가 인생에 추가됐다. 시험에 나와서도 누가 데려가서도 아닌, 내 발로 찾아갔던 절. 어드벤처 같은 일상 속에서 환대와 자비를 받을 수 있던 절. 속세에서 마흔의 수행을 하고 있던 날에도 나를 품어준 오대산 줄기 하나, 만월산 안자락에 숨은 현덕사이다. 그곳을 알게 된 후로 나는 마음 한편이 든든했다. 이런 걸 믿는 구석이 있어서,라고 하는구나. 언제든 걱정 말고 오라는 스님은 내 마음에 두둑이 부은 적금이 되었다.

    한 번씩 전화를 하면 스님은 부단히 일러주신다. 억지로라도 쉬어 가라, 엎어진 김에 쉬어 가라. 내가 정말로 엎어졌다는 것을 이번에도 아셨는지 두 번 세 번 강조하신다. 그런데  말처럼 든든한 응원이  없다. 덕분에 나는 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 엎어지면 그때가 절호의 찬스이니 숨을 고르는 것이 낫다. 신이 나를 쉬게 하려고 내가 엎어졌구나 싶었다. 나는 쉬기에 좋은 절기를 보내고 있다.


    시장에서 두릅이 명당을 차지하고 대장 노릇을 시작한 어느 봄날, 집에 두릅이 왔다. 나는 스님과 함께 먹던 첫 두릅의 맛을 떠올리며 몇 개 데쳤다. 조심스럽게 집어 입에 넣었다. 입 안에 부처님이 오셨다. 혀 위에 자비가 내려앉았다. 신이, 춤이 절로 났다.


두릅뚜루뚜 두릅뚜루뚜 따다다~

두릅뚜루뚜 두릅뚜루뚜 따다다~

(후르뚜송 아시는 분만,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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