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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트리 May 11. 2020

걱정하는 팔자의 탄생-2

마흔 특집 에세이

https://brunch.co.kr/@horangcave/40

(1부에 이어)


3. 1984년으로 추정되는 일

   더 오래 전의 일이다. 당시 나는 바가지 머리를 한 미취학 아동이었다. 엄마는 어느 날 마당에 물 펌프가 있는 상암동의 외갓집에 나를 데리고 갔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엄마한테 집착했는데, 엄마의 증언으로는 아빠에게도 절대 안기지 않는 아기였다고 한다. 그런 애였으니 언니가 유치원에 간 틈을 타 엄마를 독차지하고 외출하는 게 얼떨떨하고도 퍽 좋았을 것이다. 내 평생 세상에서 제일 사랑한 사람이었던 외할머니지만, 그때만 해도 아직 내 세계에 등재되지 않은 인물이었으므로 어쩐지 낯설기만 했다.

   종일 물 펌프도 눌러보고, 마당에 블록이 몇 개인지도 다 세어봤고, 할머니의 무지개 사탕도 먹었고, 마루에 모로 누워도 보고, 장독이 놓인 계단도 올라가 봤다. 할 건 다 했는데 엄마는 집에 갈 생각을 안 했다. 나는 더 놀 게 없는데 엄마는 할머니랑만 놀았다. 심통도 나고 졸음이 몰려왔다. 할머니가 한숨 자라며 열어준 방은 너무 깊고 조용하고 아득했다. 반대편 벽에 달린 쪽문으로 빛이 겨우 들었다. 이 방에서 혼자 잠들면 다시는 나오지 못하게 될까 봐 눈을 감기 전에 약속을 받아냈다.

   "엄마, 나 두고 가면 안 돼!"

   "안 두고 가."

   "집에 갈 때 나 꼭 깨워야 해!"

   "알았어, 빨리 자. 지금 안 자고 집에 갈 때 졸려하면 못 데려간다?"


   나는 빨리 자야 빨리 일어나고, 그래야 엄마랑 빨리 집에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다시 떴을 땐 엄마 대신 엄마의 엄마가 눈앞에 있었다.


   배신감.

   그것은 당시 익히고 있던 사과, 배, 자동차라고 쓰여있는 글자 놀이 카드에는 없던 단어였다. 나는 그 추상적인 감정을 이렇게 배우고 만 것이다. 엄마가 앉았던 자리에 들었던 빛은 어느새 검은 밤이 삼키고 없었다. 나는 분명 엄마 무릎을 베고 잤는데, 어떻게 엄마가 무릎을 빼는 것을 못 느꼈을까. 잠이란 무서운 것이다. 나의 감각을 사라지게 하고, 엄마를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내가 너무 어려서 참을 수 없는 약속의 가벼움을 몰랐다 쳐도 말 잘 들은 어린이라면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거늘. 눈을 뜨자마자 울기만 하는 내게 할머니는 배가 고프냐고 물었다. 배신감을 깨우치고 있는데 불현듯 배고픔이 끼어들었다.

   할머니는 내 입을 비집고 나오는 새된 통곡을 막으려 물에 만 밥을 떠먹여 주셨다. 물 반 침 반의 밥풀을 넘기며 용케 밥상의 시간을 버텼다. 난감해하던 할머니는 상을 치우고 반짇고리를 다시 무릎 앞으로 끌어왔다. 아까는 못 봤던 사탕들이 더 있었다. 할머니는 눈깔사탕, 알사탕, 무지개 사탕을 모두 꺼내며 고르라고 했다. 엄마의 부재에 상처 받은 아이는 할머니에게 진실을 고했다.

   "사탕들 다 맛없어."

  정말 맛이 없었다. 아끼는 사탕을 그렇게 말해서 할머니는 상처 받았을까, 나는 조금 미안해져서 눈물도 조금만 내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사탕은 엄마를 대체할 수 없으니까.

   밤이 낮이 되고 낮이 밤이 되었다. 그게 몇 번이나 반복된건지 감을 잃어갔다. 사실 하루가 지난 것인지, 사흘이 지난 것인지 알지 못하면서 할머니 얼굴만 보면 물었다.

   "할머니, 나 여기서 몇 밤 잤어? 몇 밤 자면 엄마 와?"

   할머니는 어제도 세 밤이라고 하더니, 오늘도 세 밤이라고 했다. 숫자가 변해야 하는데 변하질 않았다. 자고 일어나면 엄마가 와 있을 거라더니, 할머니도 엄마랑 똑같았다. 몇 밤도 모자라 몇 낮을 잔 거 같은데 엄마는 올 줄 몰랐다. 잠을 자면 엄마 등에 포개어 업힌 내 등이 보였다. 그렇게 업혀서 집에 가는 꿈을 꿨다. 내 자그마한 머릿속에는 트럭이며 오토바이가 날아다니고, 경찰차와 소방차가 집에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 장면이 가득 차올랐다. 시간이 너무 가지 않으면 할머니의 사탕을 꺼내 먹었지만 하루가 다 가도록 빨아도 사탕은 반도 없어지지 않았다.


4. 2005년의 일

   걱정을 먹고 무럭무럭 자란 내가 방송작가가 되었다. 막상 방송국에 들어가니 이곳은 온갖 걱정을 심어서 걱정으로 키우고 걱정스레 내놓자마자 다음 걱정이 언제 수확되는지 닦달하며 걱정으로 한 주를 보내는 곳이었다. 걱정을 이중삼중으로 쌓아 올려 프로그램 하나를 떡하니 지어내는 어마무시(!)한 집단이었다. 그야말로 걱정하는 것이 일이었다. 거대한 숙주를 발견한 내 걱정 바이러스는 24시간 풀가동했다.

매일 같이 밥 대신 걱정을 먹었다. 쪼임은 또 다른 이름의 폭력이자 공포였다. 내가 한 게 혹시나 별로일까 걱정하고, 섭외를 약속한 매니저가 나중에 딴소리를 할까 봐 걱정하고, 촬영 장소를 섭외하지 못할까 봐 걱정하고 감을 잡지 못할까 봐 걱정했다. 여기서는 아무도 친절하지 않았다.


   매니저의 연락처는 전화 수첩에 수기로 적어서 공유하던 시절이었고, 그걸 관리하는 것은 막내 작가인 나의 일이었다. 그러던 중, 새로 공수한 모 가수의 매니저 번호를 찾는 조연출의 전화를 받은 건 모처럼 외출한 주말의 오후 2시경이었다.

   "나, 그 번호 좀!" (뚝)

   앗 저?...

   전화는 지하철 2호선 열차가 신도림에 도착해 문이 열리면서 받았는데, 다시 닫히기도 전에 끊겼다. 문자로 (무례함을 따지고 싶었으나 실행을 못 하고) 밖이니 귀가하여 전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전화번호 때문에 약속을 취소하고 집에 갈 순 없는 일 아닌가, 그 사이에 매니저가 번호를 바꾸거나 사라질 일은 없지 않은가. 그러나 마음에 숙제를 안고 만난 친구의 이야기는 내 귀에 제대로 입력될 리 없었다. 조급하고 악덕하기로 유명한 그가 아니던가. 동공에 영혼이 없는 나 때문에 모임은 금방 해산되었다. 부랴부랴 집으로 가는데 그의 두 번째 전화를 받았다.

   "야! 번호 왜 아직 안 줘? 야! 내가 지금 놀자고 이러는 줄 알아?"

   “저기, 제가 아까 밖이어서 집에 가자마자-” (뚝)


  야?

  오해할까 봐 말하자면 ‘야내가’ 조연출과 나의 사이는 지구에서 90억 광년 떨어진 별보다도 멀었다. 욕과도 다름없는 '야'라는 소리에 얻어맞은 나는 그날 이후로 연예인 전화 수첩을 분신처럼 여기며 지니고 다녔다. 시도 때도 없이 걸려 오는 전화에 노이로제가 생겨 결국 약속을 잡지 않는 삶을 살게 되었다. 수첩도 무거웠지만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업무를 통보받는 마음이 더 무거웠다. 대부분의 업무 전화가 그렇겠지만, 일로 만난 사이에서 전화한다는 건 (좋은 소식은커녕) 걱정할 일에 대한 예고나 발생을 의미했다. 미친 자는 더 미친 컨디션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을 몰랐고, 수첩보다 많은 번호를 핸드폰에 저장하는 시대는 아주 나중에 왔다. 나는 핸드폰만 울리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걱정을 뚝뚝 흘리기 시작하기 때문에 담당한 프로젝트가 없을 때면 핸드폰 보기를 돌같이 한다. 상황만 허락한다면 가족이나 애인도, 친구도 이메일 연락만 하면 좋겠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털어낸 사건만 해도 대략 이런데, 평생의 걱정을 엮으면 스타워’리’ 시리즈가 뚝딱 나오지 않을까. 왜 나는 걱정이 많을까 생각해본다. 이것은 무수한 가능성에 대한 나의 병적인 집착 때문인 것 같다. 친구와 하교하는 평범한 날의 가능성, 가족과 나란히 앉아 팝콘을 먹을 가능성, 엄마와 손잡고 집에 돌아갈 가능성, 업무능력을 인정받을 가능성 말이다. 사람들은 사실 이런 가능성의 지분을 갖기 위해 사주를 보고 타로를 뽑지 않나.

   나처럼 걱정이 많은 사람은 진실한 것, 옳은 것을 구분하느라 꾸준히 괴롭다. 주어진 대로 보기보다 요리조리 뜯어보느라 걱정하는 실력이 날로 출중해진다. 약간 타고난 불치병 같은 것이다. 사십 대에 접어들어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우매하고 초조했던 과거와 달리, 걱정을 대하는 태도가 노련해진 것이다 (뭐 하나는 역시 마스터할 줄 알았다). 걱정과 밀당하다 보면 세상이 생각보다 빡빡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세상은 빡빡하다 여기면 느슨해지고, 느슨하다 여기면 빡빡해졌다. 그것이 균형의 힘이다. 그것만 알면 걱정하는데 기운을 얼마나 쏟을지 조절할 수 있게 된다.  

   그래도 120세 시대를 대비하라는 요즘 뉴스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가능성도 커진 만큼 걱정도 오래갈 테니. 앞으로 얼마나 많은 걱정을 더 잉태할까. 안 그래도 이따 뭐 먹을지와 한 달 넘도록 가지 않은 부모님 집에 언제 가야 할지를 두고 어떤 걱정을 먼저 할지 걱정 중이다. 걱정도 팔자라는데, 이것도 실력이라나 뭐라나.


노답_ 걱정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티벳불교)

어휴... 들숨에 걱정, 날숨에 근심인 코로나 시대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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