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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트리 May 08. 2020

걱정하는 팔자의 탄생-1

마흔 특집 에세이

    나는 생기지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느라 지금이 불행한 타입의 사람이다. 지켜보는 사람은 안타까워하다가 답답한 지경에 이르는데, 제일 먼저 그 지경에 이른 건 가족들이다. 지금 내 상태가 너무 걱정돼서 지난 사십 년간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무작정 생각해보기로 했다.


1. 1990년의 일

    미아가 많았던 시절에 태어났다. 학습지와 과자봉지 뒤에는 꼬박 ‘미아를 찾습니다’에 낯선 어린이들의 얼굴이 붙어 있었다. 이름 모를 한국 영화에서는 아빠 손을 잡고 야구경기장에 간 소년이 “여기 있어, 아빠가 아이스크림 사 올게.”라는 말에 꼼짝도 않고 서있었지만, 정작 소년의 아빠가 같은 모양의 관중석 출입구를 착각해 서로 영영 만날 수 없게 됐다. 경기장의 소년은 패닉에 빠지고 안방의 나는 소년에 빙의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같이 울기 시작했다. 그 후 나는 학습지 뒤에 자주 찍혀 나오는 얼굴들을 아주 유심히 챙겨보았다. 소년과 닮은 얼굴들이 집에 가지 못하고 거기에 있었다.

    80년대 초, 뉴스에서는 유괴범을 잡지 못했다는 앵커의 목소리가 자주 들렸다. 실제로 국민(!)학교 시절에는 같은 반 친구의 누나가 유괴를 당한 적이 있다더라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떠돌았다. 그리고 4학년의 늦여름 무렵, 그것은 내 이야기가 되었다.

    그날따라 친구와 매일 같이 지나던 길이 왠지 지루하고 심심해져서 내기를 했다. 각자 다른 골목을 선택해 친구 집까지 적은 걸음 수로 먼저 도착한 사람이 이기는 게임. 내가 고른 골목길은 인기척 하나 없이 유난히 조용했다. 한껏 기울어진 오후의 그림자가 길바닥에 늘어지고 있었다. 뛰면 반칙이었기에 정직하게 걸음 수를 세며 걸었다. 한 걸음, 두 걸음... 몇 걸음 째인지 걸음 수가 헷갈릴 즈음, 책가방 뒤로 인기척이 있어 돌아보려는 순간 누군가 내 입을 덥석 막았다.

    "살려줄 테니 가만있어."


    하, 이럴 때 골목에는 왜 아무도 없을까. 우리 반 남자애는 저 양옥집 2층에서 그렇게 메롱을 하더니 왜 한 번을 내다보지 않을까. 나는 왜 친구랑 시합을 하자고 했을까. 나는 하필이면 왜 이 길을 골랐을까, 왜왜왜? 극한의 상황에도 생각들이 순서 없이 동시다발적으로 튀어나왔다. 아주 어리지도 그렇다고 늙지도 않은 남자 목소리가 귀에 대고 말했다. 가만히 있으면 살려준다고, 살려줄 테니까 가만있으라고. 그것은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목소리, 혹은 자퇴했을 목소리, 누군가의 형이나 오빠인 목소리, 지나온 공사장에 숨어있던 목소리, 한 번이 아닐 목소리, 작정한 목소리, 나를 아프게 하고 숨을 목소리, 그리고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이십 대의 목소리였다.

    가만있으면 대체 나를 어떻게 하겠다는 말인가? 나는 살려준다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순순히 말을 들으면 죽을 것이요, 안 들어도 죽을 것이므로 안 듣는 쪽을 택했다(천성이 청개구리인 걸 그놈이 알 턱이 없지). 그렇지만 열한 살의 나는 청년의 그악스러운 손아귀에 날개가 찢어지기 쉬운 잠자리나 마찬가지였다.

    도무지 벗어날 수 없었기에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다리에 힘이 풀리기도 했지만 이러면 쉽게 끌고 갈 수 없겠지, 하는 속셈이 컸다. 차가운 땅바닥에 엉덩이를 자석처럼 붙이고 조금이라도 닿는 면적을 늘리려고 다리를 쭉 뻗었다. 땅이라도 내 다리를 잡아 구해주길 바랐다. 그렇게 안간힘을 쓰면서 소리를 지르려는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너무 놀라면 소리도 안 난다는 말이 이런 건가. 나는 인어공주가 아닌데 목소리를 잃고 유괴당하는 중이었다. 패닉의 한가운데서.

인어공주는 목소리와 다리를 바꿨지만 나의 목소리를 대신할 것은 도시락 가방과 신발주머니뿐이었다. 그날 배운 굿거리장단이 떠올랐다. 소리를 내자, 뭐라도 하자. 돌 하나 굴러가지 않는 이 고요한 골목에서 나는 소리 없는 고함을 내지르며 장단을 쳤다. 덩 기덕 쿵더러러러 쿵기덕 쿵덕, 이렇게 할 여유 같은 건 당연히 없었으므로 되는대로 내려쳤다. 투닥 투닥투닥 투투닥. 지나가는 새끼 고양이의 주의도 끌지 못했다.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유괴범이 당황했는지 조금 다급해졌다. 그럴수록 나는 땅의 일부라는 생각으로 버티며 바닥을 난타했는데 패닉은 어느새 신경질로 바뀌었다. 당신이 나를 왜 유괴하려는지 모르겠는데 우리 집 돈 없다? 여기 이층 집에 사는 건 내가 아니고! 숨 막히니까 그냥 잠깐만 놔봐, 내버려 두면 진짜 가만있어줄 테니까,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응당 그리할 수 없었다.

    새로 얻은 다리로 걸을 줄 모르는 인어공주처럼 바닥에 들러붙은 그때, 모세의 기적이 일어났다. 땅이 갈라진 것은 아니고 골목의 끝, 소실점의 위치에서 두 개의 머리가 솟아올랐다. 오직 두 사람, 나의 구세주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중간에 다른 길로 가면 어쩌지 생각하는데, 내 입을 막고 있던 유괴범의 손이 삽시간에 사라졌다. 지체하다가는 들킬까 봐 내뺀 것이다.  그리고 곧 구세주들도 이 상황을 까맣게 모른 채 다른 골목으로 사라져 갔다. 그렇게 골목에는 나만 남아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는 엉덩이를 털며 일어났다. 도시락 가방과 신발주머니를 챙겨서 반칙이고 뭐고 친구의 집까지 뛰었다. 무서워서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뛰고 또 뛰었다. 친구는 아직도 멀리서 걸어오고 있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생사를 넘나들었는데 친구를 보니 시간이 길게 늘어졌다가 다시 줄어든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내가 다른 세상에 빠졌다가 돌아온 것만 같았다. 나는 다가온 친구에게 유괴미수 사건을 전했고, 친구는 집에 계신 할머니에게 전했고, 할머니는 순찰대에 전했고, 나는 엄마에게 전하지 않았다.

    내 몸을 내가 찾았으니 됐고, 집으로 돌아왔으니 그걸로 됐다. 아무것도 모르고 설거지하는 엄마에게 도시락을 꺼내놓으며 다시금 목소리를 잃은 나는 고열로 일주일간 몸살을 앓았다. 가족이 걱정할까 봐 그놈 목소리를 혼자 덮으려고 낑낑거렸다. 그것이 단순 유괴가 아니라 성폭행 미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건 세상이 날로 험악해지고 내게 2차 성징이 뚜렷하게 나타난 먼 훗날이 되어서였다. 그 이후로 나는 누군가 내 뒤에서 걸으면 몹시 불편하다.

    걱정은 골목 사이사이에 숨어있었다.


2. 1992년의 일

    그로부터 2년 뒤에는 <못 말리는 비행사>라는 영화를 보고 싶던 아빠가 서둘러 종로의 서울극장에 우리를 데려갔다. 아빠는 우리 가족 수만큼 4장의 티켓을 사서 손에 쥐고 있었다.

     아빠는 찰리 쉰을 좋아했는데 모처럼의 영화 관람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그의 신년 계획은 집을 나설 때부터 저돌적이었다. 우리가 옷을 다 챙겨 입기도 전에 아빠는 집 밖에 나가 재촉했다. 그것은 우리 가족의 외출을 알리는 클리셰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신발에 발을 집어넣으며 시작부터 조짐이 껄끄럽다 느꼈고 그 예감은 대개 맞아떨어졌다.

     종로로 가는 길. 아빠는 이런 식이었다. 모처럼 가족 모두 영화관에 간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져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의 메모리를 틀자마자 "너 이 노래 알아?"라거나, 영화 벤허를 (집에서 같이 봐놓고) 내가 혹시 봤는지 묻고 "그 감독이 자기가 만든 영화를 보고 뻑이 가서 신이시여! 정녕 이 영화를 제가 만들었단 말입니까?라고 했다지."하고 할리우드 키드 같은 레퍼토리를 읊는 와중에, 엄마에게는 길이 좀 헷갈리니까 미리미리 알려달라고 거듭 당부하면서도 그날의 조커인 찰리 쉰 카드를 꺼내는 식.

    그리고 나는 이런 식이었다. 아빠의 "그래서 그 아버지 이름이 뭐였더라?"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마틴 쉰."하고 대꾸하면 아빠가 속이 크게 후련해져서 이마를 탁 치며 역시 우리 딸이라고 치켜세운 만큼 이 외출이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로맨틱, 성공적이길 기도하는 식.


     '15세 관람가'

     로맨틱하게 도착한 영화관 간판 앞에서 나는 큼직하게 똬리를 틀고 있는 위험을 감지했다. 그날의 위기는 아빠의 성마른 성격이 아닌 내 나이에 있었다. 아빠는 이 사실을 알고도 티켓을 샀나? 엄마는 뾰족한 수가 있는 걸까? 열다섯인 언니는 자기만 아니면 돼서 태평한 건가? 포스터 안의 비행기 속에 구겨져 들어가 있는 찰리 쉰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날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다. 그의 부친 이름까지 아는 아이라는 것은 아무 혜택도 주지 않았다. 내 심장은 긴장으로 고조되어 절로 오고무를 추기 시작했다. 어떤 이유를 대고 가족과 떨어지지 않을까 실낱같은 대책을 세워보았다.

     1번. 이건 코미디 영화이고 제목도 '못 말리는'으로 시작하니까 내가 들어가도 못 말리실 겁니다.

     2번. 키스신 때문에 이러는 거라면 주말의 명화에서 이미 수없이 봤습니다만.

     3번. 위 머스트 컴백 홈.

     점점 사색이 되어가는 날 보고 엄마가 말했다.

     "넌 엄마, 아빠가 있는데 뭐가 그리 걱정이야?"

     나를 불안하게 하는 건 바로 엄마, 아빠란 말은 하지 않았다.


     역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지극히 사무적인 검표원은 나를 한번 보더니 묻지도 않고 3장의 티켓에 펀치를 뚫었다. 빵빵빵! (아빠, 엄마, 언니 입장!) 동시에 내 심장에 소리 없는 구멍이 빵 뚫렸다! 나 어떡해 나만 두고 들어가면, 그건 안돼 정말 안돼 하는 가사 같은 게 떠올랐던 것 같다. 거친 어른들의 구역인 종로였으므로 혼자 있을 상상에 눈물이 찔끔 났다(내가 이런 생각까지 했다는 걸 가족은 모르겠지). 못 말리는 아빠는 그제야 해결을 보기 시작했다. 보호자가 같이 볼 건데 이러시면 얘 혼자 어디에 있으란 말이냐는 읍소인지 항변인지 모를 목소리로. 검표원은 잠시 망설였지만 한 진상 가족이 나란히 눈에서 불을 뿜는 걸 보고 맘이 약해진 나머지 관람 제한 장면에 주의를 주며 입장을 허락했다. 그렇게 버려질 뻔한 내 티켓에 마저 구멍이 뚫렸다. 단란한 네 가족의 영화 관람이 그림처럼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나는 영화가 흘러가는 동안 엄마, 아빠와 다시는 영화관에 오지 말아야겠다는 마음먹었다. 차라리 집에서 강시 비디오를 빌려 보는 것이 나을 뻔했다. 못 말리는 가족을 만들어버린 그 영화의 결정적 장면은, 여주인공의 배 위에서 지글지글 익는 베이컨과 달걀 프라이 따위로 판명이 났다. 조금 야릇한 듯했지만 열세 살 어린이의 심장이 오고무를 추게 할 만큼은 아니었다. 코미디 감독의 상상력이 한 가족을 무참히 해체할 뻔했다. 영화관을 나오며 엄마가 말했다.

     "별것도 아닌 걸로 괜히 사람 잡았네!"

     "그니까! 이제 밥 먹고 빨리 집에 가자!" 아빠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혼자 앞장서 걸었다.

      호아킨 피닉스가 열연한 영화 <조커>가 개봉했을 때 나 같은 처지의 아이들이 많았던 것 같다. 인터넷에 15세 미만의 아이가 봐도 되냐는 질문마다 부모와 동반 관람이 가능하다는 답이 달렸다. 나는 애초에 걱정할 필요가 없었나 보다. 잘못은 애매하게 말하는 영상물등급위원회가 하고 무리수는 영화에 꽂힌 우리 부모님이 두었건만, 걱정은 왜 나와 검표원의 몫이었나. 내가 이래서 아직도 어른을 믿지 못한다.


걱정하게 냅둬, 말리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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