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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트리 Apr 29. 2020

한강을 소유하는 법

마흔 특집 에세이

    햇살 좋은 날. 한강으로 달리기 전, 나는 주의력결핍장애가 있는 것처럼 아주 산만하게 행동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날은 집 안에서 운동복을 입은 채 하루 종일 오도카니 앉아 있기 때문이다. 옷장에서 손에 집히는 대로 레깅스를 꺼낸다. 되는 대로 양말을 발에 씌우고 러닝화에 쑤셔 넣는다. 대책 없이 말려있는 이어폰(에어팟 안 씀)을 귀에 꽂고 유튜브에 접속한다. 단군 이래 돈 벌기 가장 좋은 시대라고 하던 유튜버의 신규 콘텐츠가 올라와있다. 그는 본인이 돈 버는 방법을 아낌없이 공유한 덕에 순식간에 구독자 70만 명을 돌파하는 대한 월드클래스가 되었다. 고민할 것 없이 그의 얼굴을 꾹 누른다. (햇살 세례보다 필요한 건 어쩌면 돈 세례니까.) 남자 둘이 긴하게 수다 떠는소리, 내가 댄스음악 대신 선택한 러닝 메이트이다. 이제 필요한 건? 스피드다.

    다다다닥! 쏜살같이 4층 계단을 돌아 내려간다. 마주 올라오던 택배기사가 자신의 풋스텝을 능가하는 내 발을 약 0.3초간 엄격하고 근엄하며 진지하게 훑고 스쳐갔다.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이긴 느낌이다. 이렇게 오늘도 승리하자, 나라면 할 수 있을 거야. 할 수가 있어. 그게 바로 나야. 굴하지 않는 보석 같은... 노래 그만하고 부동산 투자 전문가의 방언에 온 신경을 집중하며 골목을 나선다. 그리고 30분 경과 후, 반짝이는 한강을 내려다보며 사진을 찍는다. 한강을 본 적 없는 먼 나라 친구나, 일산 호수공원으로 만족하고 있을 선배나, 얼굴 본지 오래된 가족에게 보여주려고. 이 아름다운 장면을 좀 보시라며. 마치 강줄기가 다 내 것인 양, 새로 만난 듬직한 애인인 양 뒤통수까지 담을 새라 파노라마를 찍는다.


    그런데 왜 5분이면 닿는 한강공원에 30분 후에나 도착하냐고? 그건 내가 한 눈을 파는데 도가 텄기 때문이다. 골목길 담벼락마다 철쭉이며 라일락이 각각 튀려고 안달이다. 목련과 벚꽃에게 바통을 이어받은 아이들이다. 그냥 볼 수만은 없어 쓱 만지고 간다. 차마 엄마한테 혼날까 봐 카트에 담지 못할 과자를 몰래 만져나 보는 아이처럼. 망리단길은 어떻고? 시선으로라도 하나씩 참견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없던 소품 가게가 생겼고, 초콜릿 가게는 채광이 집어삼켰고, 기억 안 나는 옷가게가 나가고 정체 모를 밥집이 인테리어 공사 중이며, 간판 대신 벽돌에 크게 빵이라고 쓰여있는 베이커리는 크로와상이 맛있는데 아직 오픈 전이다. 그리고 잊지 마시라, 아직 나와 함께 워밍업 중인 유튜버들을.

    [집값이 오를지 떨어질지 분석이 다양하거든요. 투자하려면-]

    부동산 투자는 시기가 중요하다는 두 사람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눈 앞에 부동산이 나타난다. 내가 사는 동네는 한 집 건너 한 집이 카페이듯, 한 집 건너 부동산이기도 하다. 시세가 적힌 벽보 앞에 얼굴을 들이댄다.

    '뭐어? 13억? 작년에 12억 아니었어?'

    13억이든 12억이든, 10원으로 채워지는 130원과 120원의 차이가 아닌데 괜히 놀랐다. 슬그머니 뒷자리를 당긴 아파트는 위풍도 당당히 눈 앞에 솟아있다. 흥, 한강변 로열층 아파트는 갖기 힘들어도 한강의 로열 타임은 가질 수 있지! 그러면서 고작 엎어지면 코 닿는 거리를 빙빙 둘러서나 겨우 한강 조망대를 만난다. 여기가 나의 록키 스텝스(*영화 <록키>에서 실베스타 스탤론이 걸어올라 간 계단 -필리델피아 미술관을 말한다.)인 셈이다. 빠바밤~ 빠바밤.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야!’

    록키 발보아의 명언을 단백질 보충제처럼 꿀꺽 삼키며 허리를 비튼다. 분명 하낫둘셋넷, 다섯여섯일곱여덟!로 횟수를 세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일십백천만십만백만천만, 억십억 백억 천억조십조백조천조!로 변해있다. 동그라미를 뒤부터 세어야 겨우 백만 원인지 천만 원인지 구별하는 내가 재벌의 마인드가 되어간다. 그동안 조금도 믿지 않았는데, 확실히 운동하면 머리가 좋아지고 부자가 된다. (그렇다고 한다.)


    성산대교와 양화대교가 치맛자락처럼 늘어뜨린 그림자를 소유한 망원지구. 이곳의 한강 소유권을 주장하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다. 그중에 내가 눈여겨보고 있는 노숙인 하나가 있다. 노숙인이 노마드족이라고 알고 있다면 큰 착각이다. 그들은 노마드인 척하면서 한 번 마음 준 스폿을 절대로 떠나지 않는 습성이 있으니까. 지난겨울부터 그의 지정좌석은 농구장 구역의 맨 끝 벤치이다. 그는 태양이 작렬하든 말든 사계절 내내 패딩점퍼를 입고 다닌다. 레게를 딱히 좋아할 것 같진 않은데 손질하지 않은 긴 머리는 떡진 바람에 밥 말리와 비슷한 헤어스타일이 되었다. 구겨 신은 아디다스 운동화는 본래 하얗게 만들어졌을 테지만, 지금은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곤죽이 된 회색이다. 나이키 패딩에 아디다스 운동화, 거기다가 드레드락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강 밥 말리가 나보다 간지 나잖아? 그는 일부러 조깅에 최적화된 브랜드를 고수하는 걸까. 나는 유일하게 바람막이 재질과 비슷해서 입고 나온 파란 재킷을 부끄럽게 여몄다. (이때까지도 아직 본격적인 달리기를 시작하지 않았다. 그래서 언제 달릴 거냐고?)

    내가 아직 한 눈을 팔고 있는 건 그의 기상 후 일과가 궁금하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쉬는 시간에 교무실에서 뭘 하는지 알고 싶은, 그런 종류의 호기심이랄까. 그런데 밥 말리가 엉거주춤 바지춤을 잡고 일어났다. 내 동공에도 지진이 일었다. 어떤 건 모른 채로 놔두는 게 좋다는 본능이 들자, 그제야 뒤꿈치가 싱겁게 튀어올랐다.

    양화대교 너머 저 멀리 국회의사당 정수리가 유난히 독야청청하다. 오늘은 국회의사당과 나란히 마주 보는 지점까지, 딱 거기까지만 가보자고 마음을 정한다. 거기에 도착하면 지척에 보이는 서강대교에 한 눈 파는 나를 잘 알기 때문이다. 적당히 해라, 이러다 팔당댐까지 가겠다고. 끝도 없는 욕심을 이상한데 쓰고 있다. 정신 차려 습습! 후후! 습습!

    후후! 내 맘대로 한강을 정의해보자면 바로 ‘멜팅 그릴’이다. 다양한 인종의 용광로를 멜팅 팟이라고 하듯이, 다채로운 인간 군상들이 광합성으로 익어가는 중이라는 뜻이다. 나는 달리면서 대체로 다음 부류의 사람들을 지나친다.

- 뽕짝 메들리파

- 목장갑파

- 등산복파

- 쫄바지 라이딩파   

- 따릉이 출근파

- 달리는 백수파

- 강태공파

- 와신상담파

- 댓바람 피크닉파


    이 중에서 존재감이 가장 큰 뽕짝메들리파는 요즘 트로트가 대세라 그런지 어깨에 잔뜩 뽕을 넣고 페달을 밟는다. 그(녀)가 보이는 100미터 전부터 들리는 뽕짝 메들리로 일찌감치 알아볼 수 있다. 그저 스치는 찰나, 달팽이관이 아주 잠깐 놀라면 그뿐이다. 라이딩파 중에는 가끔 자전거를 던져놓고 한 움큼씩 뜯은 쑥을 주먹에 쥐고 있는 분들도 있다. 보나 마나 그날 그 집 저녁 메인 메뉴는 쑥 된장국이다. 이해가 안 가는 것은 목장갑 파이다. 적잖은 어머니들께서 목장갑을 끼고 잰걸음으로 사라지기 일쑤인데, 한 번은 곰이 그려진 겨울용 털장갑을 끼고 나온 분도 목격했다. 맨손의 나와 흐드러지게 핀 라일락은 그저 뻘쭘하다. 이어서 마주 오는 아빠뻘의 어르신 중 열의 아홉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형광색 등산재킷 위로 새어 나온 안광이 어찌나 오래 머물던지 몇 초만 더 흘렀어도 나는 아침으로 프렌치토스트를 먹었는데 그쪽은 무엇을 드셨느냐고 말이라도 꺼내야 하는 줄 알았다. 나 역시 관찰당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어느 파냐고? 이거라도 안 하면 죽을 것 같아서 달리는 백수파다. 곧 반그늘로 가서 와신상담파까지 겸할지 모르겠다. (따릉이 출근파가 어찌나 부러운지! 차마 볼 수 없어 감은 눈 위로 끙, 손등을 얹으며.) 이곳에서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약간의 거리를 두고 제 활동 반경만큼 한강을 갖는다. 지분은 누구에게나 있으니 모두가 평화롭고, 여기서 나는 멋져 보일 이유가 없으니 행복하다. 멜팅 그릴의 힘이다.


    그래서였을까. 한강 러닝을 시작한 이후 이상한 일이 생겼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내가 자꾸만 운동기구에 앉아 있다. 전에는 ‘관계자 외 출입금지’의 영역이라 여겨 접근조차 하지 않았다. 지난날, 하굣길에 봤던 나무에 등치는 노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윗몸일으키기, 누워서 발 구르기, 턱걸이 등을 하고 있는 어르신들 사이에 자리 잡는 게 자연스럽다. 삭신이 쑤시는 내가 바로 관계자다. 내가 바로 등치기 박치기다.

    그동안 왜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지? 트럭 운전대 같은 휠을 돌리면 어깻죽지가 갓 태어난 천사의 날개처럼 풀린다고. 오금 펴기 기구는 동네 피트니스에서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필라테스 수업에서 배운 고관절 풀기는 이곳의 스트레칭 바로도 충분하다고. 게다가 이건 모두 공짜잖아! 이렇게 좋은 걸 이제야 알다니?! 나는 혀 내밀고 지나가는 푸들을 괜히 노려보았다.

    한강은 아낌없이 주는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이다. 아, 외국 여성의 이름을 가진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로라맛사지머신’이라고 쓰여있는 기구에 꼭 등을 문질러 보자. 밤새 매질당한 머슴의 것처럼 뻑뻑하던 등이 갓 뽑은 가래떡처럼 부드러워지는 기적이 일어나니까.


    한강은 나를 혼자 내버려 둔 적이 없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날 불러 냈다.

    ‘힘들면 나와! 내가 항상 여기 있잖아.’

    이런 태도의 한강을 나는 맑은 날에만 찾지만 말이다, 이기적 이게도. 반짝거리는 물 너울 위로 작은 보트가 지나간다. 아, 나오길 잘했다.

    나는 한강의 기적을 온몸 구석구석 느끼며 집으로 돌아간다. 유튜브 알고리즘이 들려주는 경제 이야기는 이미 백색소음이 된 지 오래다. 돌아가는 길에는 록키 OST를 듣는다. 손뼉을 앞뒤로 짝짝 치면서. 펀치를 퍽퍽 날리는 시늉을 하며. 이윽고 도착한 집 계단을 오르며 록키의 만세 포즈를 따라 했다. 오늘도 해냈다, 나의 기적이다!


사진출처_Wkorea 오, 미라클 한강! 미라클 피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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