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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트리 Apr 22. 2020

인투 더 원더월 Into the Wonderwall

마흔 특집 에세이

    깨달음은 대개 엉뚱한 순간에 찾아온다. 머리를 말리는데 뒤통수가 뜨겁게 달궈진 찰나, 오늘은 무슨 팬티를 입을까 고르려는 순간, 냉장고 문을 열고 텅 빈 과일 칸을 보는 순간 갑자기 온다. 그래 놓고는 드라이기를 끄거나, 다리 사이의 바지를 배꼽까지 당겨 입었을 때, 냉장고 문을 닫을 때 다시 순식간에 사라지고 만다. 그럴 거면 왜 왔냐는 생각이 드는 것마저도 뭐가 왔는지 모르는 순간에 하는 생각이다. 자꾸만 시간이 구렁이 담 넘듯 어물쩡 사라진다. 내 것이면서 나를 껴주지 않고 흐르는 시간을 멈출 필요가 있다. 깨달음도 스크린숏처럼 캡처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의 시간을 산다. 내 시간을 주고 타인의 돈을 받는 자는 남의 시계추에 걸터앉아 좌우로 오갈 뿐이다. 시계추의 삶이란 강제적이다. 처리할 일은 연이어 밀려들고 눈을 뜨고 감는 것도 맘대로 할 수 없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남의 시간에 쫓겨 살았다. 말하자면 똥 눌 시간도 없었다. 누군가 나를 찾지 않는 시간, 오직 내가 필요 없어지는 시간에만 나는 변기를 찾을 수 있었다. 한 뼘의 공간에서 소용돌이 속으로 똥이 사라지자 투명한 슬픔이 채워졌다. 내 시간도 이처럼 누군가 손가락만 까딱 하면 순식간에 빨려 들어간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잠깐, 타임!’

    머리는 총기를 잃고 몸은 활기를 잃은 지 좀 되었다. 이 신호를 더 이상 무시하지 않아야 한다. 내가 올라탄 사회적인 진자 운동을 멈춰야 한다. 그리고 시간의 틈, 관계의 틈, 나의 틈, 가치 있는 틈을 찾아내야 한다. 틈에 빠진 자는 역설적으로 어딘가를 꽉 채운 존재가 되어 살 수 있다. 틈으로 빠지는 것은 불필요한 틈을 잃고 잊는 일이다. 그것은 나를 나로부터 구해줄 원더월(wonderwall)를 발견하는 일이다. 이쯤에서 나는 끊어가기로 했다. 일도 끊고, 사람도 끊고, 여행 티켓도 끊고, (똥도 끊고). 마흔의 깨달음은 그렇게 찾아왔다.

*

*

    오래전, 한 선배는 <인투 더 와일드(2007)>라는 영화를 보고 나를 떠올렸다고 한다. 내가 앞뒤로 몸집 만한 배낭을 메고 1년이 넘는 남미 여행을 떠났던 서른 즈음이었다. ‘스타 주니어쇼 붕어빵’이란 프로그램을 그만두고, 나는 나만의 시간을 살기로 결심했었다. 먼 땅으로 가서야 겨우 얻은 나의 시간은 먹고 자는 것만 빼고 완전한 자유로 이루어졌다. 심지어 먹고 자는 것 마저도 큰 제약이 없었다. 침대는 어디에나 있었고 도처에서 식사초대를 받았다. 한국에서 그토록 찾아다녔던 행운들이 그곳에서 죄다 기다리고 있었다. (파랑새를 어깨에 얹고 다니는 느낌이었달까!)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만나고 싶은 사람만 만나는 시간들로 틈을 채워갔다. 친절과 사랑은 매끼마다 주식으로 먹고도 남았다. 이렇게 즐거워도 될까, 하는 의문이 생길 만큼. 독립투사처럼 살아온 일촉즉발의 삼십 년을 다 보상받을 만큼.

    그렇게 나는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행복한 게으름뱅이가 되었다. 게으름 뒤에 딸려오는 죄책감 때문에 가끔 이 편의 친구들에게 보내는 엽서에는 매우 한국적인 고민과 상실감을 쓰기도 했다. 저 편의 마법 같은 시간은 비공개로 하고. 사막에 안긴 한 알 모래가 된 채 살아가는 기분은 오로지 나만의 것이어서. 말해도 모를 이상하고 이상적인 시간들이어서.

    이 편에는 틈으로 사라진 나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있었다. 내가 영영 돌아오지 않을까 봐, 생존 신고 삼아 종종 올리는 페이스북의 사진도 끊길까 봐 걱정하던 존재들. 남의 시계추에 타고서도 틈을 내 나를 그리워하던 사람들. 손에 잡히지 않는 내가 되어서야 나는 다시 사랑받았다. 내가 야생으로 향하여 곰과 싸우지 않고(그럴 수도 없지만!), 시장으로 향하여 아보카도와 망고를 상대하는 것이 이들의 다행이고 기쁨이었다. 그들의 지지와 응원을 받으며 평생을 통틀어 스스로에게 가장 관대하고 다정한 나의 시간을 살다 왔다.

    그렇게 긴 여행을 마치고 만난 선배가 영화 속의 남자와 내가 오버랩되더란다. 집에 돌아와 나와 닮은 사람이 나온다는 그 영화를 곧바로 찾아봤다. 나처럼 자기만의 틈으로 걸어 들어갔던 남자가 죽으면서 남긴 메시지 하나를 보여주며 영화가 끝났다.


    ‘행복은 나눌 때 의미가 있다.’


    피할 길 없는 허무가 엄습했다. 과히 옳다고 절감했기 때문이다. 자칫 ‘이러려고 여행했나, 자괴감 들고 괴로워’로 해석될 수도 있는 결론이었다. 멀리 떠난 길 위에서 몸으로 질문을 던졌던 그가 찾은 답은, 실로 너무 가까이에 있던 것이기에 허무했고 그렇기에 깊은 울림을 주었다. 사유의 사투 끝에 도달한 지점에 결국 ‘사람’이 있었다. 발버둥 쳐서 겪은 고통도 기쁨도 ‘공유’하는 데 진정한 의미가 있다. 그는 영영 자신의 원더월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말았지만 나는 다시 사람의 곁으로 돌아왔다. 그것도 더 많은 사람을 얻어서.

    비로소 내가 집으로 돌아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누자. 나는 보다 사람을 좋아하게 됐고, 보다 자유로웠고, 보다 너그러워졌고 보다 강해졌다. 무엇보다 기억할 장면과 순간이 많아진 내가 참 좋았다. 좋은 것은 나누어야 하니까 나는 나(의 이야기)를 나누며 살았다. 꿀벌처럼 내 다리에 묻혀 온 꽃가루 같은 이야기를 소중한 사람들에게 수분하고 싶었다. 누군가의 시간과 수정하여 의미를 틔우고 싶었다. 어느덧, 나는 사람들에게 여행의 얼굴이 되었다. 친구들은 자주 서울이냐고, 지금은 어디에 있냐고 묻곤 했다. (친구야, 나 집인데.)

*

*

    그로부터 십 년이 흘러, 나의 위치는 다시 하얀 변기 앞이다. 걸어서 남의 시간 속으로, 결국 허덕이는 보통 사람으로 돌아간 한 사람의 좌표. 더 묵직해진 시계추의 진자운동과 하수구로 쏴-하고 빨려 들어가는 물살은 지구의 자전만 눈치채게 할 뿐, 자전이 내게 약속한 24시간은 달군 프라이팬에 던져진 버터처럼 순식간에 녹아버린다. 이 와중에 세상의 흔한 계략들도 때맞춰 나타나 뻐꾹뻐꾹, 뻐꾸기를 날린다. 그것들에 무례하지 않으려다 내 몸에 무례를 범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사십 대가 되었다. 어딘가에 뚫려있는 나의 원더월이 그르릉 그르릉 울고 있다. 다시 자기를 찾으라고, 어서 찾아오라고.

    어서 그 틈을, 구멍을, 내 시간을, 내 세계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래서였는지 일하지 않을 이유는 생각보다 금방 나타났다. 몸이 병나고, 마음이 병났다 (혹은 마음이 아파서 몸이 아팠던지). 항암치료로 고생하던 엄마 앞에서 내 몸의 울음이 티 날 만큼 사람이 아주 못 쓰게 됐다. 나를 잘 아는 지인들의 입에선 이런 걱정들이 쏟아졌다.

    “몸이 먼저지, 일이 대수냐?”

    “너 여행 좋아하잖아. 여행 좀 다녀와.”

    “아무 생각 말고 어디라도 가서 살다가 와.”

    “발리가 너랑 딱인데, 거긴 어때?”

    예전처럼 배낭 꾸려서 인투 더 월드 하면 되지 않냐고?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서른은 청춘의 세례를 받아 길 위의 기회에 주목할 수 있다면, 마흔은 심신의 비루함으로 길의 고달픔을 먼저 생각하니까. 치러야 할 기회비용까지 고려하면 복잡해졌다. (관점과 마음가짐 혹은 능력의 문제이긴 하다.) 엉덩이가 무거워질 만한 일로 갖은 핑계를 대지만 실은 근본적으로 불안과의 싸움에서 내가 진 게 문제였다. 남다른 경험을 나은 현실로 전환하지 못한 나의 낙담 때문이다. 묵은 이야기가 시간에 대한 조바심과 빈약한 현재를 위로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구글맵을 펼쳤다. 공항이 지어진 모든 곳에 착륙할 가능성을 열어두고 예약을 걸어두었다. 항공권 예약 리스트에는 폴리네시아의 인적 드문 섬도 있었고, 세계적인 신혼여행지도 있었고, 순전히 친구가 살아서 고른 나라도 있었다. 이렇게 중구난방의 예약을 건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진짜로 가고 싶은 곳이 없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티켓팅도 했지만 도무지 결연한 마음이 들지 않아 하루 전에 적잖은 수수료까지 날리며 취소했다. 마지막 빤쓰끈이던 여행 티켓을 물린 날, 내 방에서 현관까지의 거리가 인천에서 남태평양까지의 거리보다 멀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떠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이것은 깜짝할 새에 사라진 수많은 생각처럼 휘발되지 않았다. 오히려 닻을 내리고 오래 정박할 모양이었다. 가장 자신하던 것을 못하게 되니 부끄러워 숨고만 싶어 졌다. 그래, 가장 멀리 떠나는 것은 가장 가까운 곳으로 숨어버리는 게 아닐까. 숨바꼭질은 원래 등잔 밑에서 하는 법. 모두가 떠난 줄 알게 놔두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작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기 한참 전에 시작된 자가격리였다.)


    나의 두 번째 원더월은 바로 나 자신이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깊고 어두운 틈으로 빨려 들어간 기분이다. 한동안 일을 하지 않았다. 내 몫이 남을 줄 알고 실컷 양보하다 한 방울도 남지 않은 콜라병을 거꾸로 들고 혀를 날름거리는 짓은 그만두었다. 모두가 저 좋은 것을 먼저 잡는데, 다 잡고 남은 것을 먹겠다고 하는 미련한 짓은 안 하기로 했다. 나는 나를 좋아했으니 나를 먼저 고르기로 했다. 아이스크림이 가득 담긴 봉지 속을 뒤적거리다가, 찬란한 은색으로 빛나는 바밤바를 꺼내는 일처럼. 그랬더니 절로 분리수거가 되었다. 내게 얻을 것이 있었던 사람은 물러가고, 나와 나누려는 사람과 내가 나누고픈 사람만 남게 됐다. 지구가 자정작용을 하듯 나의 시간이 깨끗해졌다. 거기에 평화와 불안이 공존하는 기묘한 시간이 채워지고 있다.


    나는 스스로 증명해야만 한다. 내가 사라진 시간의 가치를. 사회적 표준으로 나를 증명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다만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나 있는 사람으로 사는 극적인 이벤트로 얻은 생의 전리품을 가져야 한다. 어쩌면 이러다가 타임 아웃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어떠랴, 제시간에 못 맞춘다고 내 인생이 끝나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라도 짐짓 넉넉한 척을 해본다. 마침, 뜸했던 친구한테 전화가 온다. 분명 지금 어디냐고 물어볼 테지.

    '응, 평화와 불안 사이 어디쯤이야.’

더 나누며 살기 위해 배수진을 치고 나는 내 안에 칩거 중이다. 다행히 내일도 나의 시간이다. ‘내일’을 맞는 것이 바로 ‘내 일’이 되었다.


걸어서 내 시간 속으로. mexico, oaxaca, 2010 @hor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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