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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트리 Feb 05. 2020

평창동 아니고
망원동 살아요

마흔 특집 에세이

네, 평창동입니다~~~.


 나는 어릴 때 드라마 속의 사모님들이 두 동네에 모여 살았다고 생각했다. 아침드라마의 사모님은 평창동에 살았고, 주말드라마의 사모님은 성북동에 살았다. 집에 전화가 걸려오는 신에서는 ‘누구’의 집이라고 하기보다는, 반드시 행정구역상의 동네 이름을 알린 후 고고한 사모님을 찾아 바꿔줬다. 그게 이상했던 나는 엄마한테 물었다.

 “엄마, 평창동에는 저 집만 있어? 저렇게 받으면 누구네 집인지 어떻게 알아?”

 엄마는 드라마라서 그렇다고 했다. 드라마처럼 살고 싶었던 나는 물었다. 

 “엄마, 우리도 전화받을 때 ‘네, 목동입니다’라고 해볼까?"

 엄마는 그렇게 받아보라고 했다. 마침 엄마 친구 의숙이 아줌마한테 전화가 왔었다.

 "네, 목동입니다아!"

 [어 그래, 엄마 집에 있니?]

 드라마 대사처럼 전화를 받아도 수화기 너머의 사람들은 우리 집인지 잘만 알았다. 그래서 그게 꼭 드라마의 설정인 것만은 아니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동네 이름이 얼마나 많은 삶의 조건들을 의미하는지 조금도 짐작할 수 없던 나이였다. 


 삶의 조건을 좀 따질 줄 아는 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인간의 조건에는 자기만의 공간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나이가 들수록 엄마의 방식과 나의 방식은 합의점을 찾기 곤란해졌다. 주말이면 테마파크의 데시벨을 달고 언니 가족들이 찾아왔다. 나는 고요하게 지낼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가 시골의 폐가라도 고요하고 거룩한 공간이라면 들어가 살 작정이었다. 

 그 거룩한 공간을 찾다가 서른 중반이 넘어서 망원동에 도착했다. 망원동은 내가 잉태된 곳이라고 했다. 이곳에 살던 엄마 뱃속에서 나는 콩알만 한 크기인 주제에 많은 것을 해냈다. XX염색체를 구성하고, 쌍꺼풀을 갖지 않기로 정하고, 숱 많을 머리를 키웠으며, 숫자보다는 언어에 소질이 있는 존재가 되기로 결정했을 것이다. 

 일부러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가 되기로 했던 것은 아닌데, 어떻게 하다 보니 이 동네가 레이더에 잡혔다. 본가에서 너무 멀지 않으면서도 거리감을 분명히 느낄 수 있는 지형지물을 우리 사이에 두어야 했다. 한강과 양화대교였다. 한강은 맘만 먹으면 금방 건너갈 수 있으면서도, 붙어살다 보니 악화되어 가는 관계를 식혀주는데 최고의 역할을 할 것이었다. 그래, 여기가 명당이로다!


 내가 첫 독립생활을 시작할 집이 궁금했던 엄마와 아빠는 입주 전 어느 일요일, 망원동을 함께 돌아보기로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 몸을 맡겼던 곳에 오면 온갖 상념이 떠오르는 법이다. 엄마는 막상 잊고 살았던 동네에 오자, 기억을 퍼내듯 바가지를 들었다. 막 걷기 시작한 언니, 아빠가 퇴근할 때 오던 길목, 무심한 아빠 때문에 된통 싸웠던 날을 떠올리다 다시 서운해진 엄마. 

 “내가 그때만 생각하면!”

 “어? 잘못 들어왔네?” 아빠는 신속하게 핸들과 함께 말을 돌렸다. 

 그때만 해도 도심 속의 시골 마을 같았던 망원동의 임대차 보증금은 내 통장 사정을 봤을 때 ‘되는’ 판이었다. 한강이 가깝고 촌스런 정서를 가진 낡은 동네, 사람들에게 닳지 않아 후진 것이 나는 좋았다. 30년 이상 된 빌라와 다가구 건물에는 (그 당시 감나무가 유행이었는지) 담벼락마다 감 없는 집이 없었다. 일 년간 눈팅하며 연구한 망원동은 마침 장미여관의 육중완이 방송에서 옥탑의 작업실 생활을 공개하며 인기가 급상승했다. 판도라의 뚜껑이 열린 것이다. 이 동네에 숨은 매력이 많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나갔고, 그 소문들은 집값을 서서히 달구기 시작했다.

 역시 세상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그 소문들이 몸집을 불리다가 조용한 골목 어귀에 더 조용히 세든 나를 찾아와 펀치를 날렸다. 감나무를 같이 바라보며 감이 열리면 한 소쿠리 준다던 집주인의 촉촉한 목소리가 채 마르지도 않은 날이었다. 너무 빵빵한 온정은 순식간에 빵 하고 터질 수 있다는 것을 아시는지.


 감을 준다던 집주인이 ‘별안간’에 할 말이 있다며 심상찮은 예감을 대신 전했다. 그는 집이 팔렸으니 두 달 이내에 나가 달라는 청천벽력의 소식을 떨리는 목소리로 전해왔다. 그 떨림은 막 이사 온 세입자에게 못 할 짓을 하기가 겁도 나고 미안도 한데, 뻔뻔은 해야만 원하는 바를 이룰 테니 철판을 깔자 다짐하였어도 이런 기막힌 상황에 대한 책임과 질타는 피할 수 없겠다는 걸 감지한 사람의 성대가 내는 소리였다. 내 고막에는 그 떨림이 감나무가 뿌리째 뽑히며 동네 지붕을 강타하는 소리로 들렸다. 

 우당탕탕.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도 났던 것 같다.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새 출발을 축하하는 뜻으로 지인들이 선물한 가스레인지에 도시가스를 막 연결한 참이었다. 서울특별시의 에너지가 내 이름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난생처음 서울시민의 책임과 의무를 깨닫고 자긍심에 고취된 직후이기도 했다. 가스가 내 이름으로 들어오다니! (나는 솔직히 좀 신기했다.)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고 냅다 집을 팔아버린 아주머니는 ‘아가씨는 미래가 창창한데 뭐가 문제냐’는 마지막 훅을 날렸다. 그리하여 나는 더 이상 상냥한 세입자의 캐릭터를 유지할 수 없게 됐다. 나는 ‘그러게 왜 창창한 사람 앞길에 돌을 던지시냐’며 어울리지 않는 깡을 한 번 부렸는데, 결국 서로 얼굴을 붉히고 돌아서는 결과만 초래했다. 

 물난리만큼 무섭다는 돈 난리였다. 이미 자본가들이 망원동을 두고 계산기를 두들긴 후였다. 졸지에 집을 잃을 예정이 된 나는 친구들과 머리를 맞대고 용기를 모았으나 그런다고 우리가 갑자기 세일러문이 되진 않았다. 용서하지 않겠다고 외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서울시의 지혜를 수혈받아야 했다. 나의 간절한 전화를 받은 서울시 전·월세 세입자를 위한 상담부서의 상담원은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은 그 집에서 살 권리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건축업자들은 세입자가 못 버티고 나가길 바라다보니, 쓰레기나 위험한 물건을 집 앞에 투척한다든지 새벽에 공포감을 조성하는 등 갖은 횡포를 부리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감당할 수 있다, 없다, 있다, 없다. 빌어먹을 감나무 잎을 하나씩 떼며 묻고 싶었다. 가족을 포함한 지인들 모두 상담사가 말한 고약한 해코지가 벌어질 것이다에 아홉 손가락을 걸었다. ‘만의 하나’도 아니고 ‘자주’라는 말에는 불길한 위력이 있었다. 벌어지지 않을 일도 벌어지게 만드는 힘. 나는 소심해지고 말았다. 그 짧은 순간에 서울시민의 자긍심은 세입자의 설움으로 바뀌었다. 

 나는 한 달간 몽유병에 걸린 사람처럼 부동산을 찾아다녔다. 집을 볼수록 그동안 부모님 집에서 무료로 안전과 보호를 보장받고 살았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주머니 사정이 다양하듯 집의 모양과 상태도 다양했다. 독립의 첫 단추가 떨어져 나갔으니 망한 게 아닐까 하는 나를 자취 선배들인 지방 출신의 후배들이 위로했다.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만하길 다행이라고. 집은 또 있다고. 그저 눈만 낮추라고. 

 살 곳을 잃은 나는 그만, 좀 더 비싼 건너편의 서교동으로 이사해 2년을 살았다. 새 집주인은 나보다 한참 어렸다. 계약서에 적힌 주민등록번호 앞자리를 보며 성실하기만 했던 나의 지난날에 약간 울컥했던 것도 같다. 

*

*

 금수저 집주인과의 계약을 청산하고 다시 망원동으로 건너왔다. 다시 한번 부동산의 불분명한 처우, 집주인과의 밀당, 기존 거주자의 수상한 비밀 등 모든 것이 여전히 내게는 사막의 모래바람같이 서걱거렸다. 사사건건 안면을 강타하고 뒤통수를 후려쳤으며 내 집인가 하고 가보면 신기루였다. 그래도 신기루 속에서 발견한 집 하나를 계약하여 지금껏 살아오고 있다. 현관부터 망원시장까지 5분도 채 안 걸리니 장세권이다. 

 그러나 이제 이곳에는 유모차를 밀고 다니는 할머니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내가 집을 잃고 얻고 하는 동안 나들이를 삼갈 정도로 나이가 드신 걸까, 아니면 인증샷을 찍는 젊은 무리들 때문에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희미해진 걸까. 한적한 길 사이로 사람 냄새가 풍기던 망원동의 한때가 그리워진다. 오늘도 오랜 국밥집과 철물점이 있어 여행 온 기분이 들었던 거리가 어느새 인스타용 맛집을 찾아 사랑을 살랑이는 청춘남녀로 가득하다. 이런 망원동에 산다는 것은, 때론 축복이고 때론 지옥이다.


 내 몸을 놓아둘 곳을 정한다는 것은 엄청나게 중요한 일이다. 어릴 때는 부모님의 선택에 맡겨진 운명이었지만 어른이 되면 자신을 어디에 놓을지 선택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 신경림의 ⌈내가 살고 싶은 땅에 가서⌋라는 시의 첫 구절 '이쯤에서 길을 잃어야겠다’와 비슷한 의지를 장착하고 동네를 골라야 한다. 나라는 사람이 어디에 놓이면 어울릴지, 행복할지, 오래 버틸 수 있을지를 두고 하는 의식주 실험이니까. 

 첫 실험은 보통 실패하게 되어있지만, 성공하기까지 거듭해야 하니 정신을 단단히 무장해야 한다. 이것은 보증금과 월세가 알맞고 역세권이라고 해서 이기는 싸움도 아니다. 동네의 공기와 이웃의 취향이 나와 맞고, 단골 삼을 카페가 근거리에 있고, 낮과 밤의 낯빛이 맑아야 이긴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집 사이를 지나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한강 다리가 보이는 고층 타워에서든, 사람의 다리가 보이는 반지하에서든. 어디서라도 잠을 자고 먹고 입는, 사람의 짓을 해야 하니까. 

 누군가가 어디 사냐고 물었을 때, 나는 전화를 받는 시늉을 하고 말한다.

 “네, 망원동입니다아~~~” 


 형편이 구겨져 가던 어느 날, 양화대교를 건너 본가에 갔다. 가자마자 냉장고를 열었다. 예전처럼 뭐 먹을 게 없나 찾아보는 나를 엄마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엄마는 아무 말도 없었지만 나는 다 듣고 말았다(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그저 바라보면). 

 '나갈 땐 맘대로 나갔지만, 들어올 땐 맘대로 안 되는 거 알지?'

 나는 아빠의 놀이터로 바뀐 내 방을 보며 쓴 입맛만 다신다. 


노답_ 천국을 찾아 나와서 지옥에 전입신고를 했구나.


I Had 39 years to prepare, So they kicked me 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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