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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유진 Jul 09. 2016

이해되지 않는 것들과의 유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1951)

*결말 포함*


언제부터였을까. 나와 주변은 이해되지 않는 것들 앞에서 불쾌감부터 느낀다. 수많은 사람과 사건들 사이에서 이해하고 이해받는 일이 나의 생존과 직결되었기 때문일까. 어른이 되면서, 이해는 투쟁이 되어버렸다.


이해하려고 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이해할 수 없음을 이해하려고 하면서 살뿐이다.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 이해되지 않아도 좋다는 생각은 아주 가끔만 하며 지내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까짓것 이해도 환대도 받지 못한들 아무 상관없다는 각오는 버릇처럼 자기 위안 삼고 있다.


그런 상념들 속에서 뜻밖의 즐거운 일탈이 되어준 것이 고전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였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도무지 이해 불가능한 것들을 통해 괴랄한 재미를 추구하는 작품이니까.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소녀 앨리스가 말하는 토끼를 쫓다가 이상한 나라로 가게 되어 겪는 모험담이다. 딱 거기까지만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사실 내가 그랬다. 토끼를 쫓아간 다음에 이야기가 어떻게 되었는지 잘 몰랐다.


팀 버튼 감독이 각색한 영화가 유명하지만, 오늘은 반세기가 지난 추억의 디즈니 애니메이션으로 찾아보는 것을 추천하려고 한다. 검색해보면 의외로 어렵지 않다.


앨리스와 그녀의 고양이 다이나
앨리스가 쫓아가는 시계토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미쳤다. 정상적인 것이 하나도 없다. 모험의 주인공인 앨리스 또한 마찬가지다. 사실 앨리스는 시계토끼를 발견하기 전부터 자신만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들이 뒤죽박죽이 될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죄송해요. 하지만 어떻게 그림 없는 책에 집중할 수 있겠어요?"

"내 사랑하는 아가야. 이 세상에는 정말 좋은 책들이 많이 있단다. 그림이 없어도 말이야."

"이 세상에서는 그렇겠죠. 하지만 제 세상에서는 그 책들은 그림 말고는 아무것도 없을 거예요."

"너의 세상이라고? 말이 안 되는구나."

"말이 안 된다고요? 바로 그거야, 다이나. 만약 내가 내 세상을 가졌다면, 모든 것이 말이 안 될 거야."


토끼를 쫓아간 앨리스는 자신의 몸이 가파른 땅굴 속에서도 다칠 염려 없이 아주 천천히 떨어지거나, 매 순간 눈 앞에 탁자나 물약 따위가 새로 생겨나는 의뭉스러운 상황들에 대해서는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 대신 그녀는 그녀 자신이 누구인지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현실세계와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으니 자기 정체도 확신하기 어려운 것이다. 애니메이션에서는 일부가 생략되었지만, 원작에서는 앨리스가 친구들을 하나씩 떠올리며 자기가 그중에서 누가 되어버렸는지 의심하는 장면이 있다.


앨리스는 토끼를 쫓아가면서 계속 기묘한 상황들을 맞닥뜨린다. 물약을 마시고 거인이 되어버린 그녀는 당황해서 그만 펑펑 우는데, 이때 흘렸던 눈물이 홍수를 이룬 나머지 몸이 줄어든 뒤에는 그 눈물에 빠져 어디론가 실려가게 된다. 간신히 다다른 육지에서는 새들이 쉼 없이 달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다들 밀려드는 파도에 온몸을 흠뻑 적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앨리스에게 너도 함께 달리면 몸이 마를 거라고 한다. 그녀가 새들을 제치고 숲으로 들어가자 이번에는 밀랍인형 한 쌍이 등장해서 바다코끼리와 굴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한참을 다 듣고 보니 토끼의 행방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다.


숲에서 빠져나온 앨리스의 눈 앞에 드디어 토끼의 집이 등장한다. 그런데 앨리스가 토끼에게 말을 걸자, 토끼는 엉뚱하게도 앨리스를 메리 앤이라고 부르며 장갑을 찾아오라고 시킨다. 얼떨결에 메리 앤이라고 불린 앨리스는 집안을 뒤지다 말고 무심코 주워 먹은 쿠키 때문에 다시 거인이 되어 토끼의 집을 거의 부술 뻔한다. 당근을 베어 먹고 다시 키가 작아진 앨리스는, 이번에는 너무 작아진 탓에 발 빠른 토끼를 놓치고 만다.


토끼를 놓친 앨리스는 정원 속 꽃들과 함께 합창을 하고, 담배를 피우는 애벌레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녀는 버섯을 먹음으로써 마침내 그곳을 거닐기에 적당한 키를 갖게 되었지만, 여전히 토끼를 찾는 법 또는 그곳을 여행하는 방법은 오리무중이다. 그녀가 떨어진 이 세상이 어디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길가의 이정표들은 아무 방향이나 가리키고, 그녀 역시 아무 데나 가면 된다. 별안간 나타난 체셔고양이 한 마리가 느긋한 태도로 이 사실을 확인시켜줄 뿐이다.


"고맙지만 전 제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길을 묻고 싶어요."

"글쎄, 그건 네가 어디에 가고 싶어 하는가에 달렸어."

"그건 정말 상관없어요. 제가 갈 수 있기만 하면?"

"그러면 정말 상관없네. 네가 어떤 길로 가든지."


앨리스는 체셔고양이의 안내에 따라 또 다른 토끼인 3월 토끼의 집을 방문하게 된다. 그곳에서 3월 토끼와 미친 모자 장수는 '생일이 아닌 날' 축하 파티를 벌이고 있다. 정신없는 그 파티에서 빠져나와 다시 혼자가 된 앨리스는 실의에 빠진다. 그러자 체셔고양이가 다시 나타나 이번에는 그녀를 왕비가 있는 곳으로 데려가 준다.


왕비는 누구든 자신의 심기를 거스르면 바로 목을 베어버리는 포악한 폭군인 탓에, 그녀와 크로켓 경기를 하던 앨리스 또한 결국 재판을 받게 된다. 앨리스는 재판에서 도망치면서 그동안 왔던 길을 되돌아가게 되고, 길의 끝에서 사실은 낮잠에 빠져있었던 자신을 보게 된다. 즉, 그 모든 게 앨리스의 꿈속에서 일어난 일이었던 것.



체셔고양이
미친 모자장수와 3월 토끼의 티파티에 참석한 앨리스
동물들을 가지고 크로켓을 치는 왕비


 

사실, 이상한 나라를 모험하는 앨리스의 그 이상한 태도는 평소 내가 관찰한 꿈속에서의 나의 모습과도 비슷한 면이 많았다. 앨리스는 이상한 나라를 이해하기를 포기한 것 같기도 하고, 그녀의 우려대로 판단능력 자체를 상실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가끔은 눈 앞의 것들에 대해 화를 내거나 비난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말도 안 되는 상황에는 별일 아니라는 듯 태연자약하다. 나도 모르는 새에 무언가에 설득 당해 나아가거나 행동하다가도, 때로는 현실의 그것처럼 당황한다. 슬퍼하거나 두려워하면서 울고, 무언가에 쫓기면 필사적으로 도망친다.


이상한 나라에서 이렇다 할 개연성 없이 계속 비논리적으로 연결되는 공간과 상황들 역시 실제 우리가 꾸는 꿈의 모습과 닮아 있다. 다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들려주는 꿈 이야기는 의미심장한 예지몽이라기보다는 어안이 벙벙한 개꿈에 더 가까워 보인다. 속내를 헤아려볼 만한 것이라고는 가끔 솔깃하게 들려오는 몇 가지 대사가 전부인 부조리극이라고 해야 하나.


앨리스만큼 본성이 천진난만하거나 엉뚱하지 않아도 우리는 충분히 난해한 꿈을 꾼다. 꿈의 내용이 난해하고 개연성이 없는 이유 중 하나는 무의식을 의식이 검열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무의식 때문에 일어나는 환상이라 하더라도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거나 기분 나쁜 장면들을 피하고자 의식이 이에 개입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꿈속에서는 무의식 속 진짜 소망과는 다르게 사람이 뒤바뀌거나 상황이 각색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앨리스가 꿈을 통해 자신만의 비현실적인 세상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자고 있는 동안에는 현실적인 사고를 할 필요가 없다'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꿈을 꾸는 이유는 바라는 것이 있어서, 또는 두려워하는 것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라고 한다. 유독 달콤하거나 괴로운 꿈을 많이 꾸었던 시기에는 정말로 그런 것들이 넘쳐났다. 그래서 한때는 '꿈을 안 꾸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단순히 꿈자리가 사납고 복잡해서 피곤한 탓만이 아니었다. 그런 꿈들은 설령 왜곡되어 있어도 가리키는 바가 명확했다. 내가 기쁠 수 없는, 또는 외면하고 싶은 현실이었다. 잠을 자는 동안에도 현실에 몰두하느라 휴식을 취하지 못하는 거다. 그렇게 눈 뜨는 새벽은, 마치 현실에서 현실로 돌려보내지는 기분이었다.


아무 논리도 근거도 없는 멍멍이꿈이 차라리 반가운 건 어쩌면 그런 탓이다. 애써 머리를 굴릴 필요가 없다. 그냥 생각이 멎는다. 말이 안 되는 것 앞에서 말문이 막히는 원리다.


생각을 정리한다고 마음의 번잡함이 사그라드는 것은 아님을 알게 되어서. 가끔 생각을 멈추고 싶은 순간들이 존재하게 되어서. 그렇게, 이해할 수 없는 작품을 마음 가까이에 두는 법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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