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유진 Oct 21. 2016

책 읽어주는 남자, 도피하는 여자

더 리더 (2008)

* 결말 포함 *


죽은 모기, 눅눅해진 수건처럼 꺼림칙해진 어떤 것들이 불현듯 나 자신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가끔, 지나간 영화를 고르는 일이 그렇게 나를 이입할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 오래전 우연히 영화 <더 리더>를 보고 나서부터는 더욱 그렇게 되었다.


케이트 윈슬렛이 연기한 <더 리더>의 한나는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문맹이다. 어린 연인인 마이클이 학교에서 돌아와 그녀에게 책을 읽어준 뒤 사랑을 나누는 것이 그들의 하루하루였다. 어느 날 갑자기 종적을 감춘 그녀는 수년 뒤 법대생이 된 마이클 앞에 죄수의 신분으로 다시 나타난다. 놀랍게도, 그녀가 아우슈비츠의 간수로 일하면서 수많은 유대인들을 사지로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자존심이 강했던 그녀는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이 밝혀질까봐, 함께 재판을 받던 다른 간수들의 거짓 증언과 자료를 그대로 뒤집어쓰고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세월이 흐르고, 예전의 그녀만큼이나 나이를 먹은 마이클은 감옥에 있는 그녀에게 책을 녹음한 테이프를 보내주기 시작한다. 그의 책읽기는 어린 시절의 그것만큼이나 열성적이다. 그러나 그는, 덕분에 글을 깨우친 그녀의 아이 같은 손편지에는 단 한 번도 답장을 보내지 않는다. 그의 감정은 사랑이라기엔 이미 해묵었고, 그녀에 대한 연민, 야속함, 그래서 그녀를 질타하고 싶은 감정, 한때 그녀의 집에서 그녀란 그의 유일한 우상이었지만, 밖에서, 적어도 '죽음' 앞에서는 외면하고 싶은 죄인이니까. 마이클에게는 그 모든 감정들이 한데 뒤섞여 회색의 끈끈한 반죽이 되어버렸을 거다.


<더 리더>의 이야기는, 담담하지만 뜨거웠다. 시린 발끝을 미지근한 목욕물에 담갔을 때 살갗을 콕콕 찔러오던 그 착각 어린 열감과 통증을 연상케 했다. 마음이 철렁거렸다.


10대에 불과한 소년과 원숙한 여인이 발가벗은 몸으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똑똑이 보았음에도 헤어진 그들이 법정에서 피고인과 참관인으로 재회하게 될 것을 예상하지 못했고, 유대인 대학살과 수용소에서 있었던 화재 사고의, 심정적으로 공감할 것을 마지않는 그 비극의 무게에 비해 너무나도 엷고 얕은 한나의 표정 사이에는 놀랄 만큼의 깊은 괴리가 있었으며, 그러면서도 슬픈 이야기에 목 놓아 울거나, 아이들의 합창에 눈물짓고, 승진했다는 이야기에 망연자실하고, 조심스럽게 도서관에 발을 들이는 그녀의 얼굴에 떠오르던 그 감정의 조각들은 따갑도록 눈에 밟혔다.


그리고 나에게 가장 뜨거웠던 장면은, 그녀의 자살이었다.


교도소에서 걸려온 전화에 못 이겨, 마이클은 한나가 석방을 일주일 앞둔 시점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녀의 면회를 온다. 그가 돌아간 후, 한나는 교도소 안에서 목을 맸다. 간수들이 먼저 발견하게 될 자신의 짤막한 유언장에서, 그녀는 얼마 되지 않는 돈을 마이클을 통해 그 화재의 유일했던 생존자의 혈육에게 보내줄 것을, 그리고 마이클에게는 오직 "안녕(Hello)" 한 마디를 전해줄 것을 부탁한다.


참 그녀답다. 그녀는 글을 읽고 쓸 줄 모른다는 자신의 수치를 차마 밝힐 수 없어 차라리 누명을 쓰는 것을 택했을 정도로 자존심이 강한 여인이었다. 오랜 시간 간곡한 마음 끝에 마주한 마이클의 냉담하고 떨떠름한 표정과, 과거는 생각해보았냐는 원망 섞인 질책 한 마디에, 그녀는 고장 난 타임머신처럼 옛 추억에 사로잡혀있는 것이 오직 자신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에게 그녀는 그저 수감자였다. 만약 그와 여생을 함께 할 것을 기대했다면 그 공상 또한 영영 회복할 수 없는 수치로 남았을 것이다.


이제 그녀에게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 그를 원망할 수는 없다. 다만 교도소 안에서 정체된 삶을 살고 있던 그녀에게는 이제 자신의 과거를 되풀이하는 일만이 남았다. 그가 손가락질한 과거를. 멀찍이 타인이 되어버린 그에게는 그 어떤 감정도 드러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도움을 받으며 그가 없는, 정확히는 있으니만 못한 바깥세상으로 나선다는 건 죽기보다 더한 일이다. 그러니 기껏 고를 수 있었던 마지막 유언이라고는 형식적 인사 한 마디일 수밖에.


그녀가 자신의 수치로부터, 삶으로부터 도피하는 과정은 매번 너무나도 의연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상처를 키우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지금도 그런 종류의 문제라면 무엇이 옳은 지 잘 모르겠다. 옳은 것이 있기나 한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때 그녀는 내 몫까지 도망쳤다. 나는 슬플 땐 슬픈 영화를 보는 게 도움이 된다는 걸 그때 처음으로 느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해되지 않는 것들과의 유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