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me (2011)
퇴폐미가 지배하는 영화. 왠지 에곤 쉴레의 그림을 생각나게 했다. 쉴레를 언급함으로써 이 영화를 관통하는 분위기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음울하고, 관능적이며, 쾌락과 고통, 희열과 죽음과 같은 단어들이 벌거벗은 몸짓 위로 떠오른다는 사실에서는 강렬한 공통점이 있다.
101분의 러닝타임을 ‘한 섹스 중독자의 이야기’라고 쉬이 압축할 수도 있겠지만, 영화에는 그 짧은 문장 안에 포함할 수 없는 감정의 편린이 너무나도 많다. 제목이 의미하는 ‘수치심’이란, 딱딱한 가면 너머에 더 이상 거짓으로 연기할 수 없는, 마음의 아주 내밀하고 연약한 부분이 건드려졌을 때를 가리킨다. 영화의 이야기는 그런 영역에 닿아있다. 야한데, 우울하다. 기분이 꽁기꽁기하니 쉽사리 잠들기 어려운 날,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맥주 한 캔 마시며 보면 딱 좋을 것 같은 그런 영화다.
주인공 브랜든(마이클 패스벤더)은 일하고 밥 먹고 이동하는 시간 외에는 성적 쾌락을 탐닉하는 일에 모든 정신적 에너지와 칼로리를 쏟아붓는 남자다. 어느 정도냐 하면, 밑 빠진 독에 물을 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과연 독에 난 구멍은 무엇으로 메꿔야 할는지 보이지 않고, 그는 이미 오래전에 답을 찾기를 포기한 것 같다. 마치 알코올 중독처럼 한시라도 제정신으로 돌아오기를 거부하면서 쾌락의 순간으로 끊임없이 도피하는 것이다. 불청객인 여동생 씨씨(캐리 멀리건)의 등장으로 인해 그는 그러한 자신의 수치를 더욱 적나라하게 마주 보게 된다.
기본적 욕구의 과잉 현상은 정신적 공허에서 오는 것 아닐까. 브랜든은 성불능자가 아닌 관계불능자다. 장난스럽거나 위험천만한 만남들에서는 대범하게 굴다가도, 평범한 데이트에서는 급격히 서툴어지고 만다. 그러나 그의 여동생은 그저 하룻밤 불장난으로 넘어갔어야 할 유부남에게조차 미련을 갖는다. 무언가에 대한 결핍이 야기하는 그들의 정서적 불안은 다소 극적이기까지 하다.
두 남매 사이의 어딘가 묘하고 의문스러운 분위기는 ‘혈육’이자 ‘보호대상’, 그리고 ‘이성’이라는 복잡다단한 심리가 얽혀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뭐가 되었든 간에 핵심은 그 둘의 관계마저 튼튼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여동생은 오빠의 관심과 배려가 필요하고, 오빠는 그런 여동생이 성가실 뿐이다.
갈수록 선정적인 장면들과 점점 더 심해지는 주인공의 정신적 공황상태가 오래도록 스크린을 비춘다. 음란한데 자조적이라니. 몹시도 인간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자칫 뻔하고 지질한 포르노그라피로 전락할 수도 있었다. 이를 예술적인 경지로 끌어올린 주연배우 마이클 패스벤더의 존재감은 가히 대체 불가능한 수준이다.
그의 위태로운 일상은 보고 있노라면 속이 깝깝해질 지경이었지만, 당장 이건 영화고 마이클 패스벤더니까 넘어간다고 하더라도, 어쩐지 개탄하는 대신 지나치게 쉽게 설득당하는 기분이었다. 그의 방종이 철저히 개인의 사적인 영역을 고수하고 있기도 하거니와, 처연한 그의 모습에서 풍겨져 나오는 ‘구제되지 않을 것 같은’ 병적인 외로움이, 언젠가 한 번쯤 느껴보았던 그것인 양 밀려들어와 나를 잠식시켰기 때문인 듯하다.
※ 2014년 10월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