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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유진 Dec 15. 2016

선율과 환상

라라랜드 (2016)


살아있는 재즈를 즐겼던 순간이, 그니까 언제 끝날 지 알 수 없는 연주자들의 손놀림에 맞춰 함께 작은 숨을 들이마셨던 그런 기억이, 무심코 떠올려보니 정말 오래되었다. 나는 늘 쉽고, 빠르게, 녹화된 라이브를 꺼내어 듣는다.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의 보존된 영광, 온스테이지의 활현한 현장 같은 것들을.


<라라랜드>를 보고 나니 새삼 공연이 그리워졌다. 굳이 재즈가 아니어도 좋다. 내가 발견하든 말든 때때로 크고 작은 실수가 벌어지는, 기억이 흐려져도 다시 돌려볼 수 없는 그런 공연의 현장이 그립다.


<라라랜드>는 <위플래시> 감독이 찍은 뮤지컬 로맨스다. 그 사실만으로도 꼭 봐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넌더리가 나게 했던 그 광기와 집요함을 추억하며 근사한 로맨스 영화를 기대하는 나 자신이 조금은 우스웠지만. 그러나 시사회로 향하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시사회는 월요일 밤 8시였는데, 다음날 아침 수업에서 중요한 발표가 있었다. 급한 대로 우주의 기운을 빌려 발표 준비를 마무리하고 달려 나왔다. 상영 장소는 잠실 롯데월드몰이었다. 늦을까 봐 허겁지겁 육회비빔밥을 먹으면서도, 좌석이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뛰쳐나가자고 다짐했다.


영화가 시작했다. 지루한 도로 위, 멈춰 선 차들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잠시 후 다들 약속이나 한 것처럼 차 밖으로 기어 나와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답답한 교통체증의 현장에서 흥겨운 춤판이 벌어지는 건 먼 옛날 싸이 뮤직비디오에서도 봤던 익숙한 장면이었다. 나는 여자 주인공 미아(엠마 스톤)가 제 뒤에서 신경질적으로 크락션을 울리는 남자 주인공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에게 친히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들어 훗날의 인연을 점지하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이러려고 먼 길을 달려왔나 자괴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정을 보여주면 사람들은 결국 그 열정을 사랑해주게 되어있다"는 미아의 말이 주문처럼 나를 홀렸을까? 나는 어느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영화를 사랑하는 여자와 재즈를 사랑하는 남자, 어쩌면 감독의 분신일지도 모르겠다. 미아도, 세바스찬도, 언젠가 조금은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열정을 알아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냥 그만큼의 실력도 운도 없는 것은 아닐까? 외롭고 초라한 무대 뒤에서 무너져 내리는 미아의 표정은 내게도 거울처럼 가까운 것이었다. 스크린 위로 깜빡거리는 계절이 예고하듯, 운명 같았던 그들의 연애는 뜨겁게 끓는 아지랑이였다가 이내 서늘한 바람이 되어 엇갈린다.


아직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은 여기서 이만 안녕해야 될 것 같다. 이 영화는 결말이 제일 재미있다.


그들의 마지막 계절은 5년 뒤에나 찾아온다. 거대한 영화 포스터 하나를 그녀의 작은 얼굴이 오롯이 장식하고 있다. 그녀는 세바스찬이 아닌 다른 남자와 가정을 꾸리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성공의 궤도에 올랐기 때문일까, 그녀는 좀 더 차분해졌고, 기품 있어졌다. 그녀는 남편과 우연히 들어선 어느 재즈클럽에서, 멋지게 실현된 세바스찬의 꿈을 발견한다. 그녀의 흔적이 남아있는 꿈을. 미아와 세바스찬의 눈길이 마주치고, 무거운 침묵을 깬 그는 이윽고 따뜻했던 계절의 그 멜로디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마법처럼, 그들의 순간은 그 곡이 가장 처음으로 울려 퍼졌던 어느 날의 레스토랑으로 되돌아간다.


<라라랜드>의 마법은 달콤 씁쓸하다. 헤어진 연인들이 우연히 재회한 순간 펼쳐지는 '만약'의 판타지다. 만약 내가 그때 그러지 않았다면, 만약 그래서 우리가 계속 함께 할 수 있었다면, 만약 우리가 결혼하고 예쁜 아이를 낳았다면. 연주곡 하나에 불과한 짧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들이 함께 했던 모든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크린 위로 달려 나오고, 그들의 어긋났던 과거는 모두 행복하고 열정적인 환상으로 덧그려진다. 쌀쌀맞게 레스토랑을 박차고 나갔던 그는 이제 그녀에게 열정적으로 키스를 퍼붓고, 그녀의 연극에 참석하지 못했던 그는 지금 꽉 찬 객석에서 누구보다도 힘차게 기립박수를 치고 있다. 그렇게 아름다운 후회를, 또 볼 수 있을까?


연주가 끝난 뒤, 박수갈채로 북적거리는 재즈클럽에서 둘은 옅은 미소를 보내며 작별한다. 사흘 밤낮을 궁리한들 그 기쁘고 슬픈 두 사람의 표정이 남긴 아련함을 잘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은 이런 때 필요한 것인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 찬 바람과 정전기에 실랑이를 벌이면서도 나는 애틋한 그 마지막에 오래도록 붙들려 있었다. 무엇에 대한 것인지 모를 향수가 남아서, 막연히 그날의 밤처럼 어둑어둑한 재즈바를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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