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뷰티 (1999)
<아메리칸 뷰티>는 욕망을 발산하는 영화다. 하지만 네 마음대로 살라고 부추기는 작품이냐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그렇다고 대답하기가 어렵다. 지금 억눌린 욕구로 괴로워하는 누군가가 이 영화를 본다고 쉽사리 해방감을 느낄까.
영화는 어떤 욕망에 대한 내적 갈등, 정확히는 실체가 보이지 않는 외부와의 갈등을 보여주면서, 그 다툼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킨 주인공 레스터(케빈 스페이시)의 모습을 집중해 쫓는다. 그러나 자유롭게 살아야 하는 근거는 오직 그의 표정 속에만 있다.
아역배우들이 하나 같이 포스가 넘쳐서 언뜻 보면 애들이 말썽 피우는 영화 같은데, 끝까지 보고 나면 심각한 문제는 어른들에게 있다. 쇼윈도 부부로 사는 레스터는 외동딸 제인의 친구 안젤라에게 욕정을 느끼고, 제인은 그런 아버지를 끔찍이 증오한다. 신경질적인 아내 캐롤린(아네트 베닝)은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운다. 일터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두 부부에게 모두 가혹하지만, 레스터는 돌연 직장을 그만두고 패스트푸드 가게 점원으로 취직해버린다.
위태위태한 가족이기는 이웃집도 마찬가지인데, 옆집에 이사 온 소년 리키는 주변의 모든 것들을 녹화해대는 괴벽을 가진 데다가 마약을 밀매하고 있다. 그 사실을 모르는 그의 군인 아버지는 아들이 레스터와 부정한 관계에 있다고 착각해 아들을 구타하기에 이른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개개인이 욕망을 통제하는 가치관의 그 냉혹함이었다. 가장으로서의 긍지만 남은 채 기쁨은 부재하는 삶을 살고 있는 캐롤린, 혐오로 자기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퇴역군인에게서 특히 그런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영화는 기호를 넘어선 가치관으로서, 마치 우리 사이에 유행하는 어떤 '인생 취향'의 존재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렸다.
취향은 욕망의 방향이다. 취향이 없거나 희미하면 아무거나 입고 먹는다. 넓게는 가치관을 가리키기도 한다. 취향은 존중받아야 한다는데, 그것도 존중받을 취향이 오롯이 있어야 가능한 이야기다. 취향도 유행을 탄다. 그리고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은 세상에 좋은 취향(Good taste)이라는 게 있다고 여긴다.
좋은 인생이라는 이름의 망령은 자꾸만 내 인생에 메워야 하는 구멍을 낸다. 지금의 나 자신보다는 내 주변과 세상이 원하는 바에 더욱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는 것, 남들 눈에 번듯한 모습이 곧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이 되어버리는 것, 어쩌면 그것은 돌고 도는 인생 유행인지도 모르겠다. 영화 속의 어른들은 여러 가지 현실적 이유로 자기 스스로를 통제하는 데에 익숙해져 있다. 물질만능주의 아래에서 강도 높은 스트레스를 참아가며 일을 하고, 이성애주의 사회에서 호모포비아로 산다. 행복을 위한 고난인 양, 그러나 사실은 끝이 보이지 않을 뿐인 괴로움을 스스로에게 계속 주입한다.
몇 안 되는 행복해 보이는 인물들은 다소 비현실적일 정도로 주변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좋아 보이는 모습이 아니라 좋은 대로 행동한다. 주인공인 레스터가 활기를 찾고 당당해지는 순간 역시, 자기가 하고 싶은 걸 찾아나가며 그걸 아무도 막을 수 없다고 선언하면서부터다. 그는 인생의 주인을 자기 자신에게 되돌려주고 현재의 욕망에 솔직해진다. 물론 레스터가 미소를 되찾았다고 해서 주변 사람들까지 덩달아 행복해진 건 아니다. 나 같아도 내 친구에게 끈적한 시선을 보내는 아빠한테는 구역질이 날 테고,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스포츠카를 사놓고 딴청을 부리는 남편은 꼴도 보기 싫을 테니까.
깨달음의 분기점을 알리듯, 그의 눈빛은 극 중반부에서 새 출발을 기리며 자신만만한 결의에 찼다가 결말에 이르렀을 때 한없이 평온해져 있다. 그는 삶에서 행복을 느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답을 찾았다. 그게 비록 이미 엎어진 물이라고 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