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읽은 책을 다시 읽는 것은 내게는 해리포터가 아니고서는 드문 일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미스터 노바디>라는 영화는 세 번 보았는데, 몇 년에 걸쳐서 어쩌다 보니 또 보게 되었다. 물론 여러 번 볼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지만, 그게 어떤 명작이든 세 번이나 본 것은 개인적으로 기념비적인 일이었으므로, 그 영화에 대한 소감을 기록할 때는 회차를 거듭할 때마다 점차 다른 장면과 의미들에 주목하게 된 사실을 주제로 삼기도 했다.
한 번 본 작품을 좀처럼 다시 보지 않는 이유에 대해 약간의 변명을 하자면 나에게는 아직 못 본 책과 영화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론 현실의 나는 무한 스크롤과 알고리즘이 던져주는 더 시시콜콜하고 영양가 없는 콘텐츠들로 무심코 시간을 낭비하곤 한다.
그래도 요즘은 뭔가를 별 이유 없이 다시 볼 때가 있다. 그냥 재미있어서. 어린 시절에 해리포터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던 이유도 단지 재미있어서였다.
내 인생은 다시 봐도 재미있을까?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가 그런 것이다. 1991년 서울에서 임 모 씨와 진모 씨의 첫째 딸로 태어난 내가 이러쿵저러쿵 살다가 언젠가 죽고, 다시 1991년에 서울에서 같은 부모에게 태어나 같은 인생을 살다가 같은 방식으로 죽기를 반복한다는 것이다. 니체는 만약 그렇게 똑같은 인생이 무한정 반복된다면 어떻게 살 것이냐는 질문을 던졌다. 대여섯 번 읽은 해리포터는 실은 무한 번 읽은 셈이 된다.
영원회귀가 뭔지 몰랐던 열아홉 스물 무렵에도 막연하게나마 언제 끝나도 괜찮은 삶을 살자고 다짐하곤 했었다. 미래가 아닌 현재에만 충실하자는 근시안적인 태도는 아니었다. 다만 후회 없이 살자는 마음가짐이었다. 지나고 나서 자책해 봐야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정신이 멀쩡할 때는 잘 알고 있었다.
니체의 말이 아니더라도 삶은 충분히 반복되는 것처럼 보인다. 일단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주로 좋은 일보다는 안 좋은 일이 반복될 때 나는 그 말을 곧잘 떠올린다. 사람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고, 한 번 불거진 문제는 잊을만하면 다시 터진다.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시간의 단위도 있다. 매일 해가 뜨고 진다. 계절이 돌아온다. 학교에서는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고 회사에서는 매년 시무식을 한다. 별들의 자전과 공전이 만들어내는 절기, 사회적으로 약속된 여러 가지 기념일과 분기점에 따라 시간은 특정한 단위를 가지고 규칙적으로 되풀이되며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른 듯 같다.
인생이 계속 반복된다면 우울했던 시절도 반복될 것이다. 나는 어떻게 우울했었나? 이 글을 쓰기 위해 자살 사고에 시달리던 시절의 일기를 여러 차례 다시 들여다봤다. 5월부터 약을 먹기 시작했지만 가을학기가 한창인 10월에도 인생을 끝내버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고 있었고, 해가 저물어가는 12월에도 스물몇 해 동안 이룬 수많은 성취들이 마음을 위로해주지 못할뿐더러 단지 얄팍한 술수처럼 나를 잠깐씩 이승에 목매어 두는 것들로 느껴졌었다.
증세가 심해졌을 때는 헹궈서 말려 놓은 유리병 따위를 보면 깨서 목이나 손목을 찌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걸 실행에 옮기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판단에 다다랐을 때 공포가 밀려왔다. 그래서 대낮에도 날카롭거나 뾰족한 것을 보면 마음이 불안해져서 눈에 안 띄는 곳으로 치워두곤 했다. 빠르게 죽지 못한 탓에 고통을 참지 못하고 직접 긴급전화를 거는 비참한 상황도 자주 상상했다. 행여나 그런 사태가 벌어진다면 그날을 기점으로 내 몸과 내 삶은 이전과 크게 달라질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상상 속에서 그것은 결코 희망적인 변화가 아니었다.
그 시절에는 규칙적인 일상생활 자체가 어려웠다. 밤에 잠들기가 어렵고 꿈자리도 사나워서 아침에 개운하게 일어날 수가 없었다. 수업 시간에 지각하거나 아예 빼먹는 일들이 잦아졌다.
체중은 점점 빠졌지만 몸은 더 무겁게 느껴졌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만나고 어울리는 것이 꺼려졌다. 웃는 게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친구들이 내게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그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여기며 우울해하기도 했다. 스스로를 공격하고 싶어 했다가, 나중엔 그냥 증발하고 싶어 했다.
이런 시간을 모조리 다시 겪어야 한다면 전혀 달갑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순전히 글을 쓰기 위한 목적으로 그 순간의 감정들을 낱낱이 복기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 특별한 목적의식 없이도 나는 종종 어떤 생각들을 구태여 반복함으로써 스스로에게 쉽게 고통을 주곤 했다. 주로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하면서 그랬다. 현실을 고쳐 쓴 각본을 읽고 또 읽고 다시 고쳐 쓰는 것이었다. 그런 상상은 카페인처럼 언제라도 잠을 몰아내고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한 번 빠지면 쉽게 헤어 나오기 어려웠다. 부질없음을 알기에 늘 어느 시점에는 ‘그만 생각하자’라는 이정표를 세우곤 했지만, 그 이정표는 사실 도돌이표에 불과했다. 많으면 하루에도 몇 번씩은 ‘그만 생각하자’라는 그 생각 앞으로 돌아가고 말았으니까.
그만 생각하고 싶었던 과거의 사람들 중에는 그래도 만약 그때로 돌아간다면 또 만날 것이고, 그래서 결국 원망을 하던 후회를 하던 같은 결말을 거듭하더라도 여전히 나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게 되리라 여겨지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과의 관계를 반추할 때, 나는 박살 난 도자기 찻주전자를 억지로 이어 붙여 놓은 모습을 떠올린다. 주전자로써의 수명이 끝났음에도 찬장 어딘가에 그걸 모셔 두고 이따금씩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쳐다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달력을 보다가 다음 달이 내 생일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면, 머릿속에는 생일날 그 사람이 또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안부를 물어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며든다. 그것은 긴장, 불안, 두려움, 반가움과 분노 같은 복합적인 감정들이 한꺼번에 밀려드는 달콤 씁쓸한 상상이다.
자동적으로 마음 한 편에서는 여러 가지 선택지를 준비한다. 맨 처음에는 연락을 못 본 체해야겠다고 다짐하다가, 성숙한 이별 또는 재회를 대비해서 부드럽게 안부 정도는 되물어보는 게 좋겠다고 스스로를 다독이기도 한다. 그러나 얼마나 다정한 인사말을 나누더라도 결국 그 관계의 형태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예감하게 된다. 그래서 지레 실망할 준비를 하고, 결국 내가 진실로 원했던 것은 이별이 아니었음을 실감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어차피 이제 연락 따위 오지 않을 텐데 밥 먹고 이런 망상은 대체 뭣하러 하는가 스스로에게 반문하는 것이다. 그만 생각하자. 그러고는 하루 종일 책상 앞에서 일했던 몸이 굳어지지 않을 정도의 스트레칭을 하고 뜨거운 물이 쏟아지는 샤워기 앞에서 섰을 때 한 번, 머리를 말리고 느슨한 잠옷을 입고 침대에 누웠을 때 또 한 번, 의식은 마치 굴뚝으로 빨려 들어가는 연기처럼 자꾸만 그 도돌이표로 돌아가고 만다.
2022년은 서울에서 지하철 시위가 거의 매주 있었다. 지하철이 멈추어 출근길 오전을 내내 낯선 길에서 보낸 어느 겨울날, 문득 이 상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어떤 사람이 여기에 나를 홀로 던져두고 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두꺼운 외투로 온몸을 꽁꽁 여미고 있었음에도 갈비뼈 사이로 찬 바람이 드나들었다.
며칠 뒤 어느 날은 얼어붙은 밤공기가 부서지듯 때리는 차창 너머를 바라보다가 그만 함께 서늘해진 마음으로 그 사람과의 모든 일들을 없었던 셈 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버스에서 내려 어둑어둑한 길을 따라 집에 도착할 무렵엔 이게 끝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 섞인 미련에 사로잡혀 있었다.
해가 지난 2023년 1월에는 복수와 용서에 대한 소설을 읽고 토론을 할 일이 있었다. 가끔 들려오던 “잘 사는 게 최고의 복수”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 잠시 생각해 봤다. 사실 잘 사는 것은 복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나만의 결론이었다. 행여나 나의 불행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약 오르게 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특별히 누군가를 불행하게 만들어야겠다고 작정하지 않고도 타인을 불행하게 만든다. 나의 안위는 내 문제지,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용서는 무슨 소용인가. 단지 스스로를 위한 최선의 선택으로써 나는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2월에는 주차된 차들을 가로질러 가던 길에 문득 그 사람을 미워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냥 각자의 선택을 한 것이니까. 그런 식으로 갈림길을 만나며 점점 멀어진 사람들을 떠올렸다. 이전에도 제법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이 모두 이제는 기억도 잘 나지 않을 정도로 아득히 멀어져 버렸음을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 지나간 일들로 마음을 어둡고 탁하게 만들지 말자. 미워한들 그리워한들 달라질 것도 없고, 삶이 반복된다면 또 만나게 될 거니까. 그런 다짐을 하며 새롭지만 익숙한 갈림길을 걸었다.
5월이 되었다. 하늘이 약간 흐렸지만 그래서 눈부심 없이 거닐기 좋았던 어느 봄날에 그 사람과 강변을 따라 만보를 걸었던 게 떠올랐다. 그날 한강공원은 쇠라의 그림 같았는데, 이제는 그날도 아득히 먼 추억이 된 것이다. 한때는 야경, 벚꽃놀이, 라면이나 토끼풀이었던 한강공원. 지나간 사람들은 내게 누군가와 함께 할 때에만 누릴 수 있는 안온한 기분을 가르쳐 주었다.
사실 모든 일들이 언제까지나 똑같이 되풀이되는 것은 아니다. 즉 반복되는 것들에도 변주는 있다. 반복되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나를 떠났거나 내가 떠난 사람들을 생각할 때, 사실 처음에는 한 가지 생각만 한다. 가령 자책하며 후회하거나, 상대방을 원망한다. 그러다가 그 생각은 점차 다른 생각과 새로운 깨달음으로 옮겨 간다.
같은 터널을 빠져나오기를 반복한다고 느꼈지만 실은 점점 다른 모습의 터널을 지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이 슬프고 창피한 과거를 받아들이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 희망을 갖게 한다.
또 어떤 종류의 좋음과 어떤 종류의 나쁨이 반복될지, 알면서도 알 수가 없어서 두렵다. 그러나 다음 악장으로, 다다음 악장으로 계속 변주될 거라는 것만은 확실해서, 오늘 밤도 눈을 감고 내일이 오기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