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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유진 Aug 08. 2023

기분 다스리기

그래도 누군가는 당신이 힘들다는 사실을 알아주어야 한다.


우울증 치료를 시작할 때 의사와의 첫 면담에서 받았던 숙제가 심리상담센터에서 정기적인 상담을 병행할 것, 그리고 감정을 표현하는 일기를 쓸 것이었다.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싫어서 상담소는 절대로 가고 싶지 않았는데. 그러나 의사 말은 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결국 상담소를 찾아가게 만들었다. 정말 회복을 원했으므로.


그래서 결국 보건소에서 그랬던 것처럼 얼마 뒤 교내 상담소에서도 통과 의례처럼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또 무슨 잡다한 일들이 있었는 지를 털어놓고 말았다. 기계적으로 입을 움직이는 내 얼굴을 유체이탈한 내가 허공에서 내려다보는 듯했다. 그렇게 영혼 없이 말하던 중 어느 지점에는 결국 눈물이 고여서, 테이블에 준비되어 있던 티슈를 뽑아 눈가를 찍어 눌렀다. 같은 대학원생 정도로 보였던 젊은 상담사가 나보다 더 진심 어린 표정으로 내 이야기에 몰입하여 경청해 주었던 것은 부담스러우면서도 자못 위안이 되었다.


본상담은 그곳에서 제일 나이가 많아 보였던 중년의 여자 선생님이 진행했다. 선생님은 내가 입을 열 때마다 상담일지에 늘 쉼 없이 무언가를 기록해 나가던 것을 제외하면, 그래서 단어 선택에 약간은 더 신경을 쓰게 만들었던 점만 아니라면 우울증 환자인 내게 특별히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가령 내 상태나 근황에 대해 세심하게 물어보고 관심은 보이되 이러쿵저러쿵 진단하거나 분석하는 듯한 언행은 최소한으로 삼가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상담 과정을 점차 편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의사 선생님과는 일상과 학업을 이어가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얼마나 호전되고 있는지, 즉 잠은 잘 자고 밥은 잘 먹는지와 같은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예후를 확인했다면, 상담사 선생님은 그보다는 가볍게 내게 그 주에 어떻게 지냈고 무슨 일들이 있었는 지를 물어보곤 했는데, 그러다 보면 상담소를 처음 찾아왔던 계기와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도 많았다. 하지만 이런 게 상담인가 싶으면서도 점차 다음 상담이 기다려졌다. 결과적으로 그 과정이 삶을 2주씩 연장시켰다.


밤에는 혼자 일기를 썼다. 의사의 조언대로 사실보다는 감정에 초점을 맞춰보면서.


혼자 있는 밤은 하루 중 사람들 앞에서 멀쩡한 척 힘을 낼 필요가 없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온몸을 뒤덮은 비늘과 지느러미를 이끌고 낮 시간 동안 땡볕이 내리쬐는 뭍을 어기적어기적 걸어 다니다가, 모두가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면 나도 다시 칠흑 같은 바다로 돌아가는 것이다.


고요한 밤도 있었고 풍랑이 치는 밤도 있었다.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이 아닌데도 일기를 쓰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운 날들도 있었다. 내게 기록이란 오래전부터 덤블도어의 펜시브처럼 생각을 꺼내어 넣어두고, 그럼으로써 나는 더 이상 그것을 기억할 필요가 없도록 머리를 비우는 작업이었는데, 이 시절에는 조금 더 절박한 생존 노동에 가까웠다. 자기 전 키보드를 두드리는 일은 그만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상념들을 쓰레받기로 퍼서 일기장이라는 물동이에 쏟아 넣는 과정이었다.


가끔은 몇몇 소중한 친구들, 예를 들면 같은 학교 친구와 늦은 밤까지 맥주 한 캔과 과자 조금을 앞에 두고서, 또는 멀리 떨어져 사는 친구와 핸드폰 또는 노트북으로 지체 없이 길고 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러면 나는 잠시 외로움을 잊은 채 바다 위에 둥둥 떠서 밤하늘의 별을 바라볼 수도 있었고, 날이 밝으면 뭍에 있는 아름다운 것들을 함께 보러 가기로 약속할 수도 있었다.


지금은 신기하게도 밤보다 낮이 좋다. 햇살이 드는 풍경이 좋고 그 사이를 거니는 내가 좋다. 힘이 아주 넘치는 건 아니지만 그건 그냥 전보다 나이를 더 먹었고 운동은 덜 해서 그럴 것이다.


요즘 기분을 다스리기 위해 쓰는 방법 중 하나는, 하루쯤은 일부러 우울하거나 불길한 생각을 해서 완벽하지 않고 나약한 자신을 확인하는 것이다. 사실 이 일은 놀라운 자연의 섭리를 따라 매달 돌아오는 월경 전 증후군 시기에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예를 들면 자기 전에 틈틈이 읽던 책이 요전과 달리 갑자기 슬프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그럼 작정하고 울면서 휴지를 한 움큼 써버리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왠지 속이 후련해지고, 훨씬 수월하게 깊은 잠에 빠지곤 했다.


그렇게 여러 달을 보내고 나니, 정말 어떤 일로 스트레스를 받거나 마음이 우울해진 시기에는 월경 주기에 관계없이 잠을 설치고 기분 나쁜 꿈을 많이 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는 나의 힘듦을 알아주어야 하지만,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나를 지켜보고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한다.


힘들었던 시기에, 나는 스스로가 힘들다는 사실을 깨닫고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점차 그것을 직시하고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나아지기를 바라고 노력했다. 고맙게도 많은 사람들이 매일밤 머리맡을 따스한 빛으로 밝혀 주었지만, 그 빛이 마음에 도달할 수 있게 길을 열어주는 것, 소중히 품고 간직하는 것은 내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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