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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유진 Jul 25. 2024

약물 치료

많은 사람들이 항우울제의 의존성을 우려한다. 항우울제는 의존성이 없다. 그러나 설령 있다 하더라도, 약에 좀 기대서 일상생활이 나아질 수 있다면 차라리 의존하고 마는 것이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의존성을 염려하는 사람은 아마도 약의 여타 다른 부분에 대해서도 잘 모르기 때문에 이런저런 이유를 대가며 복용을 기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치료가 필요한 상황에서도 약은 가능한 안 먹는 게 좋다고 생각하여 꺼리는 것은, 내게는 다리가 부러졌는데도 목발 안 짚고 휠체어 안 타겠다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이렇듯 약물 옹호론자인 나에게도 막상 복약을 시작하는 일은 겁도 나고 한편으로는 자괴감까지 드는 경험이었는데, 그것은 약을 먹는 게 좋겠다는 의사의 소견이 내가 정말로 화학적 치료가 필요한 병자라는 선고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었다. 실제로는 그런 의미가 아닐 수 있다고 해도 말이다. 도움을 받기 위해 병원에 간 것은 맞지만, 그 결과로 처방전이 내려진 상태에 대해 받아들이는 시간은 얼마간 더 필요했다.


또한 과거의 나는 어리석게도 약을 먹는다는 사실에만 신경 썼지, 그게 어떤 약인지에는 그리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훗날 비슷한 증세가 재발하거나 다른 문제로 다시 병원을 찾게 될 가능성을 고려했다면, 처방받은 약의 이름이 무엇이고 약효나 부작용이 있었는지를 될 수 있는 한 꼼꼼히 기록해 두는 게 좋았을 것이다.


나는 도움이 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약은 매우 간편한 해결책이었다. 매일 같은 시간에 뭘 챙겨 먹어야 하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먹기만 해도 문제가 일정 부분 해소될 수 있는 엄청난 편의성을 기대할 수 있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간혹 술로 괴로움을 잊으려는 사람을 보면 내가 더 낫다고도 생각했다. 물론 나는 약도 먹고 술도 마셨다.


그러면서도 약에 대해 떳떳하지 못하고 초조한 감정은 늘 옅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누가 알게 되면 왜 먹는지 해명해야 할 거 같아서, 지나친 동정심을 살까 봐, 내 호르몬이나 신경전달물질의 균형이 깨진 게 아니라 내 사고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할 것 같아서, 굳이 약을 먹는다는 얘기는 입밖에 꺼내지 않게 되었고, 어쩌다 알리게 되더라도 그게 얼마나 적은 용량이며 널리 쓰이는 약인지 따위를 애써 부연했다. 듣는 사람을 안심시키려는 말 같아도, 실제로는 스스로를 방어하려고 하는 말들이었다. 난 괜찮고, 관리도 잘하고 있는데, 의사도 아닌 사람들이 걱정이랍시고 왈가왈부할까 봐 지레 기분이 안 좋았는지도 모른다.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라고들 하지만, 아무도 감기와 동급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텔레비전의 코감기약 선전은 우스꽝스럽지만, 심리상담센터의 홍보 교육은 진지하고 엄숙하며 슬프기까지 하다. 그러나 나는 슬픈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열이 내리지 않고 기침이 멎지 않는 것처럼, 단지 나 자신 또는 삶의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병적으로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것뿐이다.


결국 병원에 다니는 생활에는 늘 어딘가 이중적인 측면이 있었다. 병원에 다니기로 한 스스로의 선택에 대해서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잘했다고 여기면서도, 가급적 주변 사람들이 모르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병원에 들어가고 나오는 길에는 늘 스스로의 존재감을 사그라트리기 위해 조용하고 빠르게 걸었다. 처방전과 약봉투는 항상 숨겼다. 그러나 정신과 약을 먹는 걸 못마땅해하던 부모님에게는 화를 숨기지 않았다. 약을 먹는 것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나 또한 언젠가 약을 그만 먹게 될 날을 고대했다.


약이라는 방식이 간편하다고 느껴졌던 이유는 약이 노력을 대체한다기보다는 타인의 공감이나 지지 따위가 없어도 그럭저럭 상황을 견디는데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남의 말을 들어주는 데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지나친 아량을 바라고 싶지 않다. 적당히 알아서 해결하고 싶다.


또 약을 선호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꾸거나 해결할 수 없는 것들 사이에서 내가 시도할 수 있고 인과관계가 있는 무언가였기 때문이다. 약은 들거나 들지 않는 것, 늘리거나 줄이는 것이다. 지나간 일은 돌이킬 수 없고, 상황은 바라는 대로 되지 않고, 좋아하고 미워하는 마음 같은 것들은 스위치처럼 끄고 켤 수가 없다. 그런 어찌할 수 없는 문제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고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던 셈이다.


약은 부표 같은 것이었다. 시간이 강물처럼 흘러간다면, 그걸 거부하고 돌을 매달아 잠겨 죽고 싶었던 나에게 공기를 불어넣어서 옆으로, 옆으로, 떠내려가게 했다. 그 숨 불어넣기를 나는 사람이 아닌 약에게 의탁하고 싶었던 것 같다. 먹어서 모든 게 해결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단지 먹어서 해결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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